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Story(사랑이야기)

날짜: 
2007/06/24
설교: 

호3:1-3 Love Story(사랑이야기)
성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희한한 사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세아와 고멜의 러브스토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800여 년 전에 이스라엘 나라에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야, 너는 저기 음란한 거리의 여인인 고멜을 아내로 취하라.” 호세아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 따라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 이남 일녀를 낳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가출한 것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아내 고멜이 부정한 행실을 버리고 성실한 아내와 어머니로 다시 돌아오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녀들에게 어머니를 다시 집으로 돌아오도록 호소해보라고 했습니다. 남편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해도 자녀들의 간곡한 호소를 그녀가 들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 아내 고멜은 호세아의 순수하고 신실한 사랑을 외면해 버리고 물질과 쾌락으로 유혹한 남자를 따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어 고멜은 또 다른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도 또다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남자를 계속 만나고, 이제는 창녀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아무도 돌보아 주는 자가 없어 굶주리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고멜은 노예시장으로 팔려가서 옷이 벗겨지고 짐승처럼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젊고 아름답고 건강한 여자라면 높은 값에 팔리겠지만, 고멜은 비싼 값을 내고 사가지고 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련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1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고멜은 소중한 아내와 어머니라는 자리를 저버리고 다른 남자를 좇아 떠나간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그 음란한 여인 고멜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 여겨야 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또(again)’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비록 그녀가 배신했을지라도, 비록 그녀가 잘못 했을지라도, 비록 그녀가 가출하여 허랑 방탕하여 살았다 할지라도, 또 다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즉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된 아내를 되찾기 위하여 도합 은 30세겔을 주고 노예 시장에 가서 자기를 배신하고 도망갔던 그 여인, 자녀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달아났던 그 여인, 온갖 음란한 짓은 다 저질렀던 그 여인을 다시 사온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예수님도 은 30세겔에 팔렸습니다. 당시에 젊은 남자 노예의 값이 은 30세겔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이 호세아와 고멜의 러브스토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사는 나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호세아는 하나님을 예표하고 있고, 고멜은 우리 인간들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란한 아내 고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한 호세아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비록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좇아가고, 우상을 숭배하고, 각종 죄악을 범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대가를 치러주셨습니다. 희생과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사랑은 진짜가 아닙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대가는 지불하지 않고 사랑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Enjoy일뿐,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간에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합니다. 교회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 희생을 해야 합니다. 희생은 하지 않은 채 사랑한다는 말은 위선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말로만 사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죄 많은 우리를 구속하려고 친히 대가를 치러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여기에서 ‘구속(救贖)’이라는 말은 영어로 ‘Redemption’이란 말로서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온다’라는 의미입니다. 호세아가 남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고멜을 위해 은 30세겔을 주고 다시 사온 것처럼, 주님께서 값을 치루고 우리를 다시 사오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까?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써 구속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은이나 금 같은 없어질 것으로 대가를 치룬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어느 동네에 남편이 병으로 떠나고 다섯 살과 세 살 된 두 아들을 어렵게 키우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철길 가에 있는 신발 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었습니다. 부인은 하는 수 없이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공장 안의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일을 했습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느낀 두 아이들은 엄마 몰래 철길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철길에서 조약돌을 치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면서 놀았습니다. 한편 공장 안에서 일을 하던 엄마는 누군가로부터 애들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불길한 생각이 들어 밖으로 뛰어 나가보니, 아니다 다를까 공장건물 옆에 있는 철길에서 두 아이들이 놀고 있고, 저쪽에서는 기차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얘들아, 피해라. 기차가 온다. 기차가 온다.”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들은 엄마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열심히 놀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있는 힘을 다해 철길로 뛰어 갔습니다. 기차가 거의 다 왔습니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내었지만, 그 순간에 기차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두 아들을 살리고 난 엄마는 기차에 치여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이 난 채 죽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부인의 장례를 치르고, 두 아들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어졌습니다. 고아원에 보내어진 두 아들이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들의 과거 이야기를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들었습니다. 두 아들은 오열을 합니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어머니, 우리를 위해 철길에 뛰어들었다가 산산조각으로 찢겨지신 어머니....” 두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웠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여러분,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몇 백 원을 받으며 일했던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굶고 아이들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기찻길에서 놀고 있었던 두 아이들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그 사건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랑의 절정은 병든 자를 고치시며, 눈먼 자를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가지고 5,000명을 먹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의 절정은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것입니다. 고로 각 교회마다 주님의 사랑이 확인된 십자가를 걸어놓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보여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을 입은 자들은 그 사랑을 입은 것만으로 끝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그렇게 죄악을 지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다면 우리 맘대로 세상의 쾌락도 즐기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어떤 분들에게는 이 세상의 쾌락을 끊고 산다는 것이 상당히 힘이 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크신 용서와 사랑을 받고 난 다음에 또 다시 죄악에 빠지며 사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 호세아가 창녀가 된 고멜을 용서하고, 구속의 대가를 치루고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다시 가출하여 또 다시 음녀가 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요즘 한국 사회에 보면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조양은 씨와 김태촌 씨입니다. 두 사람은 깡패 두목으로 한국에서 잘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한 때 깡패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도 계속 깡패들의 죄악에 연루되는 것으로 인하여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물론 깡패나, 창녀나 노름꾼이나, 사기꾼 같은 죄악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쉽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용서함을 받은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 호세아가 고멜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여러분, 자신의 목숨을 버려 대가를 치루시고 구속해 주신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애야,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해 주었단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롭게 살도록 하여라.”
주님은 우리가 새롭게 살도록 우리를 돕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영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돼지는 주인이 아무리 깨끗하게 목욕을 시켜 주어도 도로 더러운 곳에 누워버립니다. 그 안에 돼지의 마음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지 않으면 다시 세상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슬픔과 근심과 노여움의 대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입은 사랑은 싸구려 사랑이 아닙니다. 끈 달린 조건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주판 알 튕기는 계산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이 따르는 참된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받고 이 용서함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사람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