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날짜: 
2008/11/09
설교: 

행26:13-18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부모가 어린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직 어려서 제대로 걷지 못하고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할 때입니다. 아이가 뒤뚱뒤뚱하며 한발 두발 걸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발에 힘이 없고 아직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넘어지려고 하면 부모가 얼른 잡아줍니다. 그리고 또 다시 뒤뚱뒤뚱 걷다가 또 넘어지려하면 다시 부모가 얼른 잡아줍니다.
그런데 아이가 혼자 걸어야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스스로 걸으려고 하지 않으면 부모는 자녀의 성장을 위하여 스스로 걷게 하기 위한 방법을 쓰게 됩니다. 아이의 손을 잡으며 “걸음마! 걸음마!” 하면서 걷게 하든지, 보행기를 사주든지, 아니면 먹을 것을 가지고 유혹하면서 “컴 온 베이비!” 하며 아이를 걷도록 하든지, 하여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킵니다.
그런데 아이가 소년이 되어 이제는 스스로 일어나 걸어야 할 시기인데도 스스로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고 엄마 아빠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엎어져 울기만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즉 부모가 자기를 일으켜 달라는 표시입니다. 물론 자녀가 어릴 때에는 부모가 얼른 일으켜 줍니다. 그러나 자녀가 이제 다 커서 스스로 일어나 자기 발로 서야 하는 데에도 넘어져 계속 울기만 하고 있으면 엄마 아빠는 화가 납니다. 그리고 “이 녀석!” 하면서 엉덩이를 한 번 찰싹 때려주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영의 부모님이신 하나님과 그 분의 자녀인 우리들과의 관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신앙이 아직 스스로 일어나 걷기에 힘들 정도로 어릴 때에는 계속 잡아줍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우리 스스로 일어나 걸어야 하는 데에도 자꾸 엎어져 하나님만 쳐다보고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일어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때도 있지만, 신앙이 성장하면 스스로 힘을 내서 살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 드렸듯이 성경에 보면 서로 상충되는 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 역사를 볼 때 칼빈의 예정론과 알미니우스의 의지론이 서로 상충이 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의 신학사상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정론입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이 이 온 세상의 모든 일들을 100% 이미 다 예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운명도 이미 다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 천국에 갈 사람이고 누가 지옥에 갈 사람인지 하나님이 다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예정론은 성경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우스란 사람은 이러한 칼빈의 사상에 반대하여 의지론을 이야기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는 사상입니다. 칼빈 당시에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의 의지론이 이단 사상으로 정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감옥에도 가고, 파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장로교가 예정론의 신학을 가지고 있는 반면 감리교는 의지론의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의지론도 성경적으로 이해가 될 수 있는 사상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는데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영의 죽음, 육체의 죽음, 생활의 저주가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하나님이 미리 예정하셨습니까?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예정 속에 타락을 했다면 오히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자신들이 타락한 것에 대한 책임을 돌려야 하고 자기들은 잘못이 없다고 하나님께 항변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이미 창조 전에 예정해 놓으셨다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조성한 나쁜 하나님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사건을 이렇게 예정론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지론으로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아담과 하와가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타락하므로 공의의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합니다. 즉 성경에서는 예정론의 사상이 강하지만 한편 예정론만이 나온 것이 아니고 의지론도 나옵니다. 이 두 사상은 서로 충돌이 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에 있습니다.
예정론만을 고집하다 보면 이런 잘못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가 천국 가는지 누가 지옥 가는지 이미 다 예정해 놓으셨는데 전도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천국 가기로 예정된 사람은 천국 갈 것이고, 지옥 가기로 예정된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옥 갈 텐데... 그리고 나의 장래를 위해 인간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나님이 예정하셨으면 되는 것이고 예정하지 않았으면 되지 않는 것이지!”
여러분, 예정론으로 파생되는 이런 잘못된 사상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정론으로 인하여 인간의 노력과 행함이 부인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의지론만 강조하면 자칫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고 인간중심적인 사상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 없이 내 의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비신앙적이고 무신론적인 사상이 되기도 합니다. 고로 우리의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예정을 믿으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내 자신의 바른 의지와 노력과 행함과 실천을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아주 피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성경 말씀을 읽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일날 목사님의 설교 한번 듣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리고 스스로 성경을 읽고 깨달으려고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평생 성경을 한번도 읽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도 스스로 매일매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일날 목사님이 한번 기도해주는 것만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녀가 어렸을 때는 부모가 밥을 떠서 먹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장성하면 스스로 손을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 발로 일어서야 합니다. 주일날 목사님의 기도 한 마디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기도를 해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아내야 합니다. 철야예배와 수요예배도 나와서 스스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 외국 땅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직접 받고 행복을 직접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남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언제까지 불평하겠습니까? 남이 나에게 친절하게 잘해주지 않는다고 언제까지 뽀로통하고 무뚝뚝하게 지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기 위하여 스스로 열심을 내고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격언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열심을 내는 사람을 붙들어 줍니다. 정직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정직의 영을 주십니다. 이 외국 땅에서 방탕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바른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잘 믿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아주 심하게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신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는 그가 다메섹이란 도시까지 가서 그곳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정오의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그들에게 비추었습니다.
그들은 그 밝은 빛에 모두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주여, 뉘시나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이러한 체험이 있고 난 후 사울은 예수님이 인류의 구세주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수많은 위험이 따랐습니다. 너무나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일어나고 또 일어났습니다. 매를 맞아도 다시 일어나고, 돌에 맞아도 다시 일어나고, 배가 파선해도 다시 일어나고, 옥살이를 해도 다시 일어나고, 그는 오뚝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주시는 가운데 그는 계속 일어나고 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발을 주신 것은 그 발로 일어나 걸으라는 것입니다. 그 발로 뛰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낙심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두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저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용기를 북돋아주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용기를 얻어 또 다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 발로 서라.”고 말씀 하신대로 그는 스스로 힘을 내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 외국 땅에서 누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을 향해 불평하거나 그들을 향해 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내 발로 서야 합니다. 스스로 행복을 가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자를 붙들어줍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를 줍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자에게 내일을 약속하십니다. 고로 스스로 일어서도록 하십시오.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 나만 손해입니다.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일어나 뛰어야 합니다. 일어나 전진해야 합니다. 때때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24:16) 우리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의인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칠전팔기’라는 말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결론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난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합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