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만남

날짜: 
2023/12/02
말씀: 
요14:1-3
말씀구절: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설교: 

우리들의 인생은 만남과 이별로 이루어졌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이별이 있으면 또 언젠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다시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인생 중에 오직 만남만 있고, 이별은 한 번도 없는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별이란 말을 찾다가 이와 비슷한 단어들이 참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 보세요. 이별, 고별, 송별, 석별, 결별, 사별, 생이별... 그런데 ‘생이별’은 무슨 뜻일까요?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살아 있는 혈육이나 부부간에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헤어짐”

혹시 여러분들 중에 생이별을 겪고 있는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가 태평양 건너 캐나다 외국 땅이다 보니 한국에 있는 가족 식구들과 오랫동안 생이별을 해서 지내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특히 ‘기러기 가족’이 이에 해당될 겁니다. 자녀들 교육 때문에 장기간 부부가 기러기 가족으로 떨어져 지내는 것을 보면 매우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 “아- 참 대단하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아무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 먹으면 서로 화상 통화가 가능하다보니 옛날 사람들이 겪은 그런 완전 생이별의 슬픔과 고통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행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별의 기간이 너무 오래되어 “안 보면 멀어진다.”는 말처럼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끼리 사랑과 관심이 완전히 식어지고, 그로 인해 좋지 못한 결과가 생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엄마와 자녀들은 외국 땅에 있고, 아빠는 한국의 단칸방에서 기러기 가족으로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몰려오는 고독과 쓸쓸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했다는 뉴스가 들려오면 ‘어이쿠!’ 너무나 아찔합니다. 사실 기러기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별 중에도 그냥 “안녕! 바이바이! 또 보자.”와 같은 가벼운 이별이 있고, 굉장히 무겁고 고통스러운 이별이 있습니다. 제가 강아지를 키우다 보니 가끔 이런 주제의 동영상을 접하게 됩니다. “당신의 반려견과 이별의 순간을 미리 준비하세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강아지의 수명은 보통 10살-15살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족처럼 지냈던 강아지가 어느 날 몸이 아파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힘들어 하다가 그만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맙니다. 어-어- 너 왜 그러니? 그렇게 강아지를 보내고 나서 한 동안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람들도 제법 있습니다, 다름 아닌 이별의 슬픔과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이별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2005년에 ‘프랑크 라 세클라’란 작가가 쓴 ‘이별의 기술’이란 책이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이별의 아픔과 고통을 겪을 때 이를 이길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그런 이별의 고통이 다가올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특히 청년의 젊었을 때에는 사귀던 애인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거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헤어지는 경우가 있을 텐데... 그거 어떻게 극복했나요? 뭐- 극복까지 할 필요 없이 깊이 안 사귀어서 괜찮습니까? 혹시 아직도 그것이 극복이 안 되고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가수 최백호 씨가 노래했듯이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고 슬픔을 달래며 노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여기 있는 성도님들의 대부분은 저처럼 나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최백호 씨의 이 노래는 모르실 테고, 뭐 나름대로 자기 시대에 맞는 이별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보다 나이가 더 많으신 분들은 어떤 이별의 노래를 부릅니까? 혹시 이런 노래 아닙니까?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 발 영시 오십분...”

여러분, 세계 어느 나라든지 이별에 관한 애틋한 노래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이별의 슬픔과 고통이 따르고, 그로 인해 시도 짓고, 거기에 곡을 붙여 노래를 하면서 그 이별의 슬픔을 달래보려고 하는 겁니다. 한국의 경우도 아주 유명한 이별의 노래가 있습니다. 혹 어떤 분은 남북이 통일이 되면 이 노래를 애국가로 쓰면 어떻겠느냐고 까지 말을 합니다.

자- 이 노래가 뭐지요? 예- 바로 ‘아리랑’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그런데 이런 노래들은 우리가 옛날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 불렀던 노래들이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어떤 노래를 부르나요?

당연히 찬송을 부르겠지요. 제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 청년회에 있을 때에는 모든 교구 모임을 마치면서 형제자매님들이 서로 손을 흔들며 헤어지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안녕 친구여, 편히 가시오. 살롬 살롬. 만날 때까지 주님 품안에 살롬 살롬.” 그리고 그렇게 안녕하고 모두 헤어져서 집에 가는데, 대중에는 금방 또 다시 만나서 회포는 풀거나 데이트를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찬송가에 보면 이별을 노래하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서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새찬송가 222장)

그리고 부모님이나 가족들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이런 이별의 찬송을 부릅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어지지 않도록. 만나 보자. 만나 보자. 저기 뵈는 저 천국 문에서, 만나 보자. 만나 보자. 그날 아침 그 문에서 만나자.”(새찬송가 480장)

즉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잠시 후에 천국에서 또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달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별과 만남’에 관한 명언들을 좀 살펴보았습니다. 눈에 띠는 것 중에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독배를 마시기 전에 한 말입니다. “떠날 때가 되었으니 이제 각자 길을 가자. 나는 죽기 위해서, 당신들은 살기 위해서, 어느 편이 좋을는지 오직 신만이 알 뿐이라.“ 그렇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통해서 서로 이별하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을 통해서 천국에 가면 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더 좋을 것이고, 반면 죽음을 통해서 지옥에 떨어지면 더 나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별도 좋은 이별이 있고, 나쁜 이별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별과 만남’의 명언 중에 이런 명언도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당신과 헤어질 때는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라.” 이 말은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한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에는 좋은 모습으로 만나지만, 나중에 헤어질 때에는 나쁘게 헤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말세는 성경에 예언했듯이 배신의 시대입니다.(딤후3:4) 사람들이 쉽게 배반을 합니다. 고로 헤어질 때에는 끝이 안 좋게 헤어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가중되고, 원한이 쌓이고, 심지어 큰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외국 땅에서 겪는 그런 상처는 우리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에 서로에게 더욱 행복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자는 겁니다.

자-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내가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고,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이 왔다.” 그러자 제자들이 크게 근심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죽으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거 완전 개밥의 도토리 신세 아니냐?“

이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즉 예수님은 죽어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에 가시는 것이고, 제자들도 잠시 후 예수님이 예비한 천국에서 다 같이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이별로 인해 너무 낙심하고 근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사람인지라 예수님이 그렇게 갑자기 훌쩍 떠나시면 너무나 당황스럽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전도의 사명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즉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오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가 고아처럼 이 세상에 버려진 상태가 아니요, 예수님과 같이 산다는 겁니다.

즉 이별이 이별이 아니고 더 좋은 만남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예수님도 밤에 주무셔야 합니다. 예수님도 private life(개인생활)이 있습니다. 고로 아무리 친숙한 베드로나 요한조차도 예수님과 하루 24시간 같이 지낼 수 없습니다. 각자 잠자리에 들기 위해 '안녕 bye bye(바이바이)' 이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영으로 내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예수님과 더 이상 '안녕 bye bye(바이바이)'를 안 해도 됩니다. 24 hours a day, 7 days a week,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천국에 가시고, 성령님으로 오시는 것이 우리들에게 더욱 유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별을 당황해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16:7)

자- 이제 결론을 맺읍시다. 한자어로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일 회, 사람 자, 반드시 정, 헤어질 리’자를 씁니다. 즉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뜻입니다. 고로 때로는 이별이 매우 슬프긴 하지만, 그 이별을 보다 떳떳이, 그리고 순순히 받아들이십시오.

때로는 오늘의 그 이별로 인해 매우 슬프고 힘이 들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중에 ‘망각’이란 은혜가 있습니다. 즉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이별의 사건을 잊기도 하고, 혹은 그 이별의 고통이 아련하고 희미한 추억으로만 기억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도 죽음을 통한 이별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고, 같이 희로애락을 나누었던 너와 내가 결국 세월 앞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다가와도 너무 근심하거나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아멘!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만남은 언젠가 이별이 되고, 또한 그 이별은 다시 만남이 됩니다. 원하옵기는 그 만남, 그 이별이 너무 힘들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혹 우리 가운데 그 이별로 인해 아직도 힘들어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행복한 만남의 장소인 교회와 천국의 장소를 예비주시니 감사합니다. 또한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과의 만남 속에 힘과 용기를 얻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주의 백성들을 계속 보살펴 주시옵소서. 더욱 주님의 일에 힘쓰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