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더 큰 기쁨이 있다.

날짜: 
2018/03/25
말씀: 
요16:20-24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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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장가를 안가셨습니다. 더구나 남성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본문에 보면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요16:21)
아기를 낳아본 여성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이 구절이 사실입니까? 예수님은 장가도 안가셨고 아기를 낳아보지도 않으셨는데 어찌 이렇게 잘 아실까요? 아- 물론 예수님은 신의 권능이 있으시니까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아시겠지요. 그리고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임신과 출산을 장남으로서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아실 수 있었을 겁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하나님이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창3:16) 출산 시에 하나님이 여성에게 고통을 크게 더하며 수고스럽게 자녀를 낳는다고 예언했으니 여성들의 출산의 고통은 참 힘이 들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자녀를 낳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고 고통스러우면 자녀를 한 번 낳아보고 난 후에는 “아- 이거 힘들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앞으로는 자녀를 더 이상 낳지 말아야 되겠다.” 하고 굳게 결심을 해야 하고, 그 결심을 아주 독하게 실천을 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자녀를 낳습니다.
왜 그럴까요?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즉 출산의 고통이 크지만 그 큰 고통도 아기를 낳은 기쁨으로 금방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맞습니까? 다시 말해 출산의 고통보다 더 큰 탄생의 기쁨으로 그 고통을 쫒아내는 겁니다.
이 같은 원리를 우리의 삶에 많이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격언을 들어보셨습니까?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이것을 영어로 하면 어떻게 됩니까? “Patience is bitter but the fruit is sweet.” 맞습니까?
제 나이 또래의 분들은 이 격언이 상당히 익숙할 겁니다. 그 당시 우리 학생들 중에 많은 분들이 자신의 책상 앞에 이 구절을 크게 적어서 붙여놓고 공부를 했습니다. “아- 공부하기 싫다. 괴롭다. 힘들다. 그러나 인내해야 한다. 물론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그런데 학생이 공부하며 인내하는 것만 쓴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기 때문에 인생을 맛으로 표현하면 분명히 쓴맛입니다. 그리고 그런 쓴 맛을 인간의 감정으로 표현하면 슬픔입니다. 고통입니다. 괴롭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시90:10)라고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이렇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야만합니다. 그러면 쓰디쓴 인생을 살면서 “아- 인생 되게 쓰다!” 하면서 인상을 쓰고 힘들게 인생을 살아야만 할까요? 아닙니다. 인생을 살면서 고통도 있고 슬픔도 있지만 그를 이겨낼 수 있는 기쁨도 있고 행복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슬퍼도 그 슬픔보다 더 큰 기쁨이 있으면 인생은 살만합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슬픈 분이 있습니까? 우울하신 분이 있습니까? 기분이 매우 처진 분이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혹시 돈 때문입니까? 꼭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돈을 많이 주면 근심도 사라지고 우울한 마음도 사라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도대체 얼마를 주면 슬픈 마음이 사라지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뭐- 생각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한 번 생각이나 해봅시다. 1억, 10억, 100억, 1000억...이 나에게 들어왔다. 아- 기분 좋다! 행복하다. 할렐루야! 그런데 돈이 아주 많아서 기분이 좋았는데, 행복했는데, 그만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그 많은 돈을 써보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병으로 인해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의사는 내 병을 고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 많은 돈이 아무짝에도 필요 없게 생겼습니다. 에이- 빌어먹을 돈! 즉 돈도 이때는 나의 인생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도 죽음 앞에서는 또 다시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큰 권세를 가진 사람도, 귀한 명예를 가진 사람도 죽음이라고 하는 더 큰 슬픔 앞에서는 그만 우울해집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죽음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고요? 우리에게는 죽음보다 더 강한 생명 즉 부활과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고로 죽음의 슬픔과 고통은 더 큰 영생과 부활의 기쁨과 소망으로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0,22)
예수님이 억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슬퍼하며 통곡하고 근심했습니다. 반면 마귀와 세상 사람들은 춤을 추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다시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는 마귀가 황급하게 도망갑니다. 마귀를 따르는 공산당, 주사파도 도망갑니다. 그 동안 근심했던 애국 국민들은 더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요즘 한국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저와 같이 공산주의를 알고 공산주의를 겪은 분들은 크게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북한의 주사파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탄압하는데 있어서 세계에서 15년간 일등국가입니다. 북한의 교회가 모두 박멸이 되었습니다. 이 방면에 있어 그들은 타의추종을 불허합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기독교인들이 때로는 이슬람 사람들 및 타 종교인들에게 공격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만큼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교회를 박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공산주의자들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해하려는 자들이 바로 북한의 주사파 정권입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어찌 근심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근심도 이제는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고요? 우리에게는 더 좋은 기쁨의 소식이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승리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에9:22)
에스더서에 보면 바사왕의 국무총리인 하만이란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고 어느 한 날을 잡았습니다. 바사왕도 이것을 허락했습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유대인들이 그 날 몰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도리어 그 날이 이스라엘이 원수를 갚는 날이 되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인생도 이와 같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더 큰 기쁨의 소식으로 인하여 슬픔이 사라지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세상의 슬프고 우울한 소식을 누르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여러분, 우리에게는 세상의 모든 우울하고 답답한 소식을 누르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증거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11)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시100:2) “성도들은 영광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 지어다.”(시149:5)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서 얻는 그 큰 기쁨을 아십니까? 그 큰 기쁨의 맛을 보았습니까? 그 큰 희열을 느껴보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어떤 기쁨보다도 더 큰 기쁨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그냥 우울하고 슬프다고 합니다. 죽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얻으면 인생이 괜히 즐거워집니다. 여전히 문제가 있어도 나는 행복합니다.
왜냐고요?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이 세상이 주는 슬픔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마귀나 마귀가 가져다주는 문제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고로 똑같은 환경에서도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합니다. 슬프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기쁘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쁘고 즐겁고 행복합니까? 아니면 순간의 기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을 왔다 갔다 합니까? 아니면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슬프고 우울합니까? 살기 좋은 캐나다에 오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왜 여전히 답답하고 힘이든 겁니까?
그 이유는 더 큰 기쁨, 더 큰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슬픔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기쁨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11)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우리가 외국에서 인생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런 기쁨을 유지하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슬픔에 잠기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충만한 기쁨, 더 큰 기쁨으로 우리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줍니다. 아무쪼록 주님이 주시는 더 큰 기쁨으로 어디를 가든지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