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을 경계하라

날짜: 
2008/08/30
설교: 

딛3:9-10 이단을 경계하라
9월 첫째 주간인 이번 주는 ‘한기총’이라고 하는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가 제정한 ‘이단 경계 주간’입니다. 이단 사이비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요,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이래 계속해서 심각하게 대두되는 문제입니다. 더욱이 이단 사이비 집단의 피해로 개인은 물론 가정이 파괴되고 교회가 큰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같은 기독교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이단 사이비에 미혹될 경우 자칫 귀한 영혼을 잃어버리는 위험도 있습니다. 고로 오늘 우리는 이단 경계 주간을 맞이하여 이단에 대하여 알아봄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행복을 지켜나가는 복된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단이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학자마다 조금씩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만 최근에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기총이 이단 사이비에 대한 용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이단이란 본질적으로 교리적인 문제로서, 성경과 역사적 정통교회가 믿는 교리를 변질시키고 바꾼 ‘다른 복음’을 말한다.” 즉 이단이란 교리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왜 이단을 말할 때에 교리적인 문제라고 하냐하면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단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 정통적인 교리를 부인하고 율법의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는 교리는 우리 정통 기독교의 교리와 분명히 다르지만 행함과 도덕성을 강조하기에 정통 기독교인들보다 때로는 도덕성이 좋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럴 때 이단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혼돈하기 쉽습니다. “아니, 저들은 저렇게 행실이 좋은데 왜 이단이라고 하느냐? 오히려 내가 아는 어떤 기독교인들은 행실이 나쁜데 그것이 이단이 아니냐?”
물론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 정통 기독교인들은 참으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단들보다 행실이 좋지 못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는 죄를 짓는 것이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단이다 아니다를 말할 때에 행실이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더 예를 들자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참으로 행실이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모든 사람은 행실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죄를 한 번도 안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우리 정통 교회들의 교리입니다. 이런 교리를 변개시키면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행실도 좋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행실의 문제가 아니요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런 구원에 대한 정통 교리를 변개시키고 아무리 행실을 착하게 해도 그는 자기의 행실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에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즉 바른 성경적인 교리 위에 서서 행실도 좋게 해야지, 성경적인 교리를 변개시키고 행실만 강조하는 것은 구원을 놓치는 이단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단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꽤 사회적인 지위가 있기도 하고, 학벌이 좋은 사람도 있기도 하고, 저명인사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이단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니, 저기에는 저렇게 학벌도 좋고 사회적 지위가 높고 훌륭한 분이 있는데 어떻게 그곳이 이단이냐? 오히려 배우지 못한 너희들이 이단이다.”
즉 이단이란 학벌의 문제가 아니요, 돈의 문제가 아니요, 사회적 지위의 문제가 아니요, 세상적인 명예의 문제도 아니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이단이냐? 성경적인 교리와 다를 때 그것을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더 들어봅시다. 어떤 이단 교주가 아주 잘 생겼습니다. 매너도 좋습니다. 옷도 말끔하게 잘 입었습니다. 이단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 저렇게 잘 생기신 분이 어떻게 이단이냐? 오히려 구질구질한 너희가 이단이다.”
즉 이단이란 외모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교리를 주장하고 잘못된 교리를 퍼트리는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이비’라는 용어도 한기총에서 이번에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사이비란 이단적 사상에 뿌리를 두고 반사회적 반윤리적 행위를 하는 유사 기독교를 말한다.” 즉 이단보다 더 나쁜 것이 사이비입니다. 이단은 우리의 영혼을 훔치려고 하지만, 사이비는 영혼뿐만 아니라 이 땅의 행복까지도 훔치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이비 집단들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중단하게까지 합니다. 주부를 가출하게도 합니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에는 이 세상 정부를 사탄이 주장하는 단체로 봅니다. 그러니 그들은 자연히 반국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다 가는 군대도 안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한국에서는 백혈병에 걸린 학생이 여호와의 증인이므로 수혈을 거부함으로 고귀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들이 들어감으로 생긴 반사회적 반도덕적 행위는 자신을 물론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다툼과 불행으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이단 사이비의 교리의 특징 중 하나는 특히 교회론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 정통 교회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자기들만 옳다고 합니다. 즉 너희가 다니는 교회는 잘못되었으니 그곳에서 나와서 자신들이 속한 곳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 잘 다니는 사람을 꾀어내는 것이 그들 이단 사이비의 특징입니다.
여기 캘거리에도 6개의 한인 이단들이 있습니다. 먼저 여호와의 증인을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성도 부인합니다. 성령님의 인격성도 부인합니다. 즉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들만의 왕국을 차려놓고 자기들에게 속한 14만 4천 명이 장차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속한 곳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고로 그들의 전도 대상에는 교회에 잘 다니는 사람들도 목표로 합니다. 이런 이단이 교회에 들어와 성도님들을 미혹하면 교회는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안식교가 있습니다. 안식교 역시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므로 오직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정통 교회의 교리를 왜곡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입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자기들에게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기존 교인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파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 캘거리에 베뢰아라는 이름의 이단도 있습니다. 이는 김기동 씨의 귀신론에 입각하여 성경을 가르치는 단체입니다. 이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행위를 합니다. 물론 이러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우리들도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귀신에 대한 정통 교리와는 아주 다릅니다. 정통 교리는 하늘의 천사장 중에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쫓겨난 것이 마귀요, 다른 말로 사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단을 좇아서 타락한 하늘의 천사 1/3을 귀신들로 봅니다.
그러나 베뢰아라고 하는 이단은 제 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들의 사후의 영을 귀신들로 봅니다. 마치 무당들과도 같습니다. 물론 귀신론이 다르다고 예수님을 믿은 그 사람의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파생되는 파괴의 효과는 교회에 직접 미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서 귀신을 쫓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 사람은 분명히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을 주던 귀신이 나갔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렇게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베뢰아 귀신론을 배운 사람입니다.
이때 진리를 모르는 주위의 교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어- 이거 뭐냐? 김기동 씨의 귀신론을 배운 사람이 귀신을 잘 쫓아내는 것을 보니 거기가 맞은 모양이다!” 일단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결국 정통 교회가 추구하는 진리를 의심하게 되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떠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잘못된 사상을 마치 옳은 것처럼 퍼트립니다. 자연히 교회는 둘로 갈라집니다. 이에 연약한 성도님들은 미혹되기가 쉽습니다.
저도 이전에 처음 전도사로 발령을 받은 곳이 오산리 순복음 국제 금식 기도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귀신들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옵니다. 자연히 저도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제 후배 전도사님 중에 이상한 모습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의 눈을 오랫동안 까뒤집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낼 때 말이 상당히 거칩니다. 베뢰아에서 귀신론을 배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신 쫓아내는 일을 많이 하다 보니 기도원에서는 성도님들 사이에 상당히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는 정기 예배가 하루 네 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도사님은 예배는 젖혀두고 귀신 쫓는 일에만 열심을 냅니다. 자연히 성도님들이 예배는 안들어가고 그 귀신 쫓는 것을 구경하고만 있습니다. 귀신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방해를 받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기도원 담당 목사님이 이를 제재합니다. “귀신을 쫓아주고 상담을 해주는 것은 반드시 예배 시간을 피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전도사님 말이 가관입니다. “흥, 자기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니까 그러네!” 제가 그러한 잘못된 태도를 보고 그 후배 전도사님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이보세요. 전도사님! 저도 전도사님만큼 기도하고, 전도사님만큼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전도사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른 신학 위에서 질서를 쫓아서 귀신을 쫓아내야지, 다른 신학을 가지고 질서를 어기면서 귀신만 쫓아내려는 행위는 덕이 안됩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의 이단 가운데에는 신비주의에 입각한 이단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유대인들처럼 기적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면 그에 대하여 호기심과 함께 그에 따라가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과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파괴하는 것은 이단들의 낡아빠진 수법입니다. 물론 기적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을 이용하여 교회를 파괴하는 이단이 나쁘기에 우리는 이단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여기 캘거리에는 신비주의적 이단이 베뢰아 말고 또 있습니다. 바로 만민교회 이재록 씨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도 그의 사상에 젖은 사람이 들어와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교회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철저히 숨깁니다. 그리고 본 교회의 문제들을 기회를 보아 슬며시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자기도 이 교회에 다니지만 이 교회는 은혜가 없다고 다른 성도님에게 말을 합니다.
자연히 그 성도님은 예배를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 그 성도님은 교회를 불신하고 목사를 불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도님을 그렇게 시험에 빠트려 놓고 자기는 살며시 그 성도님에게 다가가 남다른 사랑을 베풀어줍니다. 네가 최고라고 말합니다. 진리를 위하여 같이 노력하자고 동지의식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예언도 해줍니다. 어쩌다 예언이 맞았습니다. 결국 꼴깍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아까운 성도님을 잃었습니다. 아직까지 안돌아옵니다.
그리고 이곳 캘거리에는 지방교회 일명 형제교회라고 하는 아카디아 예배당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예배당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는 일명 ‘워치만 리’ 혹은 ‘위트니스 리’라고 하는 중국 사람이 만든 이단 종파입니다. 이들의 이단성은 신론과 기독론에서 나타납니다. 즉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그들이 믿는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님하고 다릅니다.
더구나 이들은 정통교회를 ‘바벨론 음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와 예배의 대부분의 제도를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상에 빠지면 교회에 잘 다니는 사람이 갑자기 교회를 불신하고 목사를 불신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틀렸다고 말하며 자기의 사상을 전파하려고 합니다. 특히 십일조도 부인합니다. 고로 헌금내기가 아깝게 느껴지고 부담이 되는 성도님들이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캘거리의 또 다른 이단은 ‘다락방’입니다. 이 단체는 아직 이곳에 교회를 차리고 있지 않지만 귀신론을 중심으로 전도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물론 전도운동의 효과도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정통교회를 불신합니다. 정통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을 또 다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들만의 차별적인 전략을 구사합니다. 결국 일반 기성교인들은 이러한 모습 속에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불신합니다.
결국 이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 특권층이 되고, 기존의 열심히 봉사하고 꾸준한 사람들과 마찰이 생기고 분당이 생깁니다. 그들의 은사론과 교회론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단 사상들을 우리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비추어보면 이러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바르게 잡기가 상당히 힘이 듭니다.
그들과의 변론을 통하여 그들의 잘못을 아무리 지적해 주어도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경우가 상당히 적습니다. 오히려 좀더 이단 사상으로 강하게 무장하려고 합니다. 고로 그들과 변론을 하다가는 시간은 시간대로 빼앗기고 몸과 마음도 지치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성경의 지식이 부족하거나 이단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 그들이 사용하는 성경의 편협적인 해석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고로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이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져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3:9-11)
여러분, 부모님은 자기 자녀가 좋은 친구를 사귀기를 원합니다. 나쁜 친구에 미혹이 되어서 일생을 망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단과 사이비라는 나쁜 친구를 사귀어 영혼이 도적질당하고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곳 캐나다 외국까지 와서 이단에 빠져 영혼을 잃고 불행해지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차라리 한국에서 이곳으로 오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곳에서도 이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평생 이단과 사이비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지키시고 행복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