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하나님을 보는 자여

날짜: 
2017/10/01
말씀: 
마5:8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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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안계십니까? 물론 이 자리에 예배를 드리러 오신 분들은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하고 주저 없이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분들은 “에이,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줘 봐라. 보여 주면 나도 하나님을 믿을게.”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하나님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야. 그냥 무조건 믿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어.”라고 대답합니까? 아니면 “그래. 이리 와봐. 내가 너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라고 대답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볼 수 있는 분일까요? 아니면 볼 수 없는 분일까요? 정답부터 말하면 하나님을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하나님을 못 본다는 성경구절도 있고, 하나님을 본다는 성경구절도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못 본다는 성경구절을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 보여 달라고 하니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1-23)
하나님은 모세에게 얼굴은 보여주시지 않고 등짝만 보여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는 너무나 찬란하기 때문에 인간이 보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양을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직접 쳐다보면 눈이 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11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또 이와 비슷한 말씀이 민수기 12:5-8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신명기 34:10에도 이런 비슷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즉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등짝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면서 말하는 아주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동방의 의인이라는 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큰 환난을 당하여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하나님)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9:11)
그런데 욥기 마지막 장인 42장에 보면 욥이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즉 욥이 하나님을 보지 못한 시기도 있었고 하나님을 본 시기도 있었습니다.
사사기 13장에 보면 삼손의 출생이야기가 나옵니다. 잉태치 못하는 삼손의 어머니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장차 삼손이라는 아들을 낳게 될 것을 계시합니다. 그 후 또 다시 삼손의 아버지에게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삼손의 출생을 알려줍니다. 이때 삼손의 아버지가 아내에게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13:22)
그러자 그의 아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삿13:23)
이사야 6장에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보고 난 후 이런 고백을 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죄악된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는다는 사상은 구약 성경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욥에게, 이사야에게, 삼손의 부모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을 보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 그러자 빌립이란 제자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청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9-10)
요한복음 1:18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나라로 가셨고, 성부 하나님도 하늘에 계시고, 성령 하나님도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즉 마음의 눈, 영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었습니다. 따라서 영의 눈도 작동을 못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줘 봐라. 그러면 나도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을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일단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리고 잃었던 영의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영의 눈에 끼이고 쌓였던 더러운 먼지를 제거해야 합니다. 영의 눈을 청소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 있는 눈은 하루에 약 2만 5천 번 정도 깜빡거린다고 합니다. 깜빡거리면서 눈물샘에서 나온 깨끗한 액으로 안구를 계속해서 씻어 냅니다. 그래서 작은 먼지 하나라도 남아 있지 않도록 깨끗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밝게 만물도 보고 사람도 보고 글도 보는 것입니다.
청결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눈을 이런 식으로 닦는 것처럼 깨끗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알고 있어도 더러워지면 안 보입니다. 마치 눈을 갖고 있어도 눈에 무엇인가가 덮이면, 백내장이 생기면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거짓말을 함부로 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옆에 두고도 못 봅니다. 영의 눈인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까? 영의 눈인 마음을 먼저 깨끗하게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이실 겁니다. 너무나도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아니, 하나님, 여기 계셨네요?” 하고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이중적이지 않은 마음, 위선적이지 않은 마음을 의미합니다.(마6:22-24) 즉 마음이 나누이면 하나님이 안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마음을 주었다가 또 세상에 나와서는 돈에 마음을 주면 마음이 갈립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보아야 될 신령한 영안을 가지고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면 마음이 갈려서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왜냐하면 영이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갖고 있으니 그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청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앉으나 서나 그것만 들여다보므로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을 볼 시간에 세상 것만 보니, 돈만 바라보고, 세상의 쾌락만 바라보면서 아예 마음이 세상에 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들은 교회에 오면 하나님도 안보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져서 더러워졌고 이미 세상의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마음을 청결케 하여 하나님을 보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이 청결해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보고 사는 사람만큼 행복한 자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을 감으나 뜨나 하나님만 눈앞에 보이는 사람, 그 마음에 하나님으로 가득히 채우고 있는 사람, 세상에 이 사람만큼 만족하고 살만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내 마음에 가득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좌우하시는 하나님을 밤이고 낮이고 보면서 삽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 가운데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항상 내 눈앞에 계십니다.
그런 사람을 두렵게 할 것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을 누가 두렵게 만듭니까?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불만이 쌓일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이 그 눈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데 무엇이 불만입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좌절하고 앉아서 탄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안에는 좌절이 없습니다. 절망이 없습니다. 그 희망의 하나님을 보면서 사는데 그 사람을 누가 끌어 앉혀서 탄식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이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보면서 사는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외국 땅에서의 행복, 아니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게 사느냐 불행하게 사느냐는 결국 내가 하나님을 보고 사느냐 못 보고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보고 사는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