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날짜: 
2014/11/15
말씀: 
창1:3-7
말씀구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설교: 

처녀들 총각들이 자신의 배우자를 고를 때 나쁜 것, 나쁜 사람을 고르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자기들의 기준을 정해놓고 좋은 사람을 자기의 배우자로 고르려고 합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 the best of the bests를 고르면 참 좋지요. 그러나 형편상 가장 좋은 것을 고르지 못할 경우에는 그 다음 좋은 것, 즉 차선 혹은 차차선을 순서대로 고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 눈이 안경이다.” “눈에 콩깍지가 끼었다.” 즉 자기 나름대로 좋은 것을 골랐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미 딴딴따따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신혼여행까지 갔다 와서 refund를 해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결혼 영수증을 자세히 보십시오. 거기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을 겁니다. “No refund, no return, no change."

이때 이렇게 물어보는 분이 있습니다. “목사님! 결혼 영수증이란 것이 있어요? 저는 그런 영수증 못 받았는데요?” 제가 표현을 ‘결혼 영수증’이라고 해서 그렇지, 그게 다른 말로 하면 ‘결혼증명서’ 혹은 ‘결혼 서약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 모든 나라의 Registry(등록소)에서는 그 두 사람이 부부로 등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합니다. 그냥 못마땅해도 버리지 말고 그냥 쓰세요. 아- 안 된다고 했잖아요. 여기 보세요. “No refund, no return, no change."(같이 한번 따라 해봅시다.) 여러분! 결혼 한 후에 ”아이고, 내 팔자야!“ 하고 후회하지 말고 결혼 전에 좋은 분을 고르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 하면서 한숨짓는 사람은 또 뭡니까?”

그리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즉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 오래 살아 보신 분들은 누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 괜찮지요? 좋지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글쎄요. 겪어봐야 알지요. 적어도 십 년은 겪어봐야 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겪어보고 또 겪어보면 대략 평균 점수가 나옵니다. 즉 한 번 두 번 반짝 좋았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렇게 좋지 못해도 겪어보니 꾸준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동치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끝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 괜찮네!”

오늘 본문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자체 평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계속 반복하여 이런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표현이 1장에 총 몇 번이나 나올까요? 한 번 세어볼까요? 본문 4절에 보니 하나님이 빛을 지으시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한 번)

10절에 보니 하나님이 땅과 바다를 지으시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두 번) 12절에 보니 하나님이 땅에 풀과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지으시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세 번) 18절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네 번) 21절에 보니 하나님이 새와 물고기를 만드시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다섯 번)

25절에 보니 하나님이 땅의 짐승들을 만드시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여섯 번) 31절에 또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일곱 번) 그런데 좀 특이한 것은 하나님이 궁창 즉 하늘을 둘째 날에 만드시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그곳 하늘은 마귀가 공중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에,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기에 그런 표현을 하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깨달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난 후에도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을 곧 바로 쓰지 않았습니다. 단지 창세기 1장 31절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아셨나? 그래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나?“ 어쨌든 오늘의 이 하나님의 평가를 나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즉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실까요? ① 심히 좋았더라. ② 좋았더라. ③ 그저 그렇더라. ④ 나빴더라. ⑤ 심히 나빴더라.

성경에 보면 ‘열왕기상하’라는 성경책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우리가 한국 역사를 배울 때에도 왕들의 이름을 순서적으로 나열하며 그들의 행적이 대하여 배웁니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여기 캐나다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를 겁니다. 모르는 분은 부모님한테 물어보면 압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초대 왕은 사울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왕은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세 번째 왕은 솔로몬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지만 나중에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결론은 나빴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리어 각각 왕조가 따로 이어집니다.

남왕국 유다는 총 20명의 왕이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총 19명의 왕입니다. 이들 중 남왕국 20명의 왕들 중 8명은 하나님 보시에 좋은 왕이고, 12명은 하나님 보시기에 나쁜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북왕국 19명의 왕들은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나쁜 왕들이었습니다. 이들 북왕국 왕들의 평가서를 성경연구 서적을 보면 재미있게 표현이 되어있습니다. “나빴다. 나빴다. 나빴다. 아주 나빴다. 가장 나빴다. 매우 나빴다. 몹시 나빴다. 극도로 나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예수님 믿게 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났는데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왕일까요?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늘 그 명단을 확인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명단을 보면서 평가합니다. “좋았다. 좋았다. 아주 좋았다. 가장 좋았다. 몹시 좋았다. 매우 좋았다. 진짜로 좋았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눈이 안경이고 진짜로 좋으려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야 진짜 좋은 겁니다. 옆에 분들에게 인사해봅시다. “당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분입니다.” 물론 겉으로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으로는 “나빴더라. 별로더라.“라고 나름대로 평가는 하겠지요.

우리들은 결국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하나님께 최종 평가를 받습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그때 하나님께로부터 “참 좋았더라.”라는 평가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렇게 좋았더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이 좋았더라고 칭찬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이 달란트 비유를 하면서 이렇게 칭찬을 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반면 예수님은 책망을 할 때 이렇게 말씀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즉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은 일단 착한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오른편 강도도 구원했습니다. 창녀도 구원했습니다. 세리들도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그들이 악해서, 못 되서, 더러워서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들이 죄를 버리고, 죄를 돌이키기 때문에, 즉 이전에는 악하고 못됐지만 예수님을 믿고 착하게 살려고, 바르게 살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한 겁니다. 반면 자칭 의인이라고 하면서, 가장 깨끗하다고 하면서 회개도 안 하고 못된 사람은 심히 꾸짖었습니다. 어떻게 꾸짖었을까요? “독사의 자식들아!”

여러분! 사람이 착하게 산다는 것,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칭찬받는 것입니다. 고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못 생겨도 좋다. 착하게만 살아다오.” 그러나 사람들은, 특히 한국 사람들은 요즘 거꾸로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착하지 않아도 좋다. 예쁘기만 해다오.” 아닙니다. 같이 따라합시다. “못 생겨도 좋다. 착하게만 살아다오.”(아니 왜 총각들은 따라하지 않는 겁니까? 악하고 못된 여자 만나서 인생의 쓰디쓴 맛을 한번 봐야 정신을 차리겠나?)

제가 담임목사로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 처녀 총각들을 축복합니다. 부디 착한 남자, 착한 여자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나부터 먼저 착한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런데 사람에게는 착한데 하나님에게는 착하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아내나 남편에게는 순종하고 충성하는데 하나님에게는 불순종하고 불충성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아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되는데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안 되는 경우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도 착해야 되지만 하나님에게도 더욱 착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보다 순종하는 것을 좋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불충하는 것보다 끝까지 충성하는 것을 더 좋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것보다 깨끗하고 거룩한 것을 더 좋다고 합니다. 바르게 살려고 애쓰고 힘쓰는 것을 좋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전에, 과거에, 악하게, 더럽게, 못되게, 추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합니다. 이제는 보다 바르게살기를 원합니다. 보다 정직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보다 거룩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물론 이것이 내 힘과 내 노력으로 잘 안 되는 것을 압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했지만 작심삼일도 못되어 주를 배반하는 베드로의 그 연약함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 맞지 않거나, 내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뒤로 돌아 갓!” 하고 쉽게 배반자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안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의 정조를 지켜야 합니다. 끝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한국에는 12월에 전쟁이 난다고 예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계시 못 받았습니다. 단지 전쟁이 나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생각해봅니다. 물론 저를 비롯해 여기 있는 분들 대부분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고로 전쟁에 대한 상상력에 한계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누굽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물사관에 의해 인간도 하나의 물질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인간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 우리는 보았지 않습니까? 김정은이가 자기 삼촌 장성택이를 기관포로 쏘아서 갈기갈기 찢어 죽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화염 방사기로 그 시체를 태워버렸습니다.

아- 끔찍합니다. 그런 잔인한 사람이 전쟁을 일으키면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안 죽이겠습니까? 더구나 예수님 믿는 우리들을 어찌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고로 우리는 대한민국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땅굴의 경우도 빨리 찾아서 무력화함으로 저들이 전쟁의도를 사전에 꺾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봅니다. 지금 북한의 지하교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떤 분은 “그곳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 평양에 봉수교회가 있지 않는가?“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다 선전용이고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진짜로 예수님 믿으면 죽습니다. 감옥 갑니다. 인권 유린 당합니다. 그곳에서는 오직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를 하나님처럼 믿어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는 지하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답고 좋을까요? 과연 그런 지경에 내가 있다면 나도 그들처럼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 세대는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세상은 늘 평화롭지만 않았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어디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갑자기 환경이 극도로 나빠지는 곳도 있습니다.

그렇게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나는 과연 내 믿음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지킬 수 있을까요? 첫째 날에도 둘째 날에도 셋째 날에도, 지금도 내일도 모레도 하나님이 나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 우리의 양심, 우리의 행위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좋았더라고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누가 보나 안 보나, 한국에 있으나 여기 캐나다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내 인생의 최종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날, 최후 성적표가 나오는 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성적표를 모두가 받기를 바랍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주님의 인정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선한 싸움에 힘을 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