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7:20-21 나의 행복은 어디에 ?
하루는 요술쟁이들이 행복의 비밀을 인간으로부터 없애기로 결정하고 어디에 행복의 비밀을 숨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지혜 있는 한 요술쟁이가 "땅속 깊이 행복의 비밀을 묻어 두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대표 요술쟁이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땅을 깊숙이 파 결국은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요술쟁이는 행복의 비밀을 바다 속 깊은 곳에 숨기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표 요술쟁이는 인간들은 물 속 깊은 곳까지라도 잠수하는 법을 배워 결국은 행복의 비밀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또 다른 요술쟁이는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행복의 비밀을 숨기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표 요술쟁이는 이번에도 안되겠다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기어코 가장 높은 산꼭대기까지라도 올라가 행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술쟁이들은 한숨을 내리쉬고 올려 쉬면서 인간이 발견할 수 없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고 한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대표 요술쟁이는 전혀 뜻밖의 장소를 제안합니다. "행복의 비밀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있다. 인간 마음속 깊이 숨기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리석게도 그들 마음 깊은 곳에서 행복의 비밀을 찾으려고 결코 시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전설 속에 들어있는 내용처럼 불행하게도 우리 대부분의 인생들은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독일의 시인 칼 붓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산 너머 언덕 너머 먼 하늘에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아, 나는 그것을 찾아 남 따라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 왔다네. 산 너머 언덕너머 더욱 더 멀리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여러분, 행복은 은행의 예금이나, 부동산이나, 높은 지위나, 부자의 품안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행복은 세상 쾌락에 있지 않습니다. 그 예로 바이론 경은 어느 누구보다도 쾌락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도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합니다. "벌레 같은 인생, 고민, 그리고 슬픔이 나를 외롭게 만든다."
또한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미국의 백만장자 제이 골드라는 사람은 죽을 때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바로 나일 것이다." 또한 행복은 지위와 명예에 있지 않습니다. 베콘스 필드경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젊었을 때는 실수 투성이었고 중년에는 투쟁뿐이었다. 이제 늙으니 후회뿐이다."
또한 행복은 군사적인 힘과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군대를 가지고 가장 넓은 땅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싸움에서 승리한 후 그의 막사에서 이렇게 말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는 더 이상 정복할 곳이 없다." 그러면 행복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 에이브라함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그리고 신라에 대중불교의 기초를 닦은 원효대사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 그는 불교를 더 공부하려고 당나라 유학의 길을 가는 도중에 산 속 토굴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밤중에 너무 목이 말라 어둠 속에서 물을 찾다가 바가지가 손에 잡혔고 그 속에 든 물을 마시니 감로수처럼 시원하고 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날이 밝은 다음에 보니 어젯밤, 바가지로 생각한 것은 오래된 해골이었고 그렇게 맛이 있었던 물은 그 속에 고인 더러운 물이었습니다. 원효대사는 여기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더러운 물을 어젯밤에는 그렇게도 맛있게 마셨는데 지금은 왜 구역질이 날까 ?" 결국 원효대사는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의 길을 접고 신라에 돌아와 대중불교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세상은 기쁨의 낙원도 되고, 괴로움의 지옥도 되는 것입니다. 즉 내 마음속에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습니다. 고로 오늘의 본문에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여러분,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지만, 현명한 자는 가까이서, 내 마음속에서 행복을 키웁니다. 벨기에의 극작가 마테를링크라 작가는 파랑새라는 아동극을 발표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 형제가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헤매고 다녔습니다. 여러 날을 고생고생하며 허기진 채로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그 어디에도 파랑새는 없었습니다.
이 형제는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와보니까 그렇게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집안에 있는 새장 속에 있었습니다. 즉 이 동화는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집안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속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내 곁에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이 행복을 찾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혹은 돈에서 그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고, 혹은 명예와 권세에서 그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고, 혹은 세상 쾌락에서 그 행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혹은 이곳 캐나다에 이민을 오면 행복해지는 줄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높은 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깊은 바다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땅 속에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내 교회, 내 가정, 내 옆, 내 안에 있습니다. 고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내 교회, 내 가정, 내 안, 내 곁을 가꾸면 행복의 파랑새는 언제나 내 안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옛날 어떤 신랑 신부가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시집 장가를 들었습니다. 갓 혼례를 올린 젊은 남녀가 처음으로 마주 앉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앞에 앉은 얌전한 신부를 바라보던 신랑은 심장이 멈출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처녀는 앞을 못 보는 맹인이었습니다. 당황한 신랑은 침묵을 지켰고 신부는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만 떨구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마음을 가다듬은 신랑은 조용하고도 차분하게 신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이보시오, 나는 지금껏 내 눈이 둘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몰랐소. 이렇게 당신과 혼례를 올리고 나니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는구려 ! 자, 여기 이쪽 눈은 나를 위한 눈이요, 다른 한쪽 눈은 그대를 위한 눈이오. 이 순간부터 나는 일생 동안 당신의 눈이 된 것을 행복해하며 살겠소 !”
여러분, 가정의 행복과 부부의 행복은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면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행 속에서도 그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와 받아들일 줄 아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외적으로 볼 때 도저히 행복할 것 같지 않은데 행복의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서도 불행의 눈물을 흘리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칸방 월세 방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방궁 같은 집에서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교훈집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가난한 농부가 랍비를 찾아와 하소연을 합니다. “랍비님, 저희 집은 비좁고 자식들은 많은데 아내는 이 세상에서 제일 지독하고 나쁜 악처입니다. 저는 날마다 좁은 집에서 불행을 느끼고 삽니다.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
그러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양을 집안에 들여놓고 키우시오." 며칠 후 농부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랍비님, 집안에 악처에 양까지 ! 이젠 정말 못 살겠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다시 농부에게 말합니다. “닭은 어디서 기르고 있소 ?” 그러자 농부가 대답합니다. “양 우리 뒤에 있는 닭장에서 기르고 있습니다.” 랍비가 다시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럼 오늘부터는 그 닭들도 집안에서 기르시오.”
농부는 그 다음날 당장 달려와서 랍비에게 말했습니다. “랍비님, 이젠 정말 세상 끝났습니다. 집안에 마누라에 양, 그리고 닭 20마리까지 아이고…” 랍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양과 닭을 모두 밖에 내놓도록 하시오.”다음날 농부는 기쁨과 행복에 찬 얼굴로 랍비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랍비님, 이제 우리 집이 궁전과 같이 넓습니다.”
여러분, 지금의 환경을 놓고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기도 하고, 또한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겨울이 좋다. 흰 눈을 볼 수도 있고, 사람을 강하고 진지하게 만들어주니 겨울이 좋다." 그리고 봄이오면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따뜻하니 봄은 봄대로 좋다." 그리고 여름, 가을에 대해서도 "초목이 우거지고 활기에 넘치는 여름은 또 그 나름대로 시원해서 좋다. 하지만 가을도 좋다. 가을은 우리들에게 겸손을 가르쳐주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 주니까 !"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춥고 게을러져서 싫다. 여름이 되면 덥고 땀이 나서 싫다. 가을이 되면 처량하고 허무해져서 싫다. 봄이 되면 꽃샘바람이 불고 노곤해서 싫다."하고 '싫다' '싫다' 소리를 연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겨울이면 "아, 어서 여름이 되었으면 !" 하고, 여름이 되면 "아, 어서 겨울이 되었으면 !" 하는 사람입니다. 즉 이런 사람은 어디에 갖다놓아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은 여건에 관계없이 항상 행복합니다. 일이 생기면 기회가 주어졌다고 좋아합니다. 고독하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좋아하고, 건강하면 일할 수 있다고 좋아하고, 병들면 조용히 기도할 수 있다고 좋아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순탄하면 만사를 형통케 해주심에 대하여 행복해하고, 역경에 처하면 자신을 단련시키고 정화시켜주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복음의 길이 열리면 하나님의 일을 하니 좋고, 다치고 고난 당하고 순교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옛날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시골집에 여성 한 분이 방문했습니다. 얼굴이 아주 예쁘고 옷을 곱게 차려 입은 화사한 모습의 여인이 집문 밖에 선 것을 보고 주인 남자가 물었습니다. "댁은 누구시지요 ?" 그러자 여성이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행복입니다." "저희 집에는 왜 오셨습니까 ?" "예, 저는 가는 곳마다 그 집에 행복을 전해주러 다닌답니다."
그 말을 듣고 시골집 주인은 너무나 기뻐서 "어서 들어오세요. 저희 집에는 행복이 많이 필요합니다." 하고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들어오는데 뒤에 따라 들어오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앞에 들어오는 여자와 정반대로 아주 추한 얼굴이었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고, 아주 음산한 표정의 얼굴이었습니다.
"댁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 하고 주인이 물었더니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여인이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불행입니다." "당신은 무슨 일로 왔소 ?" "나는 가는 곳마다 재앙을 뿌리고 비극을 심고 다닌답니다." 그러자 주인은 화를 벌컥 내면서 "썩 물러가시오." 하고 그 불행이란 여자를 내쫓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면서 주인에게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당신이 반겨서 맞아들인 행복이란 여성은 바로 우리 언니입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나는 항상 언니와 함께 다닌답니다. 나를 쫓아내면 우리 언니도 나와 함께 나가야합니다."
즉 사람들에는 원하는 행복만 따라오는 것이 아니고 원치 않는 불행도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불행만 바라보고 살면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행복을 바라보고 살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까 ? 오늘도 불행의 조건을 찾고 그 불행을 바라보고 한숨짓고 원망과 불평가운데 살고 있습니까 ? 아니면 행복의 조건을 찾고 그 행복을 음미하며 감사와 기쁨 가운데 살고 있습니까 ? 당신의 마음에 따라 오늘과 내일 그리고 미래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어집니다.
물론 이런 행복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 찾아오셔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행복의 마음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슬프고 낙심될 때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우리가 불안할 때 우리에게 평안를 주시고, 우리에게 두려움이 올 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우리에게 감사와 기쁨과 희열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주님을 내 안에 모시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아, 나는 지금 행복하다 !"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과연 행복하십니까 ? 행복하다면 도대체 그 행복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행복의 근원인 예수님이 계셔서 행복을 깨닫게 하고, 이 외국 땅에서도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행복은 어디에 ?
날짜:
2004/06/20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