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날짜: 
2024/03/09
말씀: 
시126:5-6
말씀구절: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설교: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가는 것은 참 즐거운 행위입니다. 비록 몸은 좀 피곤하고 고달파도 장차 씨앗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왜 씨를 뿌리러 나가면서 눈물을 흘릴까요?

이 씨를 뿌리는 자는 매우 가난한 농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과거에 춘궁기가 있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양식이 거의 다 떨어지고 이제 종자 씨앗만 남은 상황입니다. 너무 배가 고픕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종자 씨앗까지 먹을 수는 없습니다.

어린 자녀들은 그것도 모르고 배가 고프다고 그것으로 밥을 해달라고 웁니다. 그런 자녀들을 뿌리치고 농부는 그 씨앗 알맹이들을 땅에다 심으려고 나가야만 합니다. 눈물이 납니다. 가슴에 원한이 맺힙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눈물이 나도, 원한이 맺혀도 그 씨는 반드시 땅에다 심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126편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무척 고단하고 거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보다 잘 섬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일단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집도, 성전도 없습니다. 먹고 살 터전도 전혀 없습니다.

먼 길의 여행을 거쳐 큰 고생을 하며 돌아왔건만 당장 고생길이 펼쳐졌습니다. 앞으로 뭘 해야 될지, 당장 뭘 먹고 살아야 할지 까마득합니다. 꿈과 현실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현실은 너무나도 냉혹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70년 전에 전쟁으로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터로 올라갑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70년 전에 이곳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 불타고 무너졌습니다. 그때에 여기저기서 외치는 비명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전쟁에서 죽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거친 비목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우거진 잡초 사이에 그때의 처참한 광경이 아른거립니다. 그 광경을 보면 저는 이런 노래가 생각납니다. (비목 : 엄정행 노래 : 6분45초 중 1절 : 1분 44초까지)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여기서 ‘초연’이란 화약연기를 뜻하는 한자어입니다. 즉 ‘초연이 쓸고 간’이란 뜻은 ‘전쟁이 일어난‘ 이란 뜻입니다. 어느덧 6.25 전쟁이 발발하고 휴전이 된지 7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휴전선 가까운 곳에는 아직도 전쟁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70년의 세월이 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그때를 돌아보면 여전히 전쟁의 슬픔과 고통의 순간이 아련합니다.

또한 현재 자신의 모습을 봐도 처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완전히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돌아와 일단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 터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 드디어 제가 돌아왔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감격에 겨워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여러분, 한국의 역사를 보면 이와 비슷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포로로 끌려가거나, 외국 땅에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그로 인해 이별의 슬픔이 크게 생겼습니다. 원한이 가슴에 사무쳤습니다. 최근의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일제의 강점기 시대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고향땅을 떠나 외지에서 천대받고 고생하며 반세기를 살았습니다. 그러다 한국 정부에서 그들에게 고향 땅에 다시 돌아올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일명 ‘조총련계 모국 방문’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 방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배타고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지은 노래가 있습니다. 어떤 노래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 : 조용필 노래 : 3분 25초)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이 노래의 장르가 ‘트로트 고고’이기 때문에 좀 가벼운 느낌의 싼 유행가처럼 들리지만 실지 이 노래는 폴모리아 오케스트라가 내한 공연 때 ‘아리랑’과 함께 연주했던 매우 유명한 곡입니다. 특히 일본 기네스북에 외국 곡으로 가장 리메이크가 많이 된 곡으로 등재가 된 곡이기도 합니다. 가사가 매우 안타깝고 슬프고 감동적인 노래이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도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여기 캐나다 땅에 올 때에 격한 감정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곳에 오신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이 좋은 캐나다 땅에 오면서 왜 눈물을 흘리고 옵니까? 도리어 기쁨에 겨워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무슨 사정이 있습니까? 그 사정 좀 들어볼까요?

“아- 목사님,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주권이 나와서 저와 저의 가족 식구들이 이곳 캐나다 땅에 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홀 어머님이 간암 말기로 판명이 났습니다. 의사는 길어봤자 3개월 밖에 못산다고 합니다. 그런 홀 어머님을 한국 땅에 나두고 저와 제 가족들이 이곳 캐나다 땅에 오려고 하니까 눈물이 납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곳 캐나다 땅에서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눈물이 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기러기 가족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가족이 서로 떨어져 있어도 양쪽 다 돈이 풍족하여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면 괜찮겠지만, 어느 한 쪽이 몸이 아프고, 마음도 지치고, 돈도 떨어지고, 외로움에 사무칠 때, 그때는 눈물과 통곡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상기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학교에 가면서 울고 갈 때가 제법 있었습니다.

뭐- 여러 가지 사정과 이유가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밤에 심하게 싸웠습니다. 아침이 되어서 어린 아이가 학교에 가려고 하는데 부모가 아무 것도 챙겨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말합니다. “야- 너 학교 가서 뭐하냐? 때려치워라.” 그래도 어린 자녀는 학교는 가야 되겠기에 홀로 책가방을 챙기며 “엥- 엄마 아빠 나빠!” 하고 울면서 학교에 갑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에서 ‘육성회비’라는 것을 거두었습니다. 그거 안내고 밀리면 담임선생님이 빨리 돈 가지고 오라고 아이들을 다그칩니다. 때로는 모든 반 아이들 앞에서 창피도 주고, 손바닥을 때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너무 가난해서 돈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부모는 자기 자녀를 학교에 보내야겠기에 다음에 육성회비를 꼭 준다고 하고 일단 아이를 타일러서 학교에 보냅니다. 그러면 아이는 엥- 하고 울면서 학교에 갑니다. 그런 어린 자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부모는 마음이 아파서 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학교에 가려고 하니까 무섭습니다. 학교 일진들이 때리고 못살게 굽니다. 왕따를 시킵니다. 공부도 못해서 창피합니다. 특히 부모님 따라 여기 캐나다 땅에 왔습니다. 당연히 영어를 못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영어를 못하는 바보라고 막 놀립니다. 아-참, 학교가기 싫습니다.

근데 학교는 안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훌쩍훌쩍- 울면서 마지못해 학교에 갑니다. 여러분, 그때 그렇게 울면서라도 학교에 갔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못했다면 학력 란에 ‘무학’ 혹은 ‘초등학교 중퇴’로 써야 합니다. 그때 울면서라도 학교에 갔기에 참 다행입니다.

여기 캐나다 땅에 와서 먹고 살기 위해 일하러 가는 남편 혹은 아내도 때로는 울면서 일터에 갈 때가 있습니다. 몸이 아주 아픕니다. 마음도 지쳤습니다. 도저히 일할 힘이 없습니다. 내가 뭐하려고 이 땅에 왔는지 자꾸 삶의 회의가 생깁니다. 그래도 스스로 용기를 내며 아등바등 살아보지만 나아지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나의 심정을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가족도, 모두 몰라줍니다. 너무나 서럽습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아픈 몸을 이끌고 울면서라도 일터에 나가야 합니다. 외국 땅에서 먹고 살려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때 그렇게 울면서라도 일터에 나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더 큰 실패와 절망 속에 인생의 큰 후회가 될 뻔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여러분들 중에 교회에 올 때에 울면서 온 적이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 살면서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오랫동안 떠나고 살다보니 인생이 너무 힘들어졌습니다. 도저히 스스로 일어날 힘이 없습니다. 이때 가까스로 힘을 내서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나님, 힘들어요. 저 좀 살려주세요.” 그렇게 한참을 울다 보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는 제법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나름대로 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자꾸 누가 나를 비난합니다. 그로 인해 너무도 억울하고 힘듭니다. 순간순간 화가 납니다. 그러나 참아야 합니다. 교회는 와야 합니다. 예배는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힘듭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속으로는 울고 있습니다.

 

울고 있는 형제여 왜 찬송을 잊었는가?

어둠 속의 찬송은 이적을 부른다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송으로 열었다오. 고통의 문을 찬송 찬송으로

찬송 찬송으로

 

울고 있는 형제여 왜 기도를 잊었는가?

어둠 속의 기도는 하늘보좌 흔든다오.

내 모든 사정을 주님께 고백을 하여

위로받고 응답받아 참 평화를 영원 영원토록

영원 영원토록 (3분25초)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힘들어 울 때가 있습니다. 그냥 나 혼자만 조용히 믿으면 그렇게 서럽게 울 일도 없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려니까 힘들어서 우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반했습니다. 모두 도망갔습니다.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마지막 사명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육체로 오신 100% 인간이기에 그 큰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버림을 당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로 통곡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그리곤 마침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좇아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한발자국 두 발자국...”(흑백화면 5분 29초)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 외국 땅에서까지 와서도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야 합니다. 아- 힘듭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걸어갔기에 나중에 희망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갔더니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보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애야, 내가 너를 알고 있다. 조금만 더 참아보렴. 지금 너의 흐르는 그 눈물을 내가 배나 큰 기쁨으로 갚아주겠다. 너의 눈물이 도리어 큰 기쁨이 되리라.” 아멘!

기도 : 하나님,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갔더니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다는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그대로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사 우리의 입에는 웃음과 찬양이 가득하게 하시고, 꿈을 꾸는듯한 행복이 임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