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나이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좀 다르겠지만 옛날이나 요즘이나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사랑해’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 말하고 사는 사람입니까? 혹은 전혀 말하지 않고 사는 편입니까?
아- 이 질문은 제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좋은 질문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하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인 줄 뻔히 아는데, 그게 좀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잖아요. 나도 사랑을 받고 싶고, 나도 사랑하고 싶고, 나도 그 사랑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런 분에게 “너 요즘 사랑하면서 살고 있니?”라고 물으면 괜히 아픈 상처를 건드리거나, 남의 단점을 들춰내는 기분이 들게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사랑해’라는 말을 거의 안하고 사는 분들에게 이런 질문은 괜히 그 사람을 짜증나게 하거나 화를 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저처럼 60세 이상 되신 한국 남성분들의 경우 ‘사랑해’라는 말을 그 당시 우리 시대에는 잘 들어보지도 못했고, 잘 하지도 못했습니다. 오늘날에 비교해 그 당시에는 일단 처한 상황이 달랐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이 그 당시에는 좀 가볍게 들리거나 무책임한 말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한국 상황은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국토가 폐허가 되고 대부분의 한국 분들이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사랑해’라는 말은 너무 사치스럽고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사랑해’라는 표현 대신에 “밥 먹었니?” 혹은 경상도 말로 “니 밥 묵었나?”라는 말이 ‘사랑해’라는 말의 대용어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제 딸에게 자주 쓰는 말이 이겁니다. “밥 먹었니? 뭐 좀 먹었니? 배고프지 않아?” 이 말 뜻은 “애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의미가 포함된 말입니다. 그런데 풍요와 배부름 속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이 말의 뜻을 잘 모릅니다. 그냥 ”밥 먹었니? 안 먹었니?“라는 단순한 질문으로 생각합니다.
혹은 “왜 밥도 안 먹고 그렇게 싸돌아다니니?”라는 잔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자녀들의 대답은 “아빠 엄마, 나 밥 잘 먹고 다녀요.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저 다이어트 중이에요.”라고 대답합니다. “아니,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니면 뭐지요? 예-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라는 표현을 “밥 먹었니?”라는 말로 대신 표현한 겁니다.
그러잖아요. 당장 서로가 배가 고파 죽겠는데 ‘사랑해’라고 말하면 “야- 배고파 죽겠는데 뭐가 사랑이냐? 먹을 것이나 내놔.”라는 핀잔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고로 “밥 먹었니?”라는 질문은 서로 사랑을 주고받기 전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예의요, 친절이요, 덕목이었습니다.
풍요의 시대를 사는 요즘의 관점으로 생각하면 좀 쨘- 하고 눈물 나도록 서글픈 당시의 가난한 문화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좀 불편해 들릴지 몰라도 ‘사랑’에 대해 같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아멘? 어째 대답이... 불편하니까 하지 말까요? 그런데 어찌합니까? 하나님이 제게 영감을 주셨으니까 오늘은 좀 합시다. 그 대신 좀 짧게 하겠습니다. 아멘?
먼저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요일4:7) 아- 이거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100%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 마음대로 됩니까? “물론 나도 사랑하고 싶다고요. 근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고요.” 자- 이게 많은 사람들의 고민입니다.
학생들이 경우 공부를 잘해야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됩니다. 가장의 경우 이 외국 땅에서 돈 좀 많이 벌고 싶은데, 그래서 가족들 잘 먹이고, 잘살게 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됩니다. 사랑의 경우도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사랑하라고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어떡합니까?
자-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여러분이 상담자라면 어떻게 권면해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권면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 사람의 단점만 보시지 마시고 장점도 좀 보세요. 그러면 사랑할 건더기가 조금은 있지 않을까요?” “아-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장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가 단점 밖에 없다고요. 저는 요즘 그 사람 얼굴조차 보기 싫습니다. 싫다고요.”
“아- 예,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저도 사실 싫은 사람 많습니다. 좀 꼬집어주고 싶고, ‘야- 이 ××야!’ 하고 시원스럽게 욕도 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원수 같은 나를 너를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 사람을 좀 사랑하도록 노력해보지 않겠습니까? 제가 기도해 드릴게요. 하나님, 아버지! 이 못된 웬수를, 저 못된 녀석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아멘!”
그런데 이렇게 기도한다고 당장 사랑의 힘이 생겨나서 “I love you." 하고 그 원수를 껴안고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사는 것이 그리 고달프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한 마디 기도 속에 바로 원수 사랑이 째깍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버-얼써 천국이 되었을 겁니다. 고로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다른 시각으로 풀어보아야 합니다.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풀어야 할까요? ‘로미오와 줄리엣’ 혹은 ‘러브 스토리’ 같은 사랑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애틋한 사랑을 다시 배워야 할까요? 아니면 ‘벤허’나 ‘사랑의 원자탄’ 같은 기독교 영화나 성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힘을 얻어야 할까요? 아-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은 것은 ‘새롭게 하소서’ 같은 간증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그렇게 원수 사랑을 실천하신 분들의 간증이 종종 나옵니다. 거기서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원수 사랑에 대한 다짐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증을 하시는 분들의 공통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을 만났더니, 성령을 받았더니, 은혜를 받았더니, 그 분의 음성을 들었더니 갑자기 세상이 달라져 보이고, 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평안과 행복과 사랑을 느끼고 체험했다는 겁니다. 저도 이런 체험이 있습니다. 25살 때 군대를 제대한 후에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금식 기도를 하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하늘을 보고 수목을 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하늘의 떠다니는 구름이 나를 향해 말을 합니다. “할렐루야! 나도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수목을 보니 나뭇잎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할렐루야! 나도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니 나를 향해 모두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할렐루야! 나도 너를 사랑한다.” “와- 모두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그래, 나도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할렐루야!” 그 후로 제가 좀 실수를 했습니다. 길에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들을 아무나 껴안고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할렐루야!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잖아요. 지나가는 그 사람이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나는 무뚝뚝하게 모른 척 할 수는 없잖아요. 나도 반갑게 인사하면서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 이상합니다. 그 사람들이 뒤로 움찔거리며 저를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더구나 젊은 자매님들에게 그러면 어떤 반응이 나왔겠습니까? “아- 이 사람이 왜 이래요. 저리 가요.” 하고 난감한 표정을 짓거나, 좀 무서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현실과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이 많이 다르구나! 저 사람은 지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구나. 근데 왜 나는 그렇게 느꼈지?”
그러면서 그 후부터 좀 절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 은혜를 받고 나서 마음속에 큰 기쁨과 사랑의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왜 이렇게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거지?“ 알고 보니 성경에 이에 대한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즉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고 내가 바뀐 것입니다. 내가 바뀌니까 세상도 달리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심령이 새롭게 바뀌니까 내 표정도, 내 음성도, 내 말도 자연스럽게 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일단 내가 순수하게 남을 사랑하게 되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잖아요.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데 뭐가 불안하고, 뭐가 거리끼고, 뭐가 두렵겠습니까? 이에 대해 요한일서 4:18에도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러분, 강아지를 좋아하면 강아지를 가까이 합니다. 자연을 좋아하면 자연을 가까이 합니다. 주님을 좋아하면 교회를 가까이 합니다. 그러나 뭔가를 싫어하면 그것을 멀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색하고 거리낍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교회 오는 것이 거리끼고, 예배드리는 것이 어색하고, 목사님 보는 것이 좀 무서운 분이 있습니까?
주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가슴 벅찬 그 사랑을 느끼게 되면 갑자기 교회를 오고 싶어집니다. 찬양하고 싶고, 기도하고 싶고, 봉사하고 싶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 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아8:6)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 당해주셨습니다. 하나님도 독생자를 죽음 가운데 내어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름 아닌 사랑 때문입니다.
본문 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진짜 사랑, 순수한 사랑, 흠 없고 티 없는 완전한 사랑은 여기 있습니다. 바로 너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변치 않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와 내가 그 귀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그 크신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ㅏ 뭘까요? 다름 아닌 우리가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2:15)
여러분,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의 힘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고로 우리가 원수조차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일단 내가 그 분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반사시켜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사랑의 본체가 아닙니다. 단지 반사체에 불과합니다.
고로 인간은 오늘 사랑하다가도 내일 배신하고 미워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본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너와 나를 사랑합니다. 내가 먼저 그 분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도 그 분을 사랑하는 겁니다. 요한일서 4:1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오늘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꾸어야 합니다. 그 작은 시작이 바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의 본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사랑의 본체가 되시는 그분으로부터 사랑을 흠뻑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로 오늘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주여- 저에게도 그 큰 사랑을 느끼게 해주세요. 그래서 나도 그 사람을 억지가 아닌 아주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래서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멘!”
같이 한 번 따라 해봅시다. “그래, 나도 너를 사랑한다.”(×2)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였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1) 아멘!
기도 : 하나님, 우리도 사랑하고 싶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힘듭니다. 사랑의 본체가 되시는 주님,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좀 주십시오. 그래서 이 외국 땅에서도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매일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의 음성을 순간순간마다 듣게 하시고,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