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사는 태도

날짜: 
2009/03/01
설교: 

전7:14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사는 태도
옛날 다윗 왕이 궁중의 세공인에게 명령을 하였습니다. "나를 위하여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라. 반지에는 내가 큰 승리를 하여 기쁨을 억제치 못할 때에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기도록 하라. 또한 그 글귀는 내가 큰 절망에 빠졌을 때에 용기를 함께 줄 수 있는 글귀여야 하느니라."
세공인은 다윗 왕의 명령대로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다름 아닌 왕이 요청한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공인은 고민하다가 그 당시 심히 지혜롭다고 하던 솔로몬 왕자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자님, 부왕의 큰 기쁨을 절제시키는 동시에, 절망했을 때에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솔로몬 왕자는 그 세공인에게 말했습니다. "자, 이 글귀를 그 반지에 써넣으시오. 왕이 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순간에 이 글을 보면 자만심은 가라앉을 것이고, 왕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이 글을 보게 되면 큰 용기를 얻을 것이오." 여러분, 그 반지에 써놓은 글귀를 혹시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바로 이 글귀입니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솔로몬 왕자에게 이 글귀를 받은 세공인은 반지에다 그 글귀를 써넣어 다윗 왕에게 가지고 갔습니다. 다윗 왕은 그 글귀를 보고 손바닥을 치며 그 지혜로운 글귀에 탄복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하는 다윗은 자신이 승리와 형통의 날에 교만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반면 자신이 어려운 날, 곤고한 날이 다가올 때에 낙심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을 함께 다스리는 지혜의 왕 솔로몬의 글귀입니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오늘의 본문 역시 지혜의 왕이라고 하는 솔로몬이 말년에 쓴 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좋은 때, 형통한 때, 일이 잘 때, 승리의 때, 행복한 때도 주시지만 곤고한 때, 어려울 때, 나쁜 때, 슬플 때, 불행할 때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각자의 인생의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고로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교훈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인생은 누구나 굴곡이 있습니다. 성공한듯하면 갑자기 실패도 찾아오고, 불행하다 싶으면 어느 날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반복되는 인생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결국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해하며, 보다 성숙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성공만을 원합니다. 형통만 원하고, 행복과 기쁨만 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실패도 다가옵니다. 불통도 오고, 슬픔과 불행도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형통하고 행복할 때뿐만 아니라 곤고하고 불행하다고 느낄 때에도 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1. 형통할 때에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길어야 100년 정도 밖에 살지 못하다가 죽어야하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으면 교만하다가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죽을 때에도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을 사는 우리가 스스로 잘났다고, 스스로 위대하다고 교만해지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말도 안됩니다.
그런데 희한합니다. 사람은 잘되면 교만해집니다. 없다가 있으면 마음이 괜히 우쭐해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약4:6)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이 오면 망조도 따라옵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찾아옵니다. 교만이 오면 다툼도 생깁니다. 성경에 보면 잘될 때에 교만해지므로 망조가 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다에 '웃시야'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웃시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대로 하나님을 힘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부국강병책을 써서 아라비아의 상인들과 무역로를 트고 광업과 농업을 부흥시키며 군대를 재정비하고 요새건설에 주력하였습니다. 그가 왕으로 있을 때에 이웃나라 암몬 족속도 조공을 바쳤습니다.(대하26:8) 그리고 그는 정직하고 경건한 왕으로서 백성의 모범이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겸손한 신앙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역대 왕들 중에 인기와 덕망을 얻고 주변나라까지 소문난 왕이었습니다. 그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장장 52년 동안이나 왕의 권좌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부강해 지고, 만사가 형통하며, 그의 명성과 덕망이 높아지자 마음속에 자신도 모르게 교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성전에서의 분향을 하다가 그만 문둥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가 강성하여 지매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되 곧 여호와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대하26:16)
하나님은 교만한 웃시야 왕을 문둥병으로 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을 때까지 별궁에서 혼자 쓸쓸히 거해야만 했고, 그가 죽으매 문둥병자라 하여 열왕의 묘실에도 장사되지 못하고 외딴 곳에 묘를 쓰는 비극의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실화를 들으면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하, 교만하면 안되는구나!"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왕들은 형통할 때에 교만하여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좋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아무 걱정이 없고 모든 일이 잘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돈도 쓸 만큼 있고, 아픈 데도 없이 건강하지는 않습니까? 누가 특별히 근심을 끼치는 사람도 없고, 이제 캐나다에서 살만하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때 교만을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이란 병은 스스로 깨닫기가 상당히 힘이 든 병입니다. 교만한 사람 중에 "아, 나는 교만하구나! 이러면 안돼!"라고 스스로를 바르게 진단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친한 사람도 "너 교만하다!"고 말해주지 못합니다. 고로 교만이란 병이 오면 성경대로 급히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고로 형통의 날에는 교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생각해야 합니다. 못먹고 못살았던 가난했던 그 시절을 떠올려야 합니다. 비난과 조롱을 당했던 어려운 시절도 떠올려야 합니다. 병들어 신음하면서 "하나님, 저의 병을 제발 고쳐주시옵소서!" 하고 매달렸던 시절도 생각해야 합니다. 처량하고 불쌍하고 애처로웠던 과거도 회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해야 합니다. "이럴 때 교만하면 안된다."
2. 곤고할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두 가지 환경에 처할 때에 흔들리게 됩니다. 하나는 너무 너무 잘될 때에 교만해지는 것이요, 또 하나는 너무 어렵고 안될 때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곳 캐나다 땅까지 와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할 때에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외국 땅이기에 마땅한 탈출구도 없어 그 낙심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게 됩니다. 더구나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인하여 오늘의 삶이 불안해지고, 내일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면 낙심의 폭도 더욱 커지기 쉽습니다.
이때에 성경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환경이 이렇게 어려워졌으니 너희는 탄식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며 살라고 말씀합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시42:5-6)
여러분, 스스로 한번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나는 어찌하여 낙망하고 있는가? 나는 어찌하여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당신을 낙심시키며 무엇이 당신을 불안케 합니까? 이 외국 땅에서 가족들과 살만큼 충분한 돈이 없어서 낙심이 됩니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환경이나 사람을 보고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전체적으로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당신을 낙심시키고 있습니까?
이렇게 낙심이 나를 찾아올 때에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옛날에도 나를 도와주셨으니 오늘날도 나를 도와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어려운 환경도 결국 하나님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계속 환경만 바라보고, 사람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만 낙심이라는 깊은 함정에 빠져 스스로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1642년 영국 동부지역 울스소프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겨우 말을 배우려고 할 때에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재혼을 했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사과나무 아래 혼자 앉아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 후 아이는 천신만고 끝에 열망하던 대학에 들어가 학업을 마쳤습니다. 그의 꿈은 박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그 지역의 모든 대학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아니,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뭐람!" 그는 낙심한 채 고향에 내려가 사과나무 아래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 자리는 꿈을 잃어버린 자리였습니다. 그때 사과 한 개가 '툭' 떨어졌습니다. 그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그는 그 사과가 마치 자기 처지와도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러자 그는 더욱 긴 한숨이 나왔고, 더욱 낙심에 사로잡혀 속으로 말했습니다. "사과야, 너는 왜 떨어져야만 하느냐? 너는 도대체 무슨 낙심이 있기에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야 하느냐?”
여러분, 이 의문이 바로 인류 과학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아이작 뉴턴의 위대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기회가 된 것을 아시지요? '만유인력'이란 세기의 법칙은 바로 뉴턴이 모든 꿈을 잃어버렸다고 실망하고 탄식할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즉 낙심의 현장이 도리어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고로 어려운 환경만 바라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어려운 환경을 통하여 당신도 지금 진리를 발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려고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고로 이곳 외국 땅의 삶이 비록 어려워도 당신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낙심에 사로잡혀 스스로 포기하면 안됩니다.
특히 기도하는 여러분들이여, 기도하다가 응답이 너무 늦게 온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했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인가 하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선을 행하는 여러분들이여,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두운 인생의 밤을 통과하는 여러분들이여, 캄캄함 속에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두운 밤이 지나면 반드시 밝은 아침이 오게 마련입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당신의 심은 것에 좋은 열매를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3:13)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노라."(고후4:8)
결론입니다. 사람은 잘될 때도 있습니다. 형통의 때입니다. 안될
때도 있습니다. 곤고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 둘을 병행하여 우리 인생들을 훈련시키십니다. 이 훈련을 아름답게 통과하기 위해서 우리는 잘 될 때에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곤고한 날에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형통의 때나 곤고한 날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은혜, 그 사랑을 생각하며 생명이 마치는 순간까지 보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 여정 끝나는 날에 후회 없이 인생을 마치고 주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곤고한 날이 이르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옛날 어려운 시절에도 우리를 도와주셨던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또 다시 낙심을 떨쳐내며 충성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기 원합니다. 저희들을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