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날짜: 
2019/06/02
말씀: 
롬8:22-25
말씀구절: 

...

설교: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면 제가 사명감을 가지고 반드시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밭에 물을 주는 것입니다. 저의 집사람이 마당에 쑥갓과 상추 그리고 깻잎의 씨를 심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세게 물을 주면 씨가 흩어질까 봐 아주 조심해서 미세한 물줄기로 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 싹이 나오지 않습니다. “애들아 죽었니? 살았니?”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이때는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기다림에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만물과 인간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고통을 참으며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연의 질서를 보면, 어떠한 생명도 맨 처음 발생을 할 때 다 시간이 걸립니다. 씨를 심고 나서 싹이 나오고 잎이 돋고 열매를 맺고 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보름이 지나서야 상추의 싹이 나옵니다. 그리고 20일이 지나니까 쑥갓의 싹이 조금 나옵니다. 그런데 깻잎은 아직도 나올 기색을 하지 않습니다. 아직 때가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도 모태에서 10개월이라는 세월을 지나서 세상 밖으로 나오듯이 모든 생명은 기다려야만 생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다림 없는 희망과 성숙은 절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도 하루아침에 자라서 성숙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믿음은 우리가 십년 이십년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키우는 것이고, 성숙해 지는 것이고, 무르익어진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생명체라는 것은 그 성숙의 과정에 있어서 고통과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고통을 참고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패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밭에 곡식을 심으면 추위도, 더위도 다가오고 어떤 때에는 태풍이 몰아치고, 가뭄이 오며, 때로는 이런 저런 곤충들도 올라타고, 온갖 세파에 시달린 다음에 비로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한 아가씨를 사랑하는 총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언덕 위 나무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빨리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총각은 일찍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녀는 무슨 일이 있는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총각은 애가 타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할아버지가 나타나더니 총각에게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총각은 사실대로 얘기를 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너무나도 지겹다고 하면서 원하는 대로 일이 금방금방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보통 노인이 아니라 신선이었습니다. 총각에게 소원대로 되게 해준다고 하면서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절대로 원상태로 복귀는 안 되니 후회는 말라고 했습니다. 총각은 여부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 총각은 소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아가씨와 결혼했으면 좋겠다." 그랬더니만 행복한 결혼식이 즉시로 거행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빨리 컸으면 좋겠다. 장가 간 것을 보고 싶다. 손자를 보았으면 좋겠다. 소원을 말하는 동시에 붕어빵이 구워지듯이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다가 언뜻 자기를 보니 늙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있었습니다. 조금 있더니만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네 생명 다 살았으니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도망을 가려고 하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목덜미를 붙들고서는 끌고 갑니다. 발버둥을 치면서 안 된다고 울면서 소리를 지르다가 잠을 깼습니다. 기다리다 잠깐 잠이 들다가 꿈을 꾼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총각은 세상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총각은 즐거운 마음으로 처녀를 기다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전래 이야기입니다.
75세까지 자녀가 없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 분명 자손의 축복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기까지 그는 100세가 되기까지 25년을 참고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또한 야곱은 20년을 기다렸습니다. 외삼촌의 두 딸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 양떼를 얻기 위해 6년 등, 모두 20년 동안 봉사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13년 동안 종살이와 옥살이를 하며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17세에 형들에 의해 인신매매를 당해 애급으로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애급의 국무총리가 될 때까지 13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지만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양자로 애급에서 학술을 배웠으나 40세 때 노역장에서 동족을 괴롭히는 애급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다렸습니다.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그는 지팡이 하나 짚고 애급으로 돌아와 4백 3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 역사를 보면 한마디로 기다림의 역사였습니다. 저들은 수없는 침략을 당하면서 그리고 생활의 어려운 처지에서도 오로지 예언자들의 예언한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저들이 바벨론 포로기간 동안 생각한 것은 “진정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 아니면 우리 조상들의 죄 값으로 오늘의 고통이 우리들에게 임하였는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포로기간 동안 슬픔과 좌절 속에서 언제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낙담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이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기다림 속에서 장차 나타날 메시아를 예언해 줌으로서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게 하였습니다. 신앙인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기다림으로 절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기다림으로 일평생을 살아온 자가 있습니다. 시므온이란 할아버지와 안나라고 하는 할머니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인간적인 면으로 볼 때 성공한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둘 다 늙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일평생을 오직 한가지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시므온과 안나라는 사람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한 평생을 예수님을 보기 위해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1:4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러나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그들에게 육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시고 승천하셨기에 얼마든지 실망감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계실 때도 어려움이 많았었는데 이제부터 있을 본격적인 핍박이 무서워 예루살렘을 떠나고 흩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흩어지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예루살렘에서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스피드시대입니다. 인스턴트 시대입니다. 광속의 시대입니다. 생각의 속도로 살기 때문에 느린 것은 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조급증에 시달립니다. 너무도 흔히 우리는 기다림을 지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우리 한국국민은 기다림에 미숙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다림의 의미는 성숙입니다. 기다림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성숙을 배워야합니다.
시편 37:7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권고합니다. 성경은 기다리기 위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잠잠하고’ 그랬습니다. 말을 많이 하고, 불평하고, 조잘거리는 것은 기다리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잠잠하지 못했습니다. 말을 많이 했습니다. 불평을 많이 했습니다. 조잘거림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아닙니다. 잠잠히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는 ‘참아’ 그랬습니다. 인내는 기다림의 뿌리입니다. 기다림의 자세입니다. 조급해 하고, 다투고,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모습입니다. 오늘의 본문 로마서 8:25에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참고 또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40:1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잠깐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오래 기다린 결과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다윗은 기다림을 배웠습니다. 기다렸더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기다림은 신앙입니다. 기다림은 성숙입니다. 기다림은 인격입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노아가 기다릴 수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뜻도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다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려야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그 기다리는 중에 좋은 결과, 좋은 열매를 얻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