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죽음 찬란한 부활

날짜: 
2003/04/21
설교: 

제 목 : 처절한 죽음 찬란한 부활
본 문 ; 요 11:25-26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음에는 슬픔과 고통과 눈물이 따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 역시도 너무나도 슬프고 비참한 사건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위대하시고 그렇게 깨끗하신 분이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으니, 그것도 죽기 전에 자신을 따랐던 사람들에게조차 조롱을 당하시고, 이리저리 얻어터지시고, 또한 채찍에 맞으시고, 머리에는 사나운 가시에 찔리시고, 양손과 발은 대못에 박히시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셨으니 예수님의 죽음은 그야말로 처절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조차 자신이 죽임 당하는 것이 너무나도 처참한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 핏방울이 맺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26장 37-38절에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아직까지 죽음의 고통을 맞보지 않았기에 죽음의 고통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잘 이해가 안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몰론 죽음의 복을 받아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고 "잠을 자다가 깨어보니 내가 천국에 왔더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 중에서도 아주 고통스런 죽음이셨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나 너무나도 처절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처절했든지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낮 시간인데도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야말로 슬픔과 고통으로 온통 뒤덮인 사건입니다.

예수님만큼은 절대로 죽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머리털 하나 상하시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심한 고통 중에 "내가 목마르다 !"고 외치셨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겨져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고, 마침내는 나무 위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고개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승리를 외치셨던 분이, 그렇게 생명을 외치셨던 분이 죽음 앞에서 그렇게 허무하고 무기력하게, 그것도 처절한 고통 중에 죽으셨으니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랐던 사람들에게 큰 혼란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스스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저 분이 과연 구세주인가.... ?"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 저 사람도 한낱 연약한 사람에 불과하구나 ! 저렇게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 비참하게 죽은 것을 보니 혹시 큰 죄인인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의 죽음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의 모습을 보니까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을 모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 앞에서는 제자들의 꿈과 희망도 모두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모든 것을 뺏어갑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도 뺏어가고, 평생에 애써서 벌었던 돈도 한푼도 남기지 않고 뺏어갑니다.
그리고 아무리 아름답다고 뽐냈던 육체도 모두다 썩어져 무시무시한 해골이 되고 맙니다.
"아 싫어 싫어 ! 나는 죽기 싫단 말이야 !" 하고 아무리 외쳐본들 죽음은 결코 우리를 피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죽음은 안타깝게도 저와 여러분에게도 찾아옵니다.
이 죽음의 슬픔과 고통이 너무나도 처절하기에 어떤 사람은 그 죽음을 애써서 잊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혹 어떤 사람은 "죽음은 아름답다."고 말함으로 죽음의 고통을 감소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역시 죽음입니다. 아무리 죽음이 아름답다고 외친들 죽음에는 고통과 슬픔과 눈물이 따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처절한 죽음을 피해가지 않고 스스로 자원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
그 이유는 바로 처절한 죽음 뒤에 오는 찬란한 부활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조롱과 멸시를 당해야 저와 여러분의 수치와 허물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심한 고통 속에 채찍에 맞아 몸이 찢어져야 저와 여러분이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십자가에서 "아 내가 목마르다 !" 하고 외치셔야 저와 여러분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하고 외치며 하나님께 철저하게 버림을 당하셔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가는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처절한 죽음을 감수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서른 세 살의 나이에 그냥 비참하게 죽으시고 말았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 서른 세 살이면 얼마나 아까운 나이입니까 ? 그렇다고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
못된 제자 가룟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시고, 악랄하고 잔인 무도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덜컥 세상을 끝냈다면 이런 억울한 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
만일 그러했다면 이런 하나님을 믿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신 거야 ?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어 !" 하고 분해서 하나님 믿을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
또한 바리새인들은 기고만장하고 제사장들은 우쭐대면서 의인인양 벌건 세상을 네 활개펴며 다니고, 예수님의 시신은 무덤에서 푹푹 썩어 없어지는 일이 벌어졌다면... 이런 무능력한 하나님을 도대체 누가 믿겠습니까 ?

한 여인이 시카고의 한적한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집의 열려진 창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 부인은 그림을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상한 힘에 묶인 것처럼 그 부인은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을 느껴서 돌아보니 한 소년이 정신없이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그림이 이 소년의 넋을 붙잡고서 놓지 않는 듯한 느낌을 그의 표정에서 읽었습니다.
그 부인은 대견한 생각이 들어서 소년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물었습니다. "얘야,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그림이 무엇인지 아니 ?" "그럼, 할머니는 모르고 계셨어요 ?"

그 어린 소년은 부인이 그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 그림에 대해 부인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주머니, 저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로마 군인이고요. 그리고 울고 있는 저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입니다. 저 병사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부인은 그 그림 앞을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조용히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얼마만큼을 지나갔을 때 아까 그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따라와서는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제가 가장 먼저 할 말을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어요. 그 사실을 알려 주려고 이렇게 달려왔어요."

여러분, 이와같이 예수님의 처절한 죽음 뒤에는 찬란한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년처럼 예수님의 죽음만 생각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깜빡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의 사실 속에서 슬퍼하기만 하고 지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마십시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주님은 지금 이 자리에 영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여러분, 우리의 인생 속에도 처절한 죽음과 같은 고난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마십시오. 얼마 후 우리에게는 찬란한 부활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찬란한 부활의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이전에 우리를 감쌌던 절망과 어두움은 자취도 남김없이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희망의 세계가 펼쳐지게 됩니다.
고로 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때 우리의 마음은 설레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이상 조롱과 멸시를 당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부활의 능력이 있어 우리를 그토록 조롱하고 멸시하던 세력으로부터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자유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고로 우리는 이 부활의 아침을 기쁘게 맞이하며 외칠 수가 있습니다.
"하늘나라 만세- 예수님 만세- 캘거리 순복음 중앙 교회 만세 ! 너 자유 얻었네 나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여러분, 이제는 처절한 고통을 안겨주었던 그 모든 옛날의 사건들로부터 자유를 얻으십시오. 그리고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슬픔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파괴의 세력은 이미 멀리 멀리 사라졌습니다. 고통과 번민은 더 이상 우리를 감쌀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찬란한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우리에게 이렇게 확증합니다.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 기쁘고 즐거운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고로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그토록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할렐루야 !

예수님의 처절한 죽음 속에서 크게 낙심하고 어깨가 처졌던 제자들이 찬란한 부활을 확신하며 새롭게 용기를 얻고 희망을 얻고 나아간 것처럼, 그리고 복음으로 마침내 로마를 정복한 것처럼 우리들도 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여 낙심과 절망을 떨쳐내야 합니다.
용기를 얻고 희망차게 전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외국 땅에서 기필코 하늘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부활의 능력과 함께 새로운 마음으로 다함께 하늘나라 건설에 앞장서십시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힘차게 기도하고 서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십시다. 그리 길지 않은 우리의 인생을 찬란한 부활의 희망으로 가득 채우십시다.
그리고 부활의 그 날에 우리는 또다시 부둥켜안고 감격적인 부활을 노래하십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찬란한 부활을 주신 예수님께 영광의 찬송을 돌리십시다.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