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들은 믿지 않았을까?

날짜: 
2007/11/06
설교: 

막6:1-6 왜 그들은 믿지 않았을까?
길가에 살면서 핫도그를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귀가 거의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게에는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그는 눈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문도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핫도그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는 고속도로변에 광고판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길가에서 "아저씨 핫도그 사세요.”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의 핫도그를 사주었습니다. 그는 핫도그에 들어가는 고기며 빵도 늘렸습니다. 그는 더 큰 스토브를 사서 사업을 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집에 와서 그를 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라디오를 듣지 못하셨어요?” 아들이 물었습니다. “신문도 읽지 못하셨어요? 경기가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유럽의 상황은 처참합니다. 미국 상황은 그보다 더 나쁘고요.”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우리 아들은 대학생이고, 신문도 읽고 라디오도 들으니까 아는 게 많은 게 당연하지.”
그래서 아버지는 고기도 줄이고 핫도그 크기도 줄였습니다. 그리고 고속도로변 간판도 내렸습니다. 더 이상 길가에 서서 핫도그를 팔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사업은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아들아, 네가 옳았다. 경기가 곤두박질치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이 이야기는 존 맥스웰의 ‘성공의 즐거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아는 것이 병이다”는 것입니다. 몰랐을 때는 별 탈이 없고 큰 문제가 아니었는데, 아들로부터 들은 약간의 지식 때문에 도리어 큰 문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자로 ‘식자우환(識字憂患)’ 이라고 말합니다. 전에 몰랐을 때는 문제가 아니었는데, 많이 알아서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예 몰라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는 것이 병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배우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주장한 것처럼, ‘아는 것이 힘‘입니다.’ 우리는 할 수 만 있으면 더 많이 배워야 하고,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21세기 정보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배우기는 배우되 제대로 배워야 하고, 알기는 알되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 아는 것이 도리어 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때때로 우리의 아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데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차라리 한국에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몰랐거나, 신앙생활을 아예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곳 캐나다에 와서는 오히려 믿음이 빨리 성장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교회생활에 익숙한 사람이나, 학교 다닐 때 미션 스쿨에 다닌 사람들이나, 군대에 있을 때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등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이곳 캐나다에 와서는 생각보다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는 알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믿기는 믿지만 확실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 아는 것이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나사렛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원래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지만, 예수님을 ‘베들레헴 예수’라고 부르지 않고,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이 자라고 뛰놀며 양육 받았던 고향입니다. 예수님은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공생에 초기에 이미 나사렛을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신 후 벼랑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었습니다(눅4:29).
그 이후 예수님은 가버나움과 예루살렘과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폭풍을 잠잠케 하시고, 군대 귀신들린 자와 열두 해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쳐시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후, 다시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사렛에 가셨는지 본문을 통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하건대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도 구원 받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에 대한, 고향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남다르셨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복음 듣고 구원받아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나사렛에서 어려움을 당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 땅에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다시 고향을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다같이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자, 고향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통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영생과 천국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문제, 기도, 금식, 사랑, 등 지금까지 듣지 못한 여러 가지 말씀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여러 가지 권능도 목격했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가고, 각종 환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지 않고 직접 능력을 행사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렛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행하시는 권능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심을 믿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무엇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요?
1. 질투 때문에
질투심은 사람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 뿐 아니라, 심하게 되면 무서운 죄를 짓게 만듭니다. 어느 책에서 ‘여자들이 얄미워하는 여자‘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10대,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대, 성형수술을 했는데 티 안 나고 예쁜 여자. 30대, 결혼하기 전에 실컷 놀았는데 시집가서 잘 사는 여자. 40대, 밤낮 쇼핑하고 노는데 자식이 대학도 잘 들어가는 여자. 50대, 먹어도 살 안 찌는 여자. 60대, 타고난 건강에 돈까지 많은 여자. 70대, 자녀들이 효도하고 게다가 남편도 멀쩡한 여자. 80대,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글이라고 읽었는데, 마음 한편으로는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글에는 여성들의 시기와 질투가 짙게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무섭습니다. 질투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만듭니다. 미국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 살로비(P.Salovey) 박사는 미국 범죄의 20%가 질투 때문에 일어난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질투는 무서운 범죄를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그런데 질투의 특성 중 하나는 자기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질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곳 캘거리에서 세탁소를 하는 한국 사람은 어느 중국 사람이 중국식당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습니다. 또한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한국 사람은 어떤 캐나다 사람이 시내에서 사업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습니다. 또한 캐나다에 사는 사람이 미국에서 사는 어느 이민2세가 하버드대에 들어갔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 부모는, 그 가정은 좋겠다.‘는 생각은 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질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지역 같은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이 잘 풀릴 때는 질투가 일어납니다. 가까운 사람이 돈 많이 벌 때는 질투가 일어납니다.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잘 될 때는 질투가 일어납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예수님이 기가 막힌 말씀을 전파하시고 신기한 능력을 행사하시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질투심 때문에,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도 보면, 이 질투심 때문에 나사렛 사람들처럼 제대로 신앙생활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질투심은 열정과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 봉사에 대한 열정, 선교에 대한 열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헌신하는 모습과 봉사하는 모습과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저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섬겨야겠다, 나도 이집사님처럼 열정을 갖고 전도해야겠다, 나도 저 김형제처럼 헌신해야겠다.’는 등의 열정이 생겨야 합니다.
그런데 열정이 아니라 질투심이 문제입니다. ‘지금은 저렇게 방방 뛰지만, 얼마나 오래 가는지 보자. 나도 한 때는 그런 적이 있었지, 하지만 곧 식어버릴 걸!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우리 교회 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왜 저렇게 설치는지 몰라?’라고 질투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투라는 괴물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질투가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질투심에 발목을 붙잡혀 어려움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질투심이 아닌 열정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편견 때문에
다같이 3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이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여러분, 나사렛 사람들은 목수로 자란 예수님의 어린 시절 모습만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아예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전통에 어긋나는 호칭이었습니다.
여성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원래 유대 사회는 전통적으로 아버지와 관련지어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마노아의 아들 삼손, 기스의 아들 사울, 이새의 아들 다윗 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로 불렀다는 것은 당시에 상당히 치욕스러운 표현이었습니다.
3절을 쉽게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야, 마리아가 시집도 가기 전에 낳은 그 예수가 아니냐? 너 어릴 때를 우리가 잘 알지. 네 아버지 밑에서 목수 일을 하며 컸고, 너에게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 등 네 명의 남동생들이 있는 것도 알지. 그리고 네 여동생들도 우리가 다 잘 알지. 지금도 우리 이웃에 살고 있잖아.”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 편견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아마 이 편견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알고 싶은 마음을 가로 막았던 것 같습니다. 편견은 두 가지 때문에 생깁니다. 첫째로 편견은 무지 때문에 생깁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확실히 알면 편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편견이 생깁니다. 둘째로 편견은 익숙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가까이에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 대해서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편견이 생깁니다. 이것을 ‘익숙함의 편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익숙함이 긍정적으로 작용을 할 때가 있고,
반대로 익숙함이 부정적으로 작용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은 우리 교회의 예배와 스타일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예배 스타일이나 사역방향에 익숙하다보면 다 이해가 됩니다. 소리 높여 통성 기도하는 것도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고, 주일예배 시간에 복음성가를 부른다고 해도 비성경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분이나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분이 처음 우리 교회에 오셨을 때에는 약간이나마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적응하고 익숙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익숙함이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습니다. 한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 이제 우리 목사님 설교를 10년간이나 듣다 보니 목사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몇 마디만 들어보면 다 알 수 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목사님의 설교나 우리 교회의 예배 방식에 너무 많이 익숙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대한 기대가 떨어지고, 그러다보니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예배를 드리다보니 예배에 익숙해질 때가 있습니다. 처음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무런 기대도 없이 교회에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익숙함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그들은 과거 어릴 때 보았던 예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폭풍을 잠잠케 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다 할지라도, 그들은 현재의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과거의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방송인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과거는 결코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9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임신을 했고 아이를
낳다가 아이가 죽었고, 그 후에는 마약과 남자문제로 방황하던 여인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 신문과 방송과 각종 잡지사에서 그녀의 과거를 들춰내어 연일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프라 윈프리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단지 한 마디만 했다고 합니다. “So what?"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자신의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비록 성폭행 당하고 마약과 남자 문제로 방황한 적이 있지만, 지금 자기는 당당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고 있지 않느냐? 자기의 과거를 보지 말고 지금의 자기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족한 과거만을 보기 보다는, 지금의 변화된 모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생활에 장애가 되는 익숙함의 편견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3. 불신 때문에
다같이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고향에서 소수의 병자만 고쳐주셨을 뿐,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일으키셨던 것과 같은 엄청난 이적을 일으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11:6). 둘째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요11:40). 그러니까 믿음이 없으면 어떠한 하나님의 역사도 체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807년 미국 뉴욕의 허드슨 강에 커다란 증기선이 하나 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배가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해.” 그런데 그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그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배를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해.”
여러분, 우리의 믿음에 따라, 우리가 하는 행동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 우리가 인생에서 얻는 결과가 달라집니다. 이 세상은 항상 두 부류로 나뉘어 집니다. 불평하는 사람과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과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신앙의 사람과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는 사람이나,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나, 불신앙의 사람을 통해서는 절대로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힘이 들어도 감사하는 사람이나, 어려워도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나, 불가능하게 보여도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13장에도 나오는데, 마태복음 13장 58절을 보면,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믿음은 항상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이적 또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곳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법칙이 아닌 믿음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제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산더미 같이 큰 비행기가 뜰 수 있는 비결을 혹시 아십니까? 비행기가 300명 이상의 승객을 실었다면, 손님 중에는 몸이 가벼운 손님도 있고 몸이 무거운 손님도 있겠지만, 1인당 60Kg의 체중이라고 한다면 승객들의 무게만 무려 18톤이나 됩니다. 또 손님들이 가져온 화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승객 1인당 20Kg씩 실었다고 가정할 때, 승객들의 수화물만 6톤이나 됩니다. 그러면 도합 얼마나 나갑니까? 24톤이나 됩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자체 무게도 어마어마한 무게일 텐데, 하늘로 뜨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비행기가 뜨는 비결을 알려면 ‘중력과 양력의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은 중력의 지배를 받습니다. 예를 들어 손에 든 사과를 놓으면 땅에 떨어지는데, 이것은 중력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행기는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하늘로 날아갑니다. 그것은 비행기가 중력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고, 양력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양쪽에 날개가 있습니다. 엔진을 최고로 높여 앞으로 나아가면, 이 날개에 바람이 부딪칩니다. 그런데 날개가 밑에는 짧고 위에는 길기 때문에 바람의 빠르기가 다르게 됩니다. 날개 위에는 날개 밑보다 더 빠른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에, 날개 위쪽에 ‘부압’이 생깁니다. 이 ‘부압’은 비행기를 위로 빨아올리는 작용을 합니다. 반면에 날개 밑에는 ‘정압’이 생깁니다. 이 ‘정압’은 비행기를 밑에서 위로 미는 작용을 합니다. ‘부압과 정압’, 즉 두 가지 힘인 양력이 생겨 비행기를 뜨게 만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원리가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원리가 아닌, 믿음의 원리를 통해서 여러 가지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인간의 법칙이 아닌, 믿음의 법칙을 통해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축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질투와 편견과 불신앙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나사렛 사람들과 같지 말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력이 아닌 양력의 원리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처럼, 세상의 원리가 아닌 믿음의 원리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익숙함을 버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성찬식 : 1974년도에 ‘생존’(Alive)이라는 책이 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지게 했던 문제의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모두 실화였습니다. 1972년 10월 13일,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를 떠나 칠레의 산티아고로 향하던 비행기가 악천후로 인해 안데스 산맥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비행기 속에는 럭비 선수 15명, 응원단 25명, 그리고 승무원 5명, 등 모두 45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눈 덮인 안데스 산맥은 전문 산악인조차 두려워하는 대단한 산맥입니다. 구조대는 사고가 나자마자, 수색에 나섰지만 열흘이 지나도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구조대는 열흘 만에 수색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구조대는 열흘 동안 눈 덮인 추운 산 속에서 생존할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67일 만에 사고 현장이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16명이나 생존해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혹한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2개월 이상이나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조사한 결과, 눈 덮인 산 속이었기 때문에 먼저 죽은 시체가 부패하지 않았고, 그들은 죽은 시체를 뜯어 먹으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죽어 세상을 떠난 ‘니코리치’라는 청년은 죽기 전에 아버지에게 이러한 메모를 남겼습니다. “아버지도 전혀 믿기 어려우실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죽은 친구의 살을 먹는 일입니다. 저도 이제 얼마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죽은 뒤엔 제 살이 친구들에게 더 오래도록 생명을 제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 살을 남에게 줌으로써 생명을 제공하였고, 또 그들은 남의 살을 먹음으로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생존한 16명 가운데 호세라는 청년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학창 시절 교회에 한 주일도 빠져 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이나 동네 어른들은 모두 저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교회는 다녔지만 하나님의 집에는 거하지 않았고, 신자란 이름은 가지고 있었지만, 참된 신앙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눈 덮인 산 속에서 죽음과 싸우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집’에 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수없이 성만찬 예식에 참석했으나, 그저 기계적으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셨을 뿐, 그 의미가 내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산 속에서 죽은 친구의 살 조각을 손에 들었을 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알았으면, 생명이 무엇이며, 십자가 구원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수많은 세월 동안 성찬예식에 참석했으나, 그저 기계적으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아닙니까?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 느낌도 없이, 성찬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성찬식에 앞서, 오늘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대하기 전에 주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는 주님의 살과 피의 가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