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나만큼 나를 아는 사람은 없어.”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챙겨야지!” 여러분, 이게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전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아시는 분이 있고,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있고, 나보다 더 나를 위해 일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 알아봄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주님은 나보다 더 나를 아시는 분입니다.
베드로는 자신 있게 소리쳤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저는 결단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말씀합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아니, 베드로 본인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데, 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자신을 부인하겠다고 합니까? 전혀 예수님답지 않게 왜 그렇게 부정적이고 재수 없는 말을 하는 겁니까? 왜 자신의 수제자 베드로를 믿지 못하는 겁니까? 그러나 결국 베드로는 자신이 살기 위해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욕을 섞어가며, 저주까지 하며, 아주 매몰차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순간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 이게 뭡니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베드로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습니다. 너무나도 창피하고 부끄럽습니다. “내가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라니! 내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다니!” 참으로 실망입니다. 자존심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 나타나 “야- 임마! 니가 나에게 그걸 수 있느냐? 니가 내 수제자가 맞느냐?”라고 따지며 묻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누구보다 베드로를 잘 아셨습니다. 베드로 자신보다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더 잘 아셨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그것은 베드로의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누구보다 더 많이 자신을 사랑한 것을 아셨습니다. 며칠 전에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지만, 그 실수는 인간이기에 갑자기 닥친 두려운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난 나약한 인간 베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연약한 그 모습을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나약하다고, 비겁하다고, 못돼먹었다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비겁함에도 불구하고, 그 진심을 보시고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받아주시고,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수제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명도 주셨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내 사정과 형편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있습니다. 내 마음의 상태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있습니다.
2. 주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은 미워해도 자기 자신만큼은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미워하면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희망마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말세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겁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장 우선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은 죽어도 좋다는 겁니다. 삐뚤어진 사랑입니다. 아니, 이건 사랑이 아니라 극한 이기주의입니다. 사이코패스 마인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기 자신이 싫고, 자기 자신이 미울 때가 있습니다. 한 아이가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사고를 쳤습니다.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그 아이는 너무도 풀이 죽어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실패자야. 나는 못난이야. 엄마 아빠도 크게 실망하겠지.” 그리고 그는 자기의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문을 열자 부모는 말합니다. “밥은 먹었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래도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란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했다고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남들보다 더 잘나고, 남들보다 더 가지고, 남들보다 더 배웠다고 우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가 못날수록, 약할수록, 곤경에 처할수록 우리를 더 가까이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싫어서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가 먼 외국 땅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냈습니다. 창기와 더불어 세상 쾌락에 빠져 살면서 그 많은 돈을 다 탕진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큰 기근이 오자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마침내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음식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완전 상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아들은 생각합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들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는구나. 차라리 여기서 굶어 죽는 것보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 이제는 아버지가 나를 아들로 보지도 않겠지.”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나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짠-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입을 맞춥니다. 아들은 변명도 아직 다 못 끝냈는데,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껴안고 있습니다. 아들은 이제 종이라도 되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끝까지 아들로 대하고 사랑해주셨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제는 나도 나를 포기했다”라는 마음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혹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고 힘들어 “그래, 나는 이 정도밖에 못 되는 사람이야.”하고 자포자기하며 인생의 희망을 내려놓은 분이 있습니까? 이때 잊지 마십시오. 당신을 껴안기 위해 주님은 부지런히 달려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요10:11)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분입니다. 내가 죽을 자리에 “너 대신 내가 죽겠다.” 하시며 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착하고 잘나고 가졌다고 내 대신 죽으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 우리가 아직 교회에도 오지 않았을 때에, 그분은 나를 위해 이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3. 주님은 나보다 더 나를 위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합한 사람인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늘 찬양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지냈던 다윗도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니, 이건 실수가 아니라 너무나도 흉악한 범죄행위입니다. 왕의 직분을 이용해 남의 아내, 그것도 자신을 위해 전쟁터에 나간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건드렸습니다. 참으로 더럽고 치사한 녀석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자기의 범죄행위를 덮으려고 잔꾀를 부렸습니다. 충신 우리야를 전쟁터에 급히 불러내어 아내와 동침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충신 우리야는 지금도 전쟁터에서 고생하고 있는 전우들을 생각하며 아내가 있는 편안한 자기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아- 참으로 훌륭한 충신입니다.
그런 충신을 다윗은 전쟁터에 다시 보내 적의 화살에 맞아 죽도록 방임했습니다. 아- 참 못됐습니다. 질이 매우 안 좋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의도적인 1급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그대로 두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고 맙니다.
그를 그대로 두면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격을 완전히 잃고 맙니다. 고로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를 크게 징계하고 벌을 내리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일하시는 것 중에 징계도 포함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드디어 다윗의 가장 잘생긴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노년에 왕궁을 버리고 허겁지겁 맨발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집안에 간음 사건이 일어나고, 심지어 자신의 후궁들이 아들 압살롬에게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들들 간에 살인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그 옛날 자신이 저지른 죄와 똑같은 일들이 자기에게 일어나므로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습니다. 다윗이 왕이고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더욱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다윗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징계하시므로 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마치 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의사가 수술칼을 들듯이 하나님은 다윗을 수술하셨습니다.
물론 수술의 고통이 따릅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나고, 긴 회복 기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수술을 계획하시고 집행하면서 다윗이 심히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하나님의 마음도 매우 아픕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큰 수술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렇게 고통의 수술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가자 상처는 아물었습니다. 징계가 당시에는 큰 아픔이었지만 다윗은 그 징계로 인해 철저히 회개하며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의로워졌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남은 인생을 더욱 의롭게 살다가 평안히 하나님께로 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고백 중에 이런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자기 양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시는 분입니다.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범죄로 인해 고통의 지옥에서 영원히 몸부림치고 괴로워할까 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 대신 저주를 받아 죽으시고, 나 대신 음부에 들어가시고, 그곳 음부에서 마침내 승리를 외치며 부활하셨습니다. 고로 너와 내가 살았습니다. 2000년 전 그분의 그 희생으로 너와 내가 드디어 구원받았습니다. 아- 이건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할 일입니다. 벌레만도 못한 나를 어찌 아시고, 그 모습 그대로 그렇게 사랑하시는 겁니까? 오- 주님! 어찌 원수인 나를 위해 귀하신 당신이 죽으실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토록 큰 사랑, 이토록 큰 희생을 해주신 분을 우리가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분을 위해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그분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고,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고, 나보다 더 나를 위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 내 옆에, 내 안에 있기에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나를 버릴지라도 그분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고로 그분만이 나의 구세주입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도 평생토록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보람되고 희망찬 인생을 계속 이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주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주 많이 고맙습니다. 계속 주님을 모시고 살겠습니다. 평생토록 저희와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과 순간순간마다 대화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