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만났을 때

날짜: 
2004/08/02
설교: 

롬12:19∼21 원수를 만났을 때
누구나 그렇듯이 살다 보면 좋은 사람도 만나고, 싫은 사람도 만나고, 때로는 원수도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특히 원수를 만났을 때에 바른 자세를 갖지 못하면 인생이 불행해질 위험이 많이 있습니다. 고로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원수를 만났을 때에 바른 크리스천의 자세에 대하여 아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9절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여러분, 왜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까 ? 다름 아닌 자기가 생각하는 그 원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불의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우리에게는 원수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죄인이 죄인을 심판합니까 ?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100% 올바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편견과 감정에 치우칠 수가 있는 우려가 있습니다.
설사 다른 사람이 명백한 잘못을 우리에게 저질렀다할지라도 우리는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원수를 갚는다고 해서 문제가 완전히 풀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해지고 더 엉키기만 할 뿐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재난의 원인'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서 서로 사이좋게 살아가던 두 집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루는 이쪽 집 암탉 한 마리가 담장을 넘어서 저쪽 집으로 건너갔습니다. 잠시 뒤에 "꼬옥∼꼭꼭 !"하면서 암탉이 돌아오는데 영락없이 알을 낳고 난 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쪽 집 아이가 저쪽 집 아이에게 달걀을 좀 찾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저쪽 집 아이가 찾아보더니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두 아이는 서로간에 있다거니 없다거니 옥신각신하다가 주먹질까지 하면서 싸움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두 어머니들이 가세를 했습니다. 머리카락을 서로 잡아당기면서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나중에는 아버지들도 합세를 했습니다. 두 집이 아주 크게 싸웠습니다. 힘이 모자란 이쪽 집 아버지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저쪽 집에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한 동안 그 집에 불길이 한참 타오르다가 바람이 휙 돌아 불더니 이쪽 집으로 옮겨 붙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집 모두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복수는 그런 것입니다.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즉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즉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신32:35의 말씀을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여러분, 불의한 우리들은 원수를 친히 갚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다윗이 자기의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해서 도주할 때였습니다. 그때 시므이라는 사울집 족속의 사람이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 당장 그에게 쫓아 올라가서 목을 베어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시므이에 대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므이가 솔로몬 왕 때에도 회개하지 않자 하나님은 시므이를 심판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바로 그 순간에 심판하지 않으셨습니까 ?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못난 우리를 위해서 지금까지 오래 참아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비록 우리에게 어떤 악행을 행한 사람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셔야 공평하시지 않겠습니까 ?
그러므로 아무리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동안에 그 사람이 회개하면 그는 우리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시므이를 심판하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친히 원수를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20절 말씀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하루는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스펄전 목사님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한 청년이 손을 들더니 빈정대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의롭게 죽어 가는 동안에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라면, 하나님은 그 순간 스데반을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 예컨대 주변에 있는 돌들을 다 치워버린다든지, 하늘에서 천둥을 쳐서 사람들을 흩어버린다든지, 또는 천사를 보내서 스데반을 다른 곳으로 피신을 시켜 주었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 스데반이 의롭게 죽어 가는 동안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
그때 스펄전 목사님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스데반을 다른 곳으로 피신을 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서 자기를 돌로 치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스데반이 순교하던 현장에는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였습니다. 그러하던 그가 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처럼 또 한 사람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교회가 위대한 바울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스데반 덕분이다." 즉 강팍한 바울의 마음은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에 이미 흔들리면서 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인 손양원 목사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 반란 사건 때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그 원수 학생을 구명하다못해서 그 학생을 자기의 양자로 삼겠다고 분주하게 뛰어다녔습니다.
참다못한 그의 딸이 그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에게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오빠들이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 슬프디 슬픈 얼굴을 하고서 하늘에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르짖는 오빠들의 음성이 들리지도 않습니까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까 ?"
그때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딸에게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얘야, 성경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아라. 성경말씀에는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용서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즉 그 학생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셨으니까,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그를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여러분,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 학생을 자기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신학교에 보냈습니다. 자기의 대를 잇는 목사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저희보다 일년 선배가 되시는 분 중에 손양원 목사님의 손녀 사위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 분도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 어떻게 화목케 하셨습니까 ? 하나님은 그의 아들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죽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사랑을 받고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본받아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단순히 감정만이 아닙니다. 의지요, 노력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더라도 사랑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이 바른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내 의지와 노력으로 안될 때 하나님께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처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21절 말씀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여러분,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까 ? 우리의 원수가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운다고 해서 우리가 원수에게 지는 것입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의 삶입니다. 손자병법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것보다는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
여러분, 참된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악에게 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극적으로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악에게 지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 다름 아닌 자기가 친히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원수 갚는 것이 쉽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수를 갚으려면 먼저 마음이 강퍅해져야 합니다. 모질어져야 합니다. 마음이 유순해서는 복수할 수가 없습니다. 눈에는 살기가 등등해야 합니다. 말도 거칠어져야 합니다. 행동도 공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경도 날카로워져서 밤에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까 ? 이것이 바로 악에게 지는 일입니다. 이는 마귀나 좋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악은 악으로 결코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마을에 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 노파가 있었습니다. 그는 못된 방법으로 돈을 많이 긁어모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위해서는 돈을 한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 청년이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저런 쓰레기 같은 인간은 죽여야 해. 내가 그의 돈을 빼앗아서 좋은 일에 써야겠다."
그는 자기를 합리화시키면서 노파를 죽였습니다. 노파의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 돈으로 좋은 일에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평안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를 합리화시키려고 해도, 아무리 스스로 변명을 해도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노파를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일평생동안 괴로워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도스트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악은 더 큰 악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악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원수가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된 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때리고 침 뱉고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그 모습을 본받아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비록 그것이 너무나 힘이 들어도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