오래 참고 기다리라(동영상)

날짜: 
2013/08/03
말씀: 
약 5:7-8
말씀구절: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약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설교: 

약5:7-8 오래 참고 기다리라.

'참는다(be patient)는 것과 '기다린다(waiting)'는 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 캐나다와 한국 사회가 다른 것 중의 하나가 기다리는 문화입니다. 한국 사람이나 캐나다 사람이나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서서 오랫동안 기다리기는 싫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기다리면서 잘 참지 못합니다. 괜히 짜증과 화가 나고 열을 쉽게 받습니다. 그러나 여기 캐나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잘 참습니다.

참고(be patient) 기다리는(waiting) 것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문화적 차이도 있을 것이고, 습관적 차이도 있을 것이고, 성격적 차이도 있을 것이고, 그 때의 상황이나 환경에 따른 차이도 있을 겁니다. 저의 경우 여기 캐나다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기다리는 것에는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참는 것일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 자존심에 상처를 입거나 심한 모욕을 당하면 참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래서 인상을 짓고, 욕을 하고, 그에 따른 복수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 크리스천에게 '참아라.'고 말하는 것은 이를 갈며 '두고 보자.' 하는 식으로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욕을 당해도, 무시와 멸시를 당해도 상대방에게 복수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선한 마음을 품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잘 참는 사람은 기다림의 성적도 우수합니다. 그러나 잘 참지 못하는 사람은 기다림의 성적도 나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분문에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길이 참고 기다리라.'고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여러분! 왜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만 할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이조 시대에 장공예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한곳에서 9대째 내려오면서 이사하지 않고 자손이 오순도순 화목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900여명이 한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9대를 내려오면서 다투지 않고 화목하게 살았습니다. 고종은 이 소문을 듣고 장공예라는 사람에게 그렇게 한 곳에서 오랫동안 살 수 있는 비결과, 온 가족이 그렇게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장공예라는 사람이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에 한자어로 참을 인(刃)자를 수백 개를 빽빽하게 썼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을 말했습니다. "전하,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화목하지 못하는 것은 참지 못해서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참기만 하면 오래 동안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오랫동안 같이 살다(지내다) 보면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이때 참지 못하고 쉽게 화를 내고, 토라지면 화목은 물 건너가고 맙니다. 부부간의 화목도, 성도 간의 화목도, 친구 간의 화목도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참아야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길이 참는다.'는 말은 원어에 '마크로뒤메사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참는다는 말입니다. 무섭게 참을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 믿는다고 숫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화형도 당하고, 사자 밥이 되기도 하고, 모진 고문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죽기까지 참았습니다. 그렇게 참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들에게도 생명의 복음이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계2:10)고 말씀합니다. 충성과 헌신과 봉사도 참지 못하면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즉 봉사에 좋은 결과를 얻기 원한다면 죽기까지 참아야 합니다. 순교자는 죽기까지 참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죽기까지 참은 순교자에게 주님은 가장 큰 상급을 주십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는 분들이 자주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참기 힘든 순간이 다가옵니다. 다 때려치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참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 목회자의 길입니다. 성도님의 신앙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교회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결국 참는 사람이 성공도 맛보고, 참는 사람이 축복도 영광도 얻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였습니다(벧후3:8) 세월과 시간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좋은 세월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그러나 힘든 시간은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면 얼마나 힘든 상황입니까? 즉 주님은 그렇게 오랫동안 참는 분이라는 겁니다.

만약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 멸시, 그 천대를 참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왔다면 예수님은 구원의 사역을 완성시키지 못했을 겁니다. 즉 구원의 사역은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래 참는 인내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찬란한 부활의 영광도 인내에서 이루어집니다.

특히 우리는 인내의 교훈을 성경에서 들을 때 누구를 말합니까? 욥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수많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7남 3녀 모든 자녀가 집이 무너져 죽었습니다. 자신은 머리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악창이 걸렸습니다. 너무 아픕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내는 자기를 조롱하고 이혼하자고 합니다. 친구들이 병문안 왔지만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붙입니다. 옛날에 자신을 존경하던 하인들도 이제는 자기를 멸시합니다.

요즘 사람들 같으면 이런 환경에 처하면 자살을 하고 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욥은 참았습니다. 그냥 참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며 참았습니다. 그리고 참는 중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8-10)

여러분! 정금이 되려면 뜨거운 불을 오랫동안 참아야 합니다. 그 뜨거운 불을 통해 자신이 모두 녹아지고 불순물이 걸러져야 비로소 정금이 됩니다. 즉 참지 못하면 좋은 신자가 못됩니다. 참으면서 더욱 겸손해져야 하고, 참으면서 더욱 주님을 바라보고, 참으면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참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분문입니다.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까요? 예수님이 내일 오신다면 내일까지만 참으면 됩니다. 올해 성탄절에 오시면 그때까지 참으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다시 오실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즉 그날이 오기는 오는데 그날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끝까지 참으라는 겁니다. 오랫동안 참으라는 겁니다. 같이 한번 따라 해 보실까요. "끝까지 참자. 예수님 오실 때까지 참자."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고 참고 기다리면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이 주어질 때가 바로 주님이 강림하시는 때입니다. 고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겁니다. 주님을 위해서 눈에 나타나게 별로 한 것이 없어도 주님을 위해서 많이 참았다면 주님은 그에게 큰 상급을 주십니다. 특히 외국 땅에서 하늘나라를 가꾸는 것은 어찌 보면 참는 것입니다. 그렇게 특별히 큰일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외국 땅에서 고생을 실컷 하고, 모욕도 많이 당하고, 큰일도 못하고, 보상도 못 받고, 세월만 낭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청춘을 보낸 것이 억울할 때가 들 수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서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억울한 분이 있습니까? 한번 손들어 보세요? 솔직하게 한번 손들어보세요? (나만 손들었네!)

여기 캘거리 목사님들끼리 허심탄회하게 자주 이야기를 합니다. 나이가 지긋한 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은퇴 얼마 안 남았다. 몇 년 만 더 개기면 된다." 우리가 다 웃었습니다. "아니, 개기다니? 거룩한 목회를 하면서 개겨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우리 목사님들이 다 동감했습니다. "그래, 이민 목회가 힘들긴 힘들지! 누군들 오래 하고 싶은가?"

어떤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를 하면서 성도님들에게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십니다." 한 성도님이 이 말을 듣고 크게 외쳤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러자 목사님이 그 성도님을 향해 물었습니다. "요즘 많이 힘드세요?"

여러분! 이 자리에 요즘 많이 힘든 분이 있습니까? 주님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시고 계속 끝까지 참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힘든 분들에게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 참 기쁜 소식일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 그런대로 잘 나가고 있고, 그런대로 인생이 재미있으신 분들은 예수님 다시 오신다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을 런지 모릅니다.

인생을 살아보신 분들은 압니다. 인생은 재미있을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재미있는 시기는 잠간이고, 인생의 대부분은 힘든 세월입니다. 그러기에 인생은 참아야 합니다. 참지 않으면 인생이 성립이 안 됩니다. 인생이란 그 자체가 참는 겁니다. 더욱이 성도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이 참는 사람입니다. 오른 뺨을 때려도 참고, 모욕을 당해도 참아야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성도로서 참지 않고 영광과 축복과 칭찬만 바라본다면 그는 정신병원에 가야할 성도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끔 보면 한국에서 참지 못하고 외국으로 피신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 땅이란 곳이 더 참아야 살 수 있는 곳이지, 인내 없이 잘사는 동네가 아닙니다.

교회 생활도 그렇습니다. 같이 예수님 믿지만 다 내 마음에 들고, 다 천사처럼 깨끗하고, 다 거룩한가요? 아니에요. 오히려 너도 나도 다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모두가 죄인이기에 서로를 향하여 참아야 합니다. 때로는 옆에서 독한 방귀뀔 수 있어요. 그렇다고 옆에서 독한 방귀 꼈다고 "에이, 재수 없어. 나 이제 교회 안 다닌다." 하고 떠나면 그 사람 이름은 '철부지!' 쯧쯧쯧

여러분! 참지 못하는 성도, 철부지 신자입니다. 참지 못하는 아내 철부지 아내입니다. 참지 못하는 남편 철부지 남편입니다. 인내가 없는 사람, 그대의 이름은 철부지입니다. 결론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외국 땅이기에 더 많이 참아야 합니다. 성도이기에 더 많이 참아야 합니다. 말세가 될수록 더욱 참아야 합니다.

주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예수님이 오십니다. 끝까지 잘 참은 사람, 복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내일도 잘 참는 중에 그날에 그 큰 축복, 그날에 그 큰 상급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잘 이기는 자는 상 주시리니..."(찬송가 39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