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라. 그리고 포기하지 말라.

날짜: 
2020/08/02
말씀: 
삼하12:16-25
말씀구절: 

0 <다윗의 아이가 죽다>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9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4 <솔로몬이 태어나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설교: 

‘포기하지 말라’는 책과 설교는 많지만 ‘포기하라’는 책과 설교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포기하는 사람은 뭔가 최선을 다한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나약하고 실패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포기하는 것이 더욱 큰 용기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위대한 결단이 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도 의지력이 좀 강하다 보니 ‘포기하지 말라.’라는 교훈은 도리어 실천하기 쉬운데 ‘포기하라.’는 권면은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박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들은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사실 도박을 해서 돈을 딴다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옆에서 보면 누가 봐도 저건 아닙니다. 또 잃었네! 앞으로 또 잃을 텐데! 그런데도 당사자는 포기를 못합니다. 그 동안 잃었던 돈과 시간이 아깝습니다. 더 나아가 야릇한 중독의 쾌락을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비단 도박 중독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중독에는 야릇한 쾌감이 있습니다.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 담배 중독, 쇼핑 중독, 운동 중독, 일중독, 인터넷 중독, 스마트 폰 중독, 섹스 중독... 등 이런 중독에 걸린 사람들이 그 중독을 포기하려고 하면 금단 현상이 나타납니다. 불안해집니다. 초조해집니다. 그래서 중독을 포기하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COVID-19으로 인하여 우리들의 삶이 크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전에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위하여 했던 그 어떤 일들도 COVID-19으로 인해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특히 돈이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 중에는 여행이 인생의 낙이요 행복인 경우가 많은데, 요즘은 비행기도 크루즈도 못타고 어디 호텔에 가서 잠을 자기도 겁이 납니다.

어쩔 수 없이 인생의 사는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그것도 거의 강제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강제적 포기입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스스로 포기해야 하는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COVID-19으로 인해 이제는 off-line에서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는 사업은 갑자기 사양 산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업을 가지고 있으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가능한 빨리 그 사업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투자한 것이 아깝습니다. 이 사업을 포기하면 그 동안 열정을 가지고 사업을 일구었던 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사업 실패자가 됩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 어떡할까? 계속 번민합니다. 스트레스가 자꾸 쌓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능력의 한계점에 도달합니다. 결국 육체와 정신이 감당치 못하고 신경이 고장이 납니다. 즉 우울증이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우울증이 오기 전에 빨리 포기하는 겁니다.

“에이, 할 수 없다. 크게 손해 봤다. 이번에 돈 많이 잃었다. 아이가!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자.” 자- 이런 대범한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처녀 총각들이 배우자를 고를 때에도 이런 대범함이 종종 필요합니다. 정성을 다해 몇 번 시도해서 안 되면 “내가 그렇게 싫은가?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하고 빨리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됩니다.

그런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하고 계속 찍어대고 따라다니는 겁니다. 이걸 뭐라 그래요? ‘스토커’라고 합니다. 즉 포기할 때 포기하지 못하면 범죄자가 되는 겁니다. 더구나 나 싫다고 떠난 옛날 애인을 못 잊어서 만날 질질 짜고 처량하게 세월을 낭비하면 안 됩니다.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는 것이 멋있는 신사요 숙녀요 성도입니다.

남녀가 결혼을 할 때 결혼 선서를 하는데 그 선서의 내용이 뭡니까? 이전에 사귀었던 이 남자 저 남자, 이 여자 저 여자 모두 다 포기하고 이제는 여기 있는 한 남자, 한 여자만 데리고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 아닙니까? 즉 결혼 선서도 일종의 포기 선언입니다. 반환은 안 됩니다. No Refund, No change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포기하지 말라’라는 덕목을 배우기 이전에 ‘포기하라’는 덕목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자기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을 포기하고 버릴 때 비로소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요건이 시작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늘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위해 자기의 생명까지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포기가 있었기에 진정한 승리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하늘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이 땅의 찰나적이고 순간적인 쾌락과 욕심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만 갖고,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은 빨리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도 기쁘게 하고, 나도 평안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육체의 가시 즉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고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시면서 치료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교만해질까봐 그랬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더 이상 이를 위해 네 번, 다섯 번... 계속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네 기도, 네 요청 안 들어 준다는데 이걸 가지고 계속 떼를 쓰면 서로 힘들어집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10억(100만 불)을 안 준다는데 자꾸 달라고 떼를 쓰면 서로가 입장 난처해집니다. 고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빨리 포기하십시오.

그런데 반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쉽게 포기하면 안 됩니다. 누구 좋으라고 포기합니까? 그때는 포기하지 말고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인내하여 기필코 받아내야 합니다. 즉 포기할 때는 포기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다윗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이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남의 아내와 동침을 하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이런 세상에 못된 녀석!“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죄를 책망했습니다. 다윗은 즉시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죗값을 물으셨습니다.

“네가 남의 아내와 동침을 했으니 너의 아내들도 다른 사람과 백주에 동침을 하리라. 그리고 네가 남의 남편을 죽였으니 너의 집안에도 사람이 죽으리라. 당장 너의 낳은 아이가 죽으리라.” 아닌 게 아니라 얼마 있다가 다윗의 어린 아이가 병이 들었습니다. 다윗은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밤새도록 아이를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만에 아이가 죽었습니다. 신하들은 왕이 너무 상심할까봐 차마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다윗 왕에게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다윗이 눈치를 채고 묻습니다. “아이가 죽었느냐? ”전하, 그렇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은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경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먹고 왕의 사무를 보았습니다. 신하들이 의아해서 묻습니다. “왕이여,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음식을 잠수시니 어찜입니까?” 다윗이 대답합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12:22-23)

즉 다윗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할 때는 금식까지 하면서 계속 기도했지만 포기해야 할 때는 완전히, 즉시 포기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다윗의 이런 포기하지 않는 모습과, 그 후에 포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인생을 살피게 됩니다. 때가 되면 우리들의 부모님도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혹은 다윗처럼 내 자녀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있습니다.

그때의 슬픔은 너무도 크지만 우리들도 다윗처럼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포기한다는 것이 영원히 잃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포기는 결코 체념이 아닙니다. 나는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포기한 것을 다시 찾아낼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고로 포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께 향한 믿음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했습니다.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나이 75세 된 노인이 되어 이제 자기 무덤 자리를 알아볼 판에 정든 고향산천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가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현재의 안락함과 평안함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단 고향을 떠납니다. 즉 신앙의 출발은 일단 하나님을 믿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먼저 포기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그 다음의 인도와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 세상 전문 용어로 하면 ‘전략적 포기’라고 합니다. 즉 미래의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현재의 것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한편 어린 자식이 내 죄 때문에 죽었으니 아비인 다윗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자기보다 더 마음이 아픈 아내를 생각했습니다. 자기도 위로를 받아야 되지만 자기보다 더 마음이 아픈 아내를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하나님은 그 죽은 아이 대신 솔로몬이라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보호하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때로는 우리가 이렇게 반강제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포기를 강요당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빼앗아 가느냐고 원망조로 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우리의 재산과 생명까지 빼앗아 가는 것을 단순히 빼앗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빼앗아 가면 반드시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고로 스스로 포기를 하든지 혹은 강제적으로 포기를 당할 때에도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사실 저와 여러분은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돌아갈 때도 모든 것을, 생명까지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에게 포기는 결코 잃는 것이 아니요, 실패도 아닙니다. 도리어 더 좋은 것을 찾는 기회입니다. 결론입니다. 포기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것도 배우십시오. 어떤 순간에도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주님과 함께 복된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