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라면

날짜: 
2004/09/27
설교: 

마28:20 주님과 함께라면
영국의 어떤 큰 회사가 신문에 대대적인 광고를 내었습니다. 수도 런던에서 출발해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까지 왕복으로 가장 빨리 갔다 올 수 있는 방법을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워낙 큰상을 내걸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응모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행기가 가장 빠를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지점까지는 고속 기차를 타고 가다가 택시로 갈아타면 시간을 조금 더 단축할 수 있다고 제시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새벽에 승용차를 타고서 이런 저런 지름길로 갔다 오면 가장 빨리 다녀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방법을 제시하면서 자기의 방법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일등상을 탄 사람의 대답은 특이했습니다. 전연 색다른 대답이었습니다. 그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갔다 오면 된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길이라도 언제나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견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가는 길이 멀고 험하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피아니스트인 서혜경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미국 카네기 홀이 선정한 세계 3대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낯설고 물 설은 땅에서 밀려오는 외로움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그녀가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유학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원동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주일 한번씩 걸려 오는 그녀의 어머니의 전화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늘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얘야, 공부는 열심히 잘 하고 있느냐? 밥은 제때 챙겨 먹고 있느냐? 건강은 어떠하냐?"
그녀의 어머니는 딸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매주일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그녀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얘야, 오늘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렸느냐?"
그녀의 어머니는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늘 전화를 걸어서 딸이 교회에 다녀왔는지,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렸는지를 먼저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서혜경씨는 유학 생활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의 믿음을 굳게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유학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풍랑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리빙스턴 선교사는 식인종이 우글우글 하는 무서운 아프리카에서 16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가 16년 만에 처음으로 런던에 돌아와서 선교보고를 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는데, 한 청년이 물었습니다. "선교사님은 그 무서운 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러자 리빙스턴은 서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성경구절 두 절을 외웠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요14,18)"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그는 주님이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그 어려운 곳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은 리빙스턴 선교사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는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 캐나다 땅도 천사들만이 사는 곳은 아닙니다. 죄인들인 엉켜 사는 세상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죄인, 아랍에서 온 죄인, 남미에서 온 죄인, 그리고 아시아에서 온 죄인, 그리고 특별히 한국에서 온 죄인, 세계 각국의 죄인들이 엉켜서 사는 곳이 이 땅입니다.
그리고 이곳 캐나다 땅에도 늘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마귀가 있습니다. 고로 이곳의 상황도 만만하지만 않습니다. 그러나 잊지마십시오. 이곳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비록 저와 여러분의 영의 눈이 가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없을지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을 잠시라도 잊지마십시오.
미국에 한 중년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시력이 너무 나빠서 눈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수술이 잘못되어 34세에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매일 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를 출근시켜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는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직장이 너무 머니 앞으론 혼자 출근하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에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 섭섭해했고 사랑하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그 다음 날부터 혼자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팡이를 집고 버스를 타면서 많이 넘어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혼자 다니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익숙해 진 2년, 버스운전사가 어느 날 이 부인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부인은 참 복도 많소.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 주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보이지 않는 격려를 해주니까요."
이 말을 들은 부인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남편이 아내를 지켜보는 이 모습은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을 연상케 하지 않습니까? 남편이 늘 곁에서 아내와 동행을 했지만 아내는 눈이 멀어서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와 같이 영적인 맹인이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그분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느낄 수 없다고 하여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늘 나를 사랑의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태복음의 시작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란 "God is with us."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1장은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마지막 장인 28장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종결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가운데 부분인 18장 2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즉 마태복음은 처음에도 중간에도 마지막에서도 예수님께서 변치 않고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시련 중에 있을 때나, 갈등 가운데 있을 때나, 병중에 있을 때나, 사업이 부도가 나서 어려움 중에 있을 때나,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 당하고 좌절과 실의에 빠져있는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에는 온통 임마누엘의 사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병자들을 고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거하셨고, 또 귀신들린 자들을 자유케하시기 위해 그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그들과 함께 거하셨고, 근심하고 염려하는 자의 염려를 없애주시기 위해 그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과도 함께 거하시므로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듣기까지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지금 이 시간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가장 크고, 가장 본질적인 축복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 축복을 알려 줍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는 것, 즉 임마누엘의 축복이 바로 가장 본질적이며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가장 큰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설립한 양로원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 양로원에 방문해서 노인들에게 그 양로원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들은 빅토리아 여왕이 지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방문객이 여왕이 한번이라도 이 양로원을 방문했느냐고 묻자 노인들은 가끔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방문객이 "그러면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은 여기 오셨습니까?" 하고 묻자 노인 한 분이 "아니, 예수님이 여기에 왜 오십니까? 예수님은 오시는 분이 아니고 처음부터 여기 계셨습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와 처음부터 같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 계시며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도 용기를 갖고 살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한가지 예화를 더 들고 오늘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의 지글러라는 분이 가정 예배를 드릴 때의 일입니다. 지글러가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6척 장군 골리앗이 있었단다. 그가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전쟁을 하자고 외쳤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무서워 나무 뒤에, 숲 속에, 굴속에 숨었단다. 이스라엘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꺼져가고 있을 때 17살밖에 안되어 솜털밖에 안 나서 면도칼도 필요 없는 소년 다윗이 용감하게 싸우러 나갔단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이어졌을 때 아들이 설교를 갑자기 중단시키며 말했습니다. "아빠, 다윗이 용감한 것이 아니라 골리앗이 용감하네요." 지글러는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얘야, 다윗이 용감하지 어째서 골리앗이 용감하니?"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소년 다윗은 아무리 조그마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나가서 용감히 싸우는 것이 당연하지만 골리앗은 아무리 커도 하나님도 함께 하지 않는데 자기만 믿고 싸우는 것이 얼마나 용감합니까?"
그러자 아버지 지글러는 무릎을 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세상에는 골리앗과 같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만 의지하고 사는 세상적인 용감한 사람과, 다윗과 같이 아무리 약하고 어려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진짜 용감한 사람이 있구나!"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그 강한 믿음, 당신의 그 귀한 평안, 당신의 그 복된 행복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세상적인 환경이나, 물질이나, 자기 자신이나, 혹은 인간적인 것에서부터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하시므로 나온 것입니까? 만약 당신의 믿음, 소망, 사랑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므로 나온 것이라면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주님과 함께 하시는 행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 외국 땅에서도, 세상 끝날 까지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