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날짜: 
2008/12/19
설교: 

욥7:11-21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존 로버트'라는 24세의 젊은 미국 청년이 1926년에 최초로 미국 대륙을 비행기로 횡단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행 도중 북극의 한 오지에 비행기가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에스키모인의 집에서 한 젊은 여인의 간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굉장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을 잃었습니다. 머리의 두개골도 금이 갔습니다. 얼굴의 한쪽 광대뼈도 함몰이 되었고, 한쪽 눈도 동공이 확장이 되었습니다. 얼굴도 사고로 말미암아 울퉁불퉁해지고 기괴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17년간 극도로 추운 북극의 오지에서 에스키모 인들과 지내면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투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에스키모인의 딸과 자의반 타의반 결혼도 했습니다. 아들과 딸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17년이 지난 후 구조대에 의해 구출이 되어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세계는 2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고향의 소식을 들었지만 홀로 계신 어머니마저도 이미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17년 만에 찾아간 고향땅이었지만 자기가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변화된 환경 속에서 혼자 고독감과 쓸쓸함을 느끼고 고향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오라는 사람도 없었고 마땅히 갈 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추운 북극의 오지를 그리워합니다. 그리곤 다시 북극의 여행을 계획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스트레일리아 여류 작가인 ‘줄리 해리스’의 ‘돌아오지 않는 여행’이란 감동실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존 로버트’는 “왜 하필 난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자기의 여동생도 무용수가 되려고 했지만 소아마비에 걸려서 외쳤습니다. “왜 하필 나야?” 그런데 이제 자기도 북극의 오지에서 절망감에 사로잡혀 탄식합니다. “왜 하필 난가?” 우리도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올 때에는 이런 탄식의 말을 내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주인공 욥이 극한 고통가운데 이런 탄식을 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셨나이까?” 당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욥처럼 극한 고난을 당한 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동방의 가장 큰 부자가 모든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7남 3녀가 집이 무너져 모두 죽었습니다. 자신은 온몸에 악창이 나서 안 아픈 곳이 없습니다. 피부에는 구더기가 의복처럼 입혀서 꿈틀대고 기어 다닙니다.
도대체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동방의 의인인 욥에게 왜 이런 고난이 다가오는 것입니까? 욥은 고통가운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어찌하여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아침마다 나를 권징하시고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도대체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시나이까?”
혹시 이지선 양의 간증을 들으신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동차 사고로 인한 화재로 꽃다운 대학 시절에 아름다운 얼굴이 온통 화상을 입었습니다. 사고 전의 아름다운 모습과 사고 후의 흉측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 그녀도 이런 탄식이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성경의 거의 모든 위인들의 삶을 보면 그들도 자신의 운명의 기구함 속에서 이런 탄식이 나왔을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아담을 보십시오. 그는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지구의 모든 동물들이 자신에게 복종합니다. 아담은 지구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외로움이었습니다. 모든 동물들은 다 짝이 있었지만 자신만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나만 짝이 없습니까? 왜 나만 이렇게 외롭습니까?“
하나님은 “아-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구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짝을 주셨습니다. 아담의 갈비뼈로 지음을 받은 하와였습니다. 아담은 너무나 좋아서 외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무슨 뜻입니까? “너와 나는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아담도 짝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자기를 따뜻이 맞이해줄 아내가 있었습니다. 같이 식사도 하며 같이 잠자리도 하며 부부의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했던 시간이 일순간 깨어졌습니다. 그만 아내인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권하니까 아담도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졌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는 땅에서 땀을 흘려야만 겨우 살 수가 있었습니다. 부부 금실도 깨어졌습니다. 좋지 못한 일이 생기면 남편은 아내를 탓하고 아내는 남편을 탓합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아담이었는데, 그렇게 행복했던 아담이었는데 순식간에 망조가 들었습니다. 순식간에 불행의 그늘이 덮쳤습니다. 그는 고통을 느끼며 외칩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오늘 묻고 싶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도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하고 탄식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때 명심하십시오. 그러한 탄식은 당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슬픔은 당신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모든 위인들도,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도 다 함께 느끼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2-23)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는 사망이 왔습니다. 질병이 생겼습니다. 가시와 엉겅퀴의 저주가 다가왔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서로의 생존을 위해 다투고 싸워야 합니다. 서로 죽이고 죽습니다. 미움과 슬픔이 있습니다. 고통과 번민이 따릅니다. 나만 당하는 슬픔이 아니요, 나만 겪는 고통이 아닙니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동물들도,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도 다 함께 겪는 고통입니다. 고로 모든 피조물은 고통 속에 제각기 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이 사람은 이 사람대로의 고통과 문제가 있고,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의 고통과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요즘 우리 교회의 성도님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제 마음속에 “그래도 이 분들은 행복한 분들이겠지?” 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다 보니 그분들도 한가지씩은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하는 문제가 있을 것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이혼을 해서 고독하게 혼자 사시는 분들이나 기러기 가족이 되어 한국에 혼자 남아 있는 쓸쓸한 분들의 심정 속에는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하는 마음이 들겠다는 애처로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들 떨어진 가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누구나 이 세상에서 겪는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라는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자칫 한없이 슬프고, 한없이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자신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제가 처음에 소개해드린 ‘돌아오지 않는 여행’이란 소설의 주인공인 ‘존 로버트’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의 맨 끝에 결론으로 적힌 글입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감사하고 싶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에 갈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줄 몰랐으니까요. 그런 깨달음을 주신 신께 감사드립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처음에 자신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원망과 불평 속에서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하고 외쳤지만, 이제는 오히려 신께 감사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제목을 찾고 있습니다. 그에게 감사의 제목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곳이 추운 북극의 오지이지만, 야만인들이 사는 곳이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인간의 정을 나누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할 수 있도록 깨달음을 주신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욥도 고통 속에서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하는 불평의 소리를 외쳤지만 나중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즉 현재의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결국 이것으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양으로 자신이 변해간다는 소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온몸에 화상을 입은 이지선 양도 처음에는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왜 하필 이런 고통을 제가 당해야 하나요? 이것은 제게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하고 원망조로 물었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조목조목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자고로 성경의 위인들을 보면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하나님, 하필 제가 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로 삶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즉 처음에는 불평이었어도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감사로 생애를 마감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짧은 인생 속에서 누구나 한번쯤은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하는 불평과 탄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불평에 가득차서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로 우리의 인생을 마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 같은 죄인을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택하시고 불러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외칩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똑같은 문장, 똑같은 말이라도 이제 우리는 이 고백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왜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감당하기가 너무 벅찹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이전에 불평 속에서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라는 고백이 도리어 감사함과 찬양으로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왜 저를 이다지도 사랑하십니까?”라고 고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 외국 땅에서도 여전히 더욱 더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