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는 것이 은혜다.

날짜: 
2024/03/02
말씀: 
시49:20
말씀구절: 

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설교: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자와 나귀와 여우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들은 많은 먹이를 사냥하여 셋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먼저 나귀가 제안했습니다. “이 사냥감은 우리 셋이서 잡은 것이니 똑같이 세 등분하자.” 그 소리를 듣고 사자가 매우 화가 나서 나귀를 꽉- 물어 죽였습니다.

그리고 사자가 여우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냥감을 어떻게 나눌까?” 그러자 여우가 9대 1로 나누자고 제안했습니다. 사자가 9이고, 여우인 자신은 1이라는 겁니다. 이에 사자는 여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여우야, 너는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우가 대답합니다. “바로 전에 나귀가 죽는 것을 보고 즉시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깨닫는 것이 은혜고, 깨닫는 것이 생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많이 보고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한번 보고 들으면 즉시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몇 대 매를 맞아야만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중요한 것을 잃고 난 다음에야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옥 문 앞에 가서야 비로소 “아차, 이게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고 후회할 겁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누구지요? 애급의 바로 왕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절대 왕이다 보니 자기가 가장 잘나고 똑똑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딱딱해지고 강퍅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에서 놓아주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지만 깨닫지 못하다보니 전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 열 가지 재앙을 두드려 맞았습니다. 나라가 초토화 되었습니다. 자기의 장자를 비롯해 애급의 모든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깨닫지 못하고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군대를 이끌고 용감하게 홍해까지 달려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물에 수장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인간으로서 보편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들을 대체로 잘 깨닫는 편입니까? 아니면 그런 보편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이 둔한 편입니까? 만약 그런 보편적인 깨달음이 매우 둔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식이 없다, 경우가 없다. 전혀 통하지 않는다. 같이 일하지 못하겠다. 못 말린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사람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씀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물론 사람들은 각자의 깨닫는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잘 깨닫고, 어떤 사람은 저것을 잘 깨닫습니다. 여성은 대체적으로 감성적인 것을 잘 깨닫고, 남성은 대체로 이성적인 것을 잘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운동과 예술 분야에 잘 깨닫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학문의 분야에 잘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떤 쪽에 잘 깨닫습니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아하’ 하고 깨닫는 체험을 누구나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뇌 과학에서는 이런 순간을 ‘아하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순간 내 머릿속에 전구불이 번쩍 켜지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하아 체험’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을 보면 말씀을 들을 때에 ‘아하, 그렇구나!’ 하고 잘 깨닫는 사람입니다.

물론 타종교인 불교(엄격히 말하면 불교는 철학)에서도 깨달음을 중요시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깨달음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깨달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불교나 기독교 모두 깨달음을 말하지만, 불교는 인간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자력 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 종교 즉 은혜의 종교입니다. 즉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비로소 깨닫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성도로서의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 갈망합니다. 특히 성령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적인 깨달음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단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깨달음이 있는지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체크해 봅시다.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분명히 깨닫고 믿습니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을 확실히 깨닫고 믿습니까?” 모두들 아멘 하시는데 아니 그걸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즉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깨닫고 믿는 은혜를 주셨다는 겁니다. 또한 이런 깨달음이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냥 무덤덤해집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감사와 감격과 활력이 없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이 없으면 자연히 신앙생활의 흥미를 잃고, 믿음이 후퇴하고 맙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3년간 그토록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였지만 그들은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높아지려고만 했습니다.

즉 깨달으면 겸손해지고, 깨달음이 바른 신앙인의 토대가 됩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삶에 소망이 되고 감격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아도 그 말씀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 가운데 즐거워하며, 날마다 감사하며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깨달아져야만 주님을 위해 바르게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깨달음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으면서 “아- 성경에는 깨달음에 대해 강조하는 구절이 상당히 많이 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이에 대해 몇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말씀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도다.”(롬3:10-11) “너희가 백발이 얼룩얼룩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호7: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9)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호4:14)

특히 악인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과 악에 대한 깨닫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용감하고 무식하게 죄와 악을 계속 짓고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9)

예수님도 제자들이 잘 깨닫지 못하자 너무 답답해하시면서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8:43)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치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마16:9-11)

심지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자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18:34)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깨닫지 못하던 제자들이 나중에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12:16)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을 비롯해 저와 여러분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결국 전도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도 못하고, 실천도 못하게 되니까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그게 뭐지요? 다름 아닌 진리의 성령님을 각자의 마음속에 보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시요. 깨닫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고로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오시면 무엇이 옳은지 틀린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인지를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2-13)

다시 말해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면 마치 장님이 눈을 뜨게 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는 것처럼 진리에 대하여 바르게 깨닫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고로 성령님이 오시면 이런 깨달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셨구나!” “아하, 하나님은 바로 나의 친아버지가 되시는구나!” “아하,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이구나!”

이렇게 깨달음이 오니 그 사람은 자연히 교회에서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됩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 교만의 영에 사로잡히면 깨달음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옳은 것을 틀리다고 하고,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며,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리는 길로 용감하게 나아가게 되고 맙니다. 그러고도 자신은 옳다고 계속 착각을 합니다.

즉 어떻게 깨닫느냐에 따라 우리의 장래가 결정이 되고 맙니다. 만약 당신에게 바르게 깨닫게 해주는 성령님이 있다면 당신의 행위도 바르게 될 것이요, 그 결과는 당연히 하나님의 칭찬과 보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으면 그 행위가 자신이 보기에 바른 것 같으나 실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이요, 그 행위에 대한 쓰디쓴 열매를 결국 자신이 먹고 말 것입니다.

고로 보다 나은 장래를 원한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저에게 바르게 깨닫는 영을 주시옵소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12:10)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여러분,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인간의 지식, 인간의 지혜, 인간의 아이큐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아가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됩니다.

고로 우리는 오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욥34:32) “주여,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여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119:34) “나는 주의 종이오니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를 알게 하소서.”(시119:125)

결론입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다행히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주어졌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깨달음도 성령님을 통해, 또한 그 분의 말씀을 통해 날마다 얻고 있습니다. 고로 우리들의 장래는 희망입니다.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 속에 즐거워하며, 그분의 은혜에 날마다 순간순간마다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바른 깨달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또한 보내주신 성령님을 통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직도 깨달음이 부족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계속 가르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