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제가 청년 때에 한국에서 지하철을 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두 노인 분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 노인 분이 친구 노인 분에게 양보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양보할 테니 자네가 먼저 가게.” 그러자 다른 노인 분이 대답합니다. “아니야, 자네가 먼저 가. 나는 나중에 천천히 갈게.”
그러자 또 친구 노인 분이 조금 더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합니다. “아- 자네가 먼저 가래도.” “아니야, 자네가 먼저 가.” 제가 그분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아- 어디 가시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열차를 타셨으니 같이 도착하실 테고, 사이좋게 같이 가시면 되잖아요?” 그러자 그 노인 분들이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아- 어디긴 어디야. 공동묘지지.”
제가 그 대답을 듣고 좀 당황했습니다. “엥- 뭐야 이거. 죽으러 가는데 서로 먼저 가라고 양보를 하시네. 사이가 참 좋으신 분들이네.” 여러분, 웬만큼 친하지 않으면 이런 대화를 하기가 상당히 힘들 겁니다. 아- 그러지 않겠어요. 누가 나보고 “너 빨리 죽어라. 나보다 니가 먼저 죽어라.”고 말하면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서 “야- 너나 빨리 죽어라.”고 언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캘거리 교역자 협의회 목사님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사모님들도 같이 모였습니다. 그 때가 구정이라고 해서 상품을 많이 준비하고 윷놀이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상품을 나누어 갖는데 제가 열두샘 교회의 김흥식 목사님에게 좋은 상품을 양보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저보다 먼저 천국에 가실 테니까 이 선물 목사님이 가지세요.”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다른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웃습니다. 그 중에 어떤 목사님과 사모님은 이 말에 좀 당황하시는 기색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님은 몇 년 전에 전립선 암 판정을 받은 상태였고 계속 조심하며 치료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에게 제가 저보다 먼저 천국에 가실 것이니 좋은 선물 가지라고 했으니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그 분이 목사님이 아니시고, 죽음과 천국에 대해 모르시는 분이라면 크게 시험이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저나 그분이다 다 목사님입니다. 나이도 그 분은 70세가 가까웠고, 저도 65세가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제가 좀 친한 사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씀한바 사람은 누구나 모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죽음 후에는 천국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제 말을 듣고 웃으면서 “알았어. 내가 먼저 갈게. 뒤따라 와.”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죽음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씀한바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함이라.”(빌1:21)고 한 것처럼 죽음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죽음을 통하여 영광스런 천국에 가니까 그것도 꽤 괜찮은 옵션입니다.
저와 저의 집사람도 가끔 이런 대화를 합니다. “우리 둘 중에 누가 먼저 천국에 갈까?” 이때 저의 집사람이 항상 용감하게 말합니다. “내가 먼저 갈 테니까 목사님은 나중에 한참 있다가 오세요.” “글쎄, 하나님이 오라고 해야지 가는 거지. 아무 때나 내 마음대로 천국에 가나?”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진리를 알면 좋은 것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죽는 것을 그리 무서워하지 않게 됩니다. 아멘이지요? 왜 아멘 소리가 작습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게 하심이라.”(히2“15)
물론 죽을 때의 아픔과 고통이 있을 수 있기에 그것에 대해선 미리부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죽을 때에 좀 힘들지 않게 편안히 죽게 해주세요. 그리고 죽을 때에 가족이나 주위의 분들에게 폐가 되지 않게 해주시고, 후회가 없이 사명을 잘 마치고 죽게 해주세요.”
오늘의 본문에 보면 지혜의 왕이라고 하는 솔로몬의 고백이 나옵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 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느니라.”(전7:1-2. 4)
여러분, 왜 솔로몬이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할까요? 그것은 출생하는 날은 고생과 수고와 눈물이 많은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한평생 살려고 하니까 그게 힘들다는 겁니다. 반면 죽는 날은 모든 수고와 고생을 마치고 천국에 평안히 쉬러 가는 거니까 그게 도리어 좋다는 겁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니 그게 참 좋습니다.
물론 이런 진리를 모르는 불신자들은 죽음이란 말만 들어도 재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보면 빌딩의 엘리베이터에 ‘죽을 사‘ 4층이 없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조금도 염려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에 거할 곳에 많도다.”(요14:1-2)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생 중 최상의 날입니다. the best day of the best days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셨고, 우리들도 예수님 안에서 죽음을 정복하기에 이제 죽음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죽음은 가장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날이요,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이민을 가는 기쁨의 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 우리들의 영혼은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노래합니다.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찬송가 235장)
그리고 본문에 솔로몬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 말은 초상집에 가면 귀중한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도 돌아보게 되고,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며, 이 땅에서 살아있을 때에 보다 진실 되고, 보다 깨끗하고, 보다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고 다짐을 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제가 한국의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교구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교구 식구들 중에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권사님 두 분이 있었습니다. 그 두 분은 교구 모임 때에 만나도 서로 인사도 하지 않습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도 불안 불안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교구에 갑작스런 장례가 났습니다.
교구 식구들과 그 권사님 두 분도 저와 함께 초상집에 갔습니다. 얼마 전까지 같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지냈던 분이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신 겁니다. 아- 안타깝습니다. 가족들의 흐느끼는 울음소리, 통곡 소리가 들립니다. 인생무상입니다. 그곳에서 장례예배를 드리며 유족들을 위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그 두 분 권사님이 기적적으로 화해를 했습니다. 가까웠던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깨달은 겁니다. “그래, 조금 있으면 너도 죽고, 나도 죽을 텐데, 이렇게 으르렁 거리며 서로 미워하고 살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보게 오권사! 이제 우리 그만 화해합시다. 내가 잘못한 것 용서해줘요. 미안해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깨닫는 것이 참 많습니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일지라도,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초상집에 10번을 같이 가보십시오. 거기서 용서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고로 다시 사이가 좋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아- 나도 조금 있으면 죽겠구나. 그래, 이제 남은 인생을 올바르게 살자. 후회 없이 살자.”고 인생을 재정비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또한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아- 저렇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데 그 동안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살았구나. 안되겠다. 이제는 좀 나누어주고 베풀며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하게 됩니다.
고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긔고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나와 가까이 지냈던 친구나 이웃이 있습니다. 서로 생일날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파티도 자주 하고 웃고 떠들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사랑하는 가족 식구가 죽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도 하고, 남편이 먼저 죽을 수도 있고, 아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자녀가 먼저 죽을 때도 있습니다. 아- 너무나도 슬프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이때 같이 늘 파티를 하며 친하게 지냈던 친구나 이웃이 초상집에 오지 않으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반면 그리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던 사람이 와서 위로해주고, 얼굴을 비춰주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더구나 초상집에 와서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면 그 사람의 선행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고마워할 겁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교회라는 곳이 참 좋은 곳입니다. 같이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같이 음식도 먹으면서 친교도 하고, 더구나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사고를 당하거나 초상을 당할 때 목사님인 저를 비롯해 모든 교우 분들이 찾아와 이런저런 모습으로 도와주니 그것도 참 다행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초상을 치루고 나면 그 초상집의 가족이나 친척 분들 중에 불신자가 교회에 나오거나, 이미 교회에 나왔지만 그리 열심히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분들이 그 후에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욱 유익합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본문 3절에 말씀합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어찌 보면 이 구절은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반대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슬픔보다 기쁨을 더 원하고, 실패와 고난보다 성공과 형통을 더 원합니다. 그러나 인생 중에 실패와 고난이 전혀 없고 오직 성공과 형통만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 인격의 깊이가 얕아지고, 인격적으로 천하고 교만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고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웃음보다 슬픔을 주기도 하시고, 쾌락보다 근심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야 보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게 되고, 인격이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갖춰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언어와 문화와 인종이 다른 이곳 외국 땅에서의 삶이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 외국 땅에서 살다보니 조그만 문제에도 근심이 더 크게 다가오게 됩니다.
고로 나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는 분은 아시잖아요.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처음엔 근심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지만 그로 인해 더 열심히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오래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깊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즉 이전의 근심보다 더 큰 하나님의 평안이 오므로 도리어 기분이 더욱 좋아지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슬픔이 웃음보다 낫고, 근심이 도리어 마음을 더 좋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슬픔과 근심을 더 큰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으로 돌릴 수 없다면 그건 그대로 나를 파괴하는 고통이요 저주가 되고 맙니다.
또한 본문 1절에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보배로운 기름이란 참기름, 들기름, 콩기름, 올리브기름과 같은 식용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통째로 부은 그런 값비싼 향유, 요즘 말로 하면 매우 비싼 향수를 가리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값진 향유로 치장을 하며 겉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외모를 향기 나게 꾸미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인격이 갖춰져서 하나님이나 사람들에게 “너는 참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인정을 받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겁니다. 즉 외모만 갖춘 사람보다 예수님처럼 진실 되고, 그 진실된 내면의 향기가 은은히 풍기는 그런 사람이 훨씬 좋다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다들 자신 있게 아멘을 하시는데 그렇다면 실지 그런지 아닌지 테스트를 한번 해봅시다. 밸런스 게임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보십시오. * 예수님을 믿어서 성도님이라는 명칭을 얻는 것이 좋으세요? 예수님은 안 믿지만 평생 회장님, 사장님 호칭을 얻는 것이 좋으세요?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다음 질문입니다. * 예수님을 믿어서 성도님의 명칭을 얻는 것이 좋으세요? 평생 회장님, 사장님 명칭 + 100억 원을 받는 것이 좋으세요?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일단 대답하시기 전에 잘 생각해보십시오. 100억이 작은 돈이 절대 아닙니다. 이 돈만 있으면 내가 원하던 아름다운 집을 살 수 있고, 럭셔리하고 안락한 차도 살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세계여행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성도님의 명칭을 얻으면 주일날에도 늦잠을 자지도 못하고 일찍 일어나 만날 교회에 나와야 하고, 때로는 눈이 많이 와서 도로가 운전하기가 힘들고 추워도 교회에 나와서 봉사를 해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 잡히므로 자기의 자유가 침해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고 대답해보십시오.
그래도 나는 성도님이란 호칭이 100억 + 사장님 회장님 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시면 아멘 해보십시오. 자- 그러면 성도님이 더 좋다고 아멘 한 사람들은 빼고 회장님 + 100억이 좋다고 솔직하게 대답하신 분들에게만 지금 당장 준비한 100억을 주십시오. 어이- 이재용 회장님, 여기 돈 100억 주세요.(100억 사진을 보여줌)
어때요? 돈을 보니까 좀 실감이 납니까? 다시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100억 + 알파를 받고 평생 부자로 살래요? 그냥 돈도 별로 없는 중산층으로 살면서 성도님의 호칭으로만 만족하며 살다가 천국에 갈래요? “목사님, 저는 사장님 회장님 명예도 얻고 + 100억도 받고, 천국도 갈래요?“ 아- 이거 뭡니까?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밸런스 게임이라고 했잖아요.
결론입니다. 뭐가 더 좋은지 오늘의 성경이 그 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습니다. 둘째,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습니다. 셋째, 슬픔이 웃음보다 낫습니다. 넷째,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다행히 이런 더 좋고 더 나은 정답을 좇아가는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무쪼록 평생 더 낫고 더 좋은 것을 택하시며 나아가는 중에 인생의 보람도 누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더 큰 행복에 동참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주여, 인생을 살면서 때때로 문제로 인해 슬픔과 근심도 생기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갖춰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죽음의 그날이 다가와도 천국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계속 희망에 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는 더 좋은 길,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