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날짜: 
2006/12/31
설교: 

엡4:32 용서
얼마 전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용서할 수 없는 남자’입니다. “눈이 단추만 해서 쌍꺼풀 수술을 한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노출이 심한 여자만 보면 눈이 당구공처럼 커지는 남자는 용서할 수없다. 과거 있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미래가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귀 뚫은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귀가 막힌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머리카락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머리에 든 거 없는 남자는 용서 할 수 없다. 날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거짓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밥 많이 먹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반찬투정만 하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외박을 하고 온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속옷을 뒤집어 입고 온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여러분, 이 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그래 맞아!” 하고 동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글을 적은 분처럼 대개 자기의 기준을 정해놓고 이 선까지는 용서하고 이 선을 넘으면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선을 넘으면 관계를 끊던지 아니면 복수를 시도합니다. 특히 한국 분들은 삼세번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서 세 번은 용서하고 네 번째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당신의 용서의 범위는 과연 어느 정도입니까? 당신도 삼세번까지 용서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한번도 용서의 기회를 주지 않고 단번에 끝장을 내는 칼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바 하루에 일흔 번 곱하기 일곱 번, 즉 사백 구십 번까지 계속하여 용서하는 사람입니까?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믿었으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무한한 용서를 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아멘?
그러나 때때로 심한 모멸감과 자존심의 상처를 당할 때, 그리고 아주 큰 배신을 당할 때에는 크리스천으로서 용서해야 된다고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고, 의지적로도 용서를 하려고 하지만 왠지 한편으로는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용서가 쉽지 않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마 용서라는 말은 감정의 동물인 인간이 실천하기에 가장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용서라는 미덕을 빨리 갖추지 못하면 인간은 스스로 그만큼 오랫동안 불행해지고, 또한 그 만큼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합니다.
우리는 용서라는 말을 할 때 항상 거창한 죄나 잘못에 대한 것이라고만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용서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매일 서로에 대하여 실망하고, 서로에 대하여 미워하며, 서로에 대하여 분노하고, 모욕감을 느끼며, 마음에 상처를 받고 상처를 입히는 일들에 관해서는 용서라는 말을 쓰기 꺼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작고 사소한 일들을 빨리 용서하고 처리하지 않으면 그 독이 나중에는 더욱 커져서 마침내 마음의 행복과 평화를 망쳐버리고 나의 가정과 국가와 하늘나라까지도 망치기도 합니다. 고로 우리는 용서라는 마음의 결단을 매일매일 내려야만 합니다.
특히 한 해를 보내며 우리는 이렇게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올해 일어났던 좋지 못한 일에 대하여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한다. 이번 12월 달에 일어났던 좋지 못한 일에 대하여도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한다. 그리고 어제 오늘 지금 이 시간까지 일어났던 좋지 못한 일에 대하여도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한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과거의 그 사건으로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던 일에 대하여도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계속하여 용서의 사람이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시99:8)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
여러분, 당신은 어떤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까? 자비롭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까? 무자비하며 용서하지 않는 하나님입니까? 물론 구약 성경을 보면 때때로 하나님은 복수를 하시며 전쟁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인 공의성을 나타내는 것이요, 실지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롭고 인자하시며 용서와 사랑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그 용서의 하나님이 오늘의 본문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이 말씀은 우리들도 하나님의 용서하는 성품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물론 말세에는 예언하기를 사람들이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한다.”(딤후3:3)고 했습니다. 즉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는 무정한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심이 각박해진다고 합니다. 냉정한 사회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남이 무정해진다고 나도 무정해질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남이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나도 똑같이 너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마음먹을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어떤 터키군인이 알바니아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마구 학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집에는 마침 오빠와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터키 군인은 먼저 오빠를 칼로 찔렀습니다. 오빠가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여동생이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터키군인 자기마저 죽이려 하자 필사적으로 도망하여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이 여자의 직업은 간호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수개월 후에 이 여자가 일하는 병원에 어떤 환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아주 심한 부상을 당해서 입원을 했는데 그녀가 치료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사람의 얼굴을 보니까 그 사람은 바로 몇 달 전에 자기의 오빠를 죽인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 여자의 마음 가운데 "내 원수이며 내 오빠의 원수인 이 사람을 어떻게 할까?“ 하는 번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곧 생각하기를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주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이 사람을 죽여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 사람도 잘 치료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치료하지 않고 그냥 두기만 해도 죽을 형편인데 오히려 정성을 다해서 잘 치료해 주었습니다.
한 달쯤 후에 이 사람이 점점 나아서 눈을 뜨더니 주변을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자기를 간호해 주던 간호원의 얼굴을 보니까 자기가 몇 달 전에 죽이려 하던 그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한편 놀라기도 하고 또한 두려워하면서 물었습니다. "당신 오빠가 몇 달 전에 죽은 일이 없습니까?" "예 죽었습니다." "누가 죽였는지 압니까?" "예 알지요." "누굽니까?" "바로 당신입니다."
그때에 이 터키 군인은 더욱 놀라면서 반문합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면서 어떻게 원수인 나를 이렇게 친절하게 정성껏 간호해 주었습니까?" 그러자 여자가 대답합니다. "나는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당신을 죽이고자 하는 독한 마음도 품어 보았지요. 그렇지만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말씀대로 간호한 것이지요. 지금 당신이 이렇게 낫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이 말을 들은 터키 군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이 믿는 기독교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나도 이제부터 예수를 믿겠소."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용서가 한 사람의 진정한 크리스천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가 지옥으로 갈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 원수를 용서해야 되겠다고 스스로 마음을 먹고, 스스로 결단을 하면 좋지만, 제 삼자가 상대방에게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아주 큰 상처를 당한 사람에게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그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면 상대방은 더욱 화나기 쉽습니다. 잘못하다간 상대방과 오히려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즉 용서는 자신 스스로 마음을 먹고 자신 스스로 실천해야지 제 삼자가 강요해서 될 사안이 아닙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자와 용서하지 못하는 자의 삶을 살펴보면 ‘나도 용서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가정에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자전거를 타다가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서 죽었습니다. 그 부모의 상심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술에 취해 인도로 뛰어 들어와서 외아들을 치어죽인 운전자는 재판을 받고 감옥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되어 석방되어 나왔습니다. 이에 너무나 큰 분노와 고통을 느낀 죽은 아들의 아버지는 석방되어 나오는 사람을 저격했습니다.
그런데 총이 맞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총을 쏜 아버지는 살인미수 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너무나 분노해서 몸부림치다가 정신병자가 되어서 병원에 임원하게 되고 온 가정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미움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 결과 온 가정이 파탄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미국의 실화도 있습니다. 한 살인범이 재판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이 되는 사람은 아주 유명한 명사요, 고위 공직에 있으면서 나라를 위해서 공헌을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형은 동생이 죄를 짓고 사형장으로 나가게 된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체면 불구하고 견디다 못해 대통령을 찾아가서 동생을 사면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대통령은 그 형이 나라를 위한 공훈을 생각해서 사면을 허락했습니다.
형은 대통령의 사면장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동생이 있는 감옥을 찾아갔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만일 네가 이 어려운 가운데서 사면을 당해서 자유를 얻는다면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겠느냐?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자 동생은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내게 사형 언도를 한 판사를 먼저 죽이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이렇게 사형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불리하게 증언해준 증인들을 모조리 죽일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형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감옥을 나와서 그 사면장을 찢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용서를 하지 못하는 자는 결국 파멸합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자는 당장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결국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용서하는 자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용서는 스스로 결정해야할 문제입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했으니 너희도 용서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권면합니다. 이 묵은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용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내 나름대로 조건을 정해 놓는 용서가 아닌 적어도 주님이 가르쳐준 무한한 용서에 대하여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그 목숨까지 버리신 주님이 나에게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부탁하시면 ”아니 당신이 뭔데 나보고 용서하라 말라 그래?“ 하고 눈에 쌍심지를 돋우면서 냉정히 주님의 부탁을 거절하겠습니까? 2006년도를 보내는 마지막 시간에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버리신 주님과 함께 용서에 대한 의견을 나누시고 스스로 결정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