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날짜: 
2004/11/15
설교: 

시73:27-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공부는 안하고 맨날 놀기만 하고 엉뚱한 일을 하고 있으면 부모님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애야, 놀지만 말고 공부 좀 해라." "에이, 아빠 엄마는 맨날 공부 공부! 아휴, 스트레스 받아!" "애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 젊어서 공부 안하면 나중에 후회한단다."
여러분,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도 보면 조기 유학생들이 제법 있습니다. 부모들의 입장에서 자녀들을 좀더 훌륭한 인물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자녀들을 좀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젊은 부부가 홀아비와 과부처럼 떨어져 살기도 하고, 낮선 외국 땅에서 자녀를 위하여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유학 온 학생이 공부하러 학교는 안가고 맨날 놀러만 다니고 엉뚱한 짓만 하고 다니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교회를 가까이 하고, 예배를 잘 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가까이 해야지,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불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 학생이 학교에 열심히 다니며 충실히 공부하는 것이 보기 좋은 것처럼 성도들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보기가 좋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보기가 좋습니다. 물론 학교에 다니면 때로는 피곤하기도 합니다. 숙제도 해야 하고, 시간의 제약도 받습니다. 그렇다고 학교에 안가는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학교를 다니고 열심히 배워야 자신의 장래에 축복이 되고 행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 사실을 자녀는 알지 못해도 부모는 알기 때문에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깨워주고, 챙겨주는 수고를 하지 않습니까?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가까
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고로 본문에 아삽이라는 시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여러분, 시편의 주제는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고로 시편16:2에도 다윗은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반면 악인을 가까이 하고, 죄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면 저주가 임한다는 것이 시편의 주요 사상입니다. 고로 오늘의 본문에도 시인 아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멀리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자 음란과 죄악에 물들었고, 결국 죄의 심판과 형벌 속에 도시 전체가 망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가 역시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져 죄에 물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도 큰 시련을 겪은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삼손을 보십시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서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고 기생 들릴라의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서 살지 못하고 온종일 기생의 집에서 살았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삼손은 두 눈이 뽑혀지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수치와 모욕을 겪게 되었습니다.
물론 삼손은 순탄치 않은 초기 결혼 생활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탄이 났으니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역경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죄악의 포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자신의 거룩한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말았습니다. 고로 아무리 힘이 센 삼손이지만 하나님을 떠난 삼손은 더 이상 힘센 장사가 되지 못하고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삼손처럼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화를 자초하고 맙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그 자체가 저주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멸망입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허덕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결국 허덕이며 사는 인생입니다.
자고로 하나님을 떠난 개인, 가정, 사회, 국가의 앞날은 캄캄하기만 합니다. 고로 스바냐 3:1-2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찐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한번은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미국 대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은 부자가 되기 위해 금을 좇아 남미에 왔지만 부자는 고사하고 힘겨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조상은 하나님을 좇아 아메리카에 왔는데 부자 나라가 됐습니다" 즉 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좇아가는 개인, 가정, 국가가 결국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란 사람을 가까이 하자 그도 하나님처럼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삭이 부모의 믿음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가까이 하자 그도 백 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자 그도 역시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인간적인 결함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의 결점까지도 담당하시며 그들에게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는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는 인간적인 면에서는 야곱보다 나아 보였지만 그는 동생에게 축복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자고로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증거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더라"(창39:2)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5:10),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저가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더라."(대하17:3-5)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점점 가까이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점점 멀리 하는 사람입니까?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오셨습니까? 아니면 멀리 하려고 오셨습니까? 지금 나는 하나님을 까까이 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멀리 하고 싶습니까?"
성도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 똑같은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죄다 차이가 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서 신앙 생활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계신 것은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굉장히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교회에 가는 것도 단지 성탄절을 비롯해 일년에 몇 번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한 달에 한번 정도 봅니다. 그리고 나머지 날들은 열심히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갑니다. 한달 내내 죄짓고 죄 속에서 살다가 좀 미안하고 또 마음에 꺼림칙한 것이 있으면 교회에 나옵니다. 또 어떤 분은 한 달에 4번만 하나님을 만나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 엄포를 놓습니다. "하나님, 더 이상은 안돼요! 하나님 저 바쁜 것 아시지요? 제발 더 이상은 요구하지 마세요! 더 요구하시면 저 교회 안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하나님을 자주 만납니다. 주일 예배는 물론, 철야 예배도 나오고, 수요 예배도 나오며, 그것도 모자라 새벽 예배도 나와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그 예배드리는 수로 신앙을 평가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년에 서너 번 예배드리는 사람과 일주일에도 여러 번 예배드리는 사람과 어느 쪽이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겠습니까?
여러분, 구약성경에 보면 성막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 성막 구조를 보면 이방인이 머물 수 있는 뜰이 있고, 더 나아가 성소가 있고, 성소 더 깊숙한 곳,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진국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 축복을 받고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음녀와 같이 주를 떠나 멸망을 당하거나 저주에 빠지고 싶지 않습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이 외국 땅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마음도 육체도 생활도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야고보서 4장 8절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가까이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가까이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령으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인 마음에 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를 가까이 하라. 그러하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윽박지르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에게 이렇게 사정을 하고 있습니다. "애야, 이 땅에서 짧은 인생을 살면서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니? 나는 복의 근원이란다. 내게로 가까이 오너라. 내가 너의 인생을 축복해주마. 나를 떠나서는 네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단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간절한 손길을 너무도 하찮은 이유를 들어 거절합니다. "주님,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를 어쩌지요. 제가 지금 막 컴퓨터 게임을 시작했는데... 이번 게임만 끝나고 만나면 어떻겠습니까? 주님, 제가 돈을 좀 더 많이 벌고 나서 그때 가까이 갈게요. 주님, 너무 가까이 지내면 단점만 보인다고 했는데 그냥 이대로 거리를 유지하고 지내면 어떨는지요?"
물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어려울지 모릅니다. 주일날 교회에 오기 위해서는 피곤한 육체를 극복해야 되고, 좀더 자고 싶은 욕망을 떨쳐버려야 되고, "혹시 내가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물리쳐야 되며, 내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되는 고통도 감수해야 됩니다. 더구나 사단의 끈질긴 유혹과 방해를 단호히 물리쳐야 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절대로 나에게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결국 축복이요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캐나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좀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므로 이곳 외국 땅에서 보다 축복 받고 행복하게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