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

날짜: 
2007/10/21
설교: 

시133:1-3 화목
잠언 17:1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언한 말세의 현상 중 두드러진 것은 화목과 정반대인 다툼입니다. 민족과 민족간에 다투며, 나라와 나라간에 다투며, 집단간에 서로 다투고, 개인과 개인이 서로 다툽니다. 장차 인류는 다툼이 비화된 전쟁으로 인하여 멸망을 당할 것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툼의 사회 속에서도 화목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화목한 가정, 화목한 부부. 화목한 자녀, 화목한 시어머니와 며느리, 화목한 동서지간, 화목한 교회, 화목한 성도, 화목한 목사, 화목한 교단, 화목한 국가, 화목한 사회, 화목한 민족... 만약 서로가 화목하면 인류의 멸망도 우리는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특징은 서로를 다투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시기하고 미워하고 원한이 맺히게 합니다. 그러나 만약 서로 다투지 않고 화목한다면 거기가 바로 천국일 것입니다. 교회도 다투지 않으면 성장합니다. 행복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알력과 다툼이 있으면 불행한 교회입니다. 가정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투면 불행한 국가요 불행한 가정이요, 서로 화목하면 행복한 국가요 행복한 가정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먼저 화목에 대하여 굉장히 생각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다름 아닌 화목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간에 사이가 벌어지고 원수지간에 되었지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되고 사랑하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고로 에베소서 2:16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여러분, 얼마나 화목이 중요하면 하나님이 친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죽도록 내어주셨겠습니까? 도대체 왜 이렇게 화목이 중요합니까? 왜 우리가 화목해야 합니까?
1. 화목한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즉 화목하지 못하면 절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기도를 열 시간하고 말씀 연구와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도 화목이 없으면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화목한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싸우고 다투는 집에 머무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즉 사람끼리 원한이 맺히면 하나님과도 막히고 예물도 기도도 열납이 되지 않습니다. 고로 우리는 화목을 추구하고, 화목을 위하여 노력하고, 화목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으리라.”(마18:20)고 하셨고,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세 사람이 같이 있기 위해서는, 두 세 사람이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기 위해서는 서로 화목해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화목의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독립된 인격을 가지고 있지만 이 분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는 분이 아니라 서로 화목한 가운데 완전한 한 하나님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존재도 화목을 전제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존재도 화목을 전제로 이루어집니다.
2. 예수님 안에서 성도는 하나이기 때문에 화목해야합니다.
에베소서 4:3-5에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에도 “우리가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했습니다. 즉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한 식구 정도가 아니라 한 몸입니다. 영적으로 한 성령이 임한 한 몸입니다. 그래서 영이 통하고 마음이 통합니다. 그래서 한 지체가 즐거우면 함께 즐겁고 한 지체가 고통하면 함께 고통스럽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곤충이 있는데 그 곤충은 불독개미라고 합니다. 불독개미는 머리와 꼬리가 서로 싸우느라 한 순간도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자기 몸인데도 자기 머리와 꼬리가 서로 싸웁니다. 이 곤충은 몸을 갈라놓아도 머리와 꼬리가 싸움을 한다고 합니다. 꼬리는 머리를 휘감고 머리는 꼬리를 뭅니다. 그래서 결국 몸과 꼬리는 서로의 공격을 받아 곧 죽고 맙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곤충입니까?
그런데 주 안에서 한 몸인 성도들이 서로 다투는 것이야말로 있어서는 안 될 비정상입니다. 물론 같이 가까이 오래 지내다 보면 서로의 모든 것이 다 노출됩니다. 믿음이 노출되고, 성격이 노출되고, 단점도 다 노출됩니다. 그러다보면 성도님들이 같이 지낼 때 몸과 마음이 피곤해지기도 합니다. 몸은 같이 있지만 마음은 멀어지고 화목이 달아나기가 쉽습니다.
이때 서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너와 나는 하나다”라는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가 피곤하니 따로 따로 살자” 이런 마음을 먹으면 이혼이 되고 맙니다. 분열이 되고 맙니다. 가정이 분열되고, 교회가 분열되고, 사회가 분열되고, 국가가 분열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불행이 모두에게 찾아오고 맙니다. 그러므로 비록 서로의 인격이 틀리고, 생각이 틀려도 “우리는 하나다.”라는 생각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다.”라는 바탕에서 서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한 국가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내 교회와 네 교회가 서로 하나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도간에도 서로를 하나로 인식해야합니다. 만약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생각으로 상대방을 무시하면 화목이 깨집니다. 자기만 잘났다고 하면 화목이 깨집니다. 자기만 높아지려고 하면 화목이 깨집니다. 자기만 좋은 것을 취하려고 하면 화목이 깨집니다. 이기주의는 화목을 크게 방해합니다.
이전에는 각 교회마다 자기 교회의 성장을 우선순위로 생각했지만 요즈음은 마인드가 변합니다. 화목을 우선순위로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느 교회 목사든지 교회 성장과 부흥을 원치 않는 목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만 독점하려고 하면 화목이 깨지고 맙니다. 경제적인 원리도 마찬가지요, 정치적인 원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만 살려고 하면 서로가 원수가 되고 맙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아야 합니다. 요즘 한국말로 하면 상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디가든지 꼭 이기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화목제물이 필요합니다. 희생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믿음 있는 자가 믿음 없는 자를 감당해야 합니다. 성격이 좋은 자가 성격이 나쁜 자를 감당해야 합니다. 경우 있는 자가 경우 없는 자를 이해해야 합니다. 피스메이커(peacemaker)가 트러불메이커(troublemaker)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가 되고 화목이 형성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5:18-19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즉 화목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통이 따릅니다. 내가 당장 손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책임 즉 의무입니다.
3. 화목한 곳에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말씀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시편 133편은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다윗은 가정의 반목으로 인한 고통을 겪은 사람입니다. 장인인 사울왕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미갈이란 첫째 아내는 자기를 조롱하여 아기를 갖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자기의 자녀들이 서로 상처를 주고, 서로를 죽이는 것도 겪었고, 자기 아들이 자신의 첩들을 강간하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고통도 겪었습니다.
고로 다윗은 누구보다도 가정의 화목을 그리워했습니다. 또한 그는 전쟁을 하는 군인이기에 더욱 화목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고로 그는 본문에서 서로 연합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이 구절에 ‘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이 선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하고 아름다운’이란 단어 앞에 강조어인 ‘어찌 그리’라는 단어가 첨부됩니다. 즉 형제가 서로 화목하고 연합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좀더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How beautiful it is!'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다윗은 두 가지와 같다고 합니다. 첫째는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또 하나는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헐몬산에서 시온 뜰에 뿌려지는 이슬이 없다면 시온 뜰은 메마른 광야가 되고 맙니다. 즉 연합과 화목이 온 땅을 살리고 윤택하게 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권능이 있어야 생명을 살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권능이 있어도 그 권능에 화목이 빠지면 그것은 단지 ‘권능’이라는 무기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화목의 이슬은 권능의 소낙비처럼 눈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화목의 이슬은 소낙비처럼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화목의 이슬은 말없이 조용히 역사합니다. 그러나 화목의 이슬은 권능의 소낙비와는 차원이 다른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화목의 이슬은 마치 포근한 어머니의 품처럼 평안을 주며 행복을 줍니다. 시온의 뜰에 헐몬의 이슬은 마치 아기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젖처럼 너무나도 고마운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가 같이 연합하여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말없이 조용히 헐몬의 이슬처럼 시온의 뜰을 적셔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형제의 화목을 다윗은 대제사장 아론의 머리 위에 부어진 기름과 같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다윗은 대제사장인 아론보다 한참 뒤에 태어난 사람이기에 아론이란 인물과는 별로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아론이란 인물은 성경에 그리 뚜렷하게 나타난 인물도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있어서 아론은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생인 모세를 잘 보좌해주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 자신은 입이 뻣뻣하여 하나님의 소명을 자꾸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하면서 모세를 위하여 아론이라는 보좌관을 세워주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지만 뒤에서 모세를 따라다니며 그의 수족의 역할을 했습니다. 모세가 성전을 세우면 그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화목의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론에게 제사장 직분을 맡기어 주었고, 그 제사장 직분의 임명식이 바로 머리 위에 보배로운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화목이란 서로 머리가 되겠다고 하면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맙니다. 마치 아론과 같이 모세의 형이지만 모세보다 낮은 데서 말없이 모세를 받쳐주는 사람이 있을 때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화목의 제물이 되었듯이 제사장들도 화목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화목의 사람에게 보배로운 기름을 부어줍니다. 그리고 이런 화목과 연합이 있는 곳에다 하나님이 축복을 명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불화가 있는 곳에는 복이 달아나고 화목이 있는 곳에 복이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여러분, 축복 받고 번성하는 비결 중 하나는 화목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멸망 받고 저주 받는 방법 중 하나는 다툼입니다. 욥기 22:21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크리스천은 하나님과 이웃과 화목하는 가운데 축복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화목을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진리를 품고, 선을 품고 화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악과 죄와 거짓을 품고 화목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9:50)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 합니다. 즉 부패한 심령을 가지고, 거짓을 품고 화목하지 말고 깨끗한 마음, 진리를 품고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깡패들이 단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세력을 규합하며 하나가 되고 화목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품고, 서로 화목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