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인가? 필연인가?

날짜: 
2022/05/07
말씀: 
전9:11-12
말씀구절: 

1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12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설교: 

국어사전에 보면 ‘우연’이란 원인과 결과가 아무런 관계가 없이 뜻밖에 일어나는 것(일, 사건)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우연의 반대말은 ‘필연’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정된 일이라는 겁니다.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그리고 앞으로 있을 당신의 죽음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그리고 당신이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 온 것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그리고 당신이 지금 그렇게 사는 것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그리고 당신이 지금 여기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거의 대부분 우연과 필연이 함께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믿는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 속담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너와 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불교에서는 “사람이 옷깃만 스쳐도 3,000겁의 인연이다.”고 말을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겁’이란 시간을 나타내는 단위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겁’이란 하늘과 땅이 한번 개벽한 후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이게 3,000번이 일어나야만 너와 내가 옷깃을 한번 스친다는 것입니다. 즉 거의 일어날 수 없는 확률인데 그게 일어나야만 옷깃을 한번 스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끼리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겁니다. 결혼하신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남편(혹은 아내)이 만난 것은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이 질문에 어떤 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님, 우리들의 만남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사람과의 만남은 분명히 악연입니다. 아- 저는 이 악연 때문에 괴롭습니다. 이게 우연이라면 저는 이 악연을 이혼으로 끊어버리고 싶습니다. 아- 너무 힘듭니다.“

반면 아주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에게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봐. 그러니 저렇게 좋은 배우자를 만났지.” 물론 기독교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의 개념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개념은, 이 땅에서 행한 일로 말미암아 죽은 후에 상과 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상이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 후손이 천대까지 복을 받고, 반대로 조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악을 저지르면 3-4대까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우연이 아니고 필연입니다. 고로 부모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아낀다면 하나님을 잘 믿어야합니다. 그래야 자녀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구약성경 룻기서 마지막 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족보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이 탄생되기까지 사람들의 만남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조상 중에 보면 이방 사람인 룻이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기까지 참으로 우연 같은 필연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룻기2:3 말씀입니다. “룻이 이삭을 줍다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 이르니라.” 룻이란 이방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했지만 얼마 후에 남편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일단 먹고는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의 밭에서 추수하다가 땅에 떨어진 곡식을 줍고 있었는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그 보아스란 사람과 재혼을 하게 됩니다. 이 보아스가 바로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즉 예수님이 탄생되기까지 우연 같은 필연의 만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혼하신 분들 중에 두 분이 다 예수님을 믿고 중매로 만나서 교회에서 결혼하신 분들의 경우는 자기들이 배우자를 만남 것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셨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우연히 오다가다 길거리에서 만났든지, 혹은 어두운 조명의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다가 우연히 눈이 맞아 순식간에 연애를 하여 결혼에 이른 분들을 보면 잘 살 때는 괜찮은데, 결혼생활이 힘이 들면 “과연 이 사람과의 만남이 옳았는가? 이건 그저 인간적인 우연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데, 이미 결혼을 했으면서도 “아- 하나님! 이 사람은 하나님이 짝지어 준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 우리가 휘말려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사이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짝지어주지 않은 이 사람과는 이혼해도 되지 않겠어요? 더구나 이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이혼허락을 받으려고 딜을 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제가 앞서서 물어본 겁니다. 당신과 당신의 남편(혹은 아내)이 만난 것은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이 질문에 여러분들이 필연이라고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필연을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결혼식을 한 그 당시에는 두 분이 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만남이 오다가다 우연히 만나고, 죄악의 나이트클럽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이 사람은 하나님이 나에게 짝지어준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결혼 후 부부간에 위기가 닥쳐도 이혼하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가질 때 부부가 다 같이 마음을 먹고, 계획을 하고, 자녀를 갖기보다는 그냥 결혼했으니까 같이 자고, 그러다보니 임신이 되고, 임신이 됐으니 아이를 낳고... 뭐- 그러다 보니까 자녀가 생긴 것이지. 꼭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필연적으로 자녀가 생겼다고 보는 시각이 적어지는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고 했는데, 자기 자녀가 진짜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자기들이 실수로 낳은 것인지 헷갈리는 겁니다. 그러니 자녀를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녀라는 믿음이 있으면 부모가 책임감을 갖고 돌보지만, 실수로, 우연히, 뜻하지 않게 생긴 자녀라고 하면 아무래도 책임감이 좀 떨어지게 됩니다.

더구나 배우자와 사이가 좋지 않으면 그 자녀도 미워지게 되고 학대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고통스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연 같은 일에서도 하나님의 필연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즉 인간이 보기에는 그것이 우연 같아도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필연이요, 만세 전에 계획된 섭리입니다. 고로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우연 속에서도 필연인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 순종도 할 수 있고, 인내도 할 수 있고, 감사도 할 수 있고, 평안도 얻을 수 있고, 신앙도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를 깨닫지 못하면 좋지 못한 일들이 생길 때에 인내도 못하고, 불평과 원망이 나오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맙니다. 당연히 신앙이 어린애 신앙에 머무르고 맙니다.

오늘의 본문입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대저 사람은 자기의 때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전9:11-12)

여러분, 이 세상에는 확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확률 99%라고 하면 이것은 거의 필연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확률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종 우연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도박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거의 90%는 돈을 잃습니다. 그런데 10%의 확률을 바라보고, 즉 우연을 기대하면서 도박을 합니다. 아주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확률 99% 필연을 바라보고 해도 때로는 우연이란 것이 발생하여 실패를 하는데, 우연을 바라보고 도박을 하는 사람들은 참 못 말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다 나은 확률의 성공과 행복의 길로 가려고 합니다. 좋은 대학을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하는 것도 그것이 확률적으로 더 큰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결혼 배우자를 고르고 또 고르는 것도 더 큰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르고 골랐는데 도리어 반대로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우연이라는 것이 발생하여 일이 꼬이는 겁니다.

사실 인생이 자기가 마음먹은 그대로 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기치 못한 우연이란 것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자기 주위에 여러 사람들의 죽음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어제 누가 죽었대. 그제는 누가 죽었대.” 그러나 잠시 후 자기도 그렇게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고 했습니다. 즉 너와 나도 언젠가는 병이 들어 죽든지, 사고를 당하여 죽든지 그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기르던 강아지가 죽는 것도 필연이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도 필연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죽는 것도 필연입니다.

고로 하나님이 정해놓은 필연을 억지로 거스르려고 하면 그게 죄이고, 그게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그런 필연을 우연이라고 착각해도 안 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필연을 우연이라고 스스로 우길 필요도 없습니다. 좀 어려운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주의 종으로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부릅니다. 신학적으로 '소명(Calling)‘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주의 종의 길로 가야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주의 종으로 가기가 싫습니다. 고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는 여러 모습의 사건들을 그저 우연이라고 돌립니다. 그게 불순종입니다. 반면 우연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의 필연의 뜻을 발견하고 따라가면 그것이 순종입니다.

저의 경우 저는 주의 종이 되는 생각을 1%도 안했고 못했습니다. 저의 부모님도, 제 주위의 친구들도 제가 목사님이 된다는 것을 1%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정하신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은 우연히 자기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연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정하신 예정, 즉 필연을 볼 줄 알고, 그 필연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길이 자기가 생각한 만큼의 성공과 행복의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도리어 짜증이 나고, 때로는 그렇게 자기를 인도한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그 필연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막상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으려니까 너무나 힘이 듭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돌려 달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필연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필연의 십자가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신 자국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물론 예수님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정하신 그 필연적인 길을 순종하며 간다고 사람들이 칭찬과 격려의 박수를 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네가 구세주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메시아로 믿겠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 필연의 길을 다 마치고 예수님이 죽자 그 후에 진정한 승리가 일어났습니다. 부활이 일어났고, 구원 사역이 완성되고, 하나님이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할렐루야!

결론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정하신 필연의 길이 있습니다. 물론 그 길이 내가 원했던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연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재수가 없다고 말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그 길은 너와 내가 가야할 하나님이 정하신 필연의 길입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그 길을 묵묵히 순종하며 가므로 그 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이 주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