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4:13-14
캐나다에서 이민 활하는 분들에게 “당신은 이민 활에 만족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과연 무슨 대답이 나올까요? 아마 이런 네 종류의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대단히 만족합니다” “대체로 만족하며 삽니다”“대체로 만족하지 못합니다”“전혀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여러분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혹 여러분 중에 "대단히 만족합니다“ 혹은 ”대체로 만족합니다“라는 대답을 한다면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만족하십니까?“
혹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까? “아, 아시다시피 여기는 공기도 좋고, 교통도 좋고, 쌀값, 고기값, 가스값도 싸고, 사람들고 친절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직업의 귀천도 없고, 과중한 업무나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으니 좋고, 의료보험도 100%되니까 좋고, 애들도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안 받고, 교육비도 적게 들어가고, 영어 배우니 좋지 않습니까? 고로 나는 이민 생활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대체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혹은 “전혀 만족하지 못합니다”라는 분들은 도대체 왜 만족하지 못합니까? 혹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까? “아, 아시다시피 여기는 인종이 틀리고, 문호가 틀리고, 언어가 틀리고, 법률도 틀리고, 음식도 틀리지 않습니까? 물가도 싸다고 하지만 가만히 따져 보십시오. 생활 필수품은 싸지만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동차와 자동차 수리비는 한국보다 훨씬 비싸지 않습니까? 그리고 직장을 잡는 것도 이민자에게 있어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집 렌트비도 무거운 짐이 되지 않습니까? 더구나 자녀들이 영어는 배울는지 몰라도 한국어를 잊어버려 나중에는 부모와 대화가 단절되고 자녀와 부모간에 사고 방식이 틀려 가정이 깨지지 않습니까? 고로 나는 이민 생활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예견하듯이 이민 생활에는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특히 이곳으로 이민오는 분들 중에 “내가 이곳에서 떼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오는 분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민 생활을 하는 분들 중 거의 대부분이 “가족 식구들 건강하고 밥 먹고 살 정도로 직장이나 비즈니스가 있거나 자녀들도 그럭저럭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으니 그런 대로 만족하고 삽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런 이유로 인해 그런 대로 만족하고 행복하다면 검소하고 소박할지는 몰라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여기 도시에서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다 보면 우리는 광활한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앨버타의 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넓은 땅이 있고, 풍부한 좋은 꼴도 있고, 사자나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잡혀 먹힐 위험도 없습니다. 더구나 한국의 소들처럼 힘들게 농사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앨버타 소들은 한국의 소들에 비해 너무나 팔자가 좋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앨버타 비프가 되어 나오는 죽음의 순간만 제외한다면 아마 크게 행복해 하고 만족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만족이 다만 의식주에 달려 있다면 앨버타의 소들과 우리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만족이 의식주에 달려 있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도대체 이곳 캐나다에 무엇 때문에 이민을 오는 것입니까? 옛날에는 한국에서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보다 잘 먹고, 보다 잘 입고, 보다 잘 살아 보려고 이곳으로 이민을 왔지만 지금은 의식주 문제 때문에 이곳으로 이민을 오는 분들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최근에 한국에서 이런 여론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을 많이 일하고, 많이 돈 벌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돈은 적게 벌더라도 가족들과 여유를 갖고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돈은 적게 벌더라도 좀 더 여유 있게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에게 캐나다는 아마 가장 좋은 이민 대상국이 될 것입니다. 즉 캐나다로 이민 오시는 분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돈을 많이 벌려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인생의 여유를 찾으려고 오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경우 가족들이 건강하고, 밥 먹고 살 정도 되고, 자녀들이 학교 잘 다니고, 어느 정도 가족들끼리 여가를 보낼 수 있다면 그것에 만족하십니까?” 물론 늘 자신의 환경과 처지를 불평하고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보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의 만족이 단지 의식주의 문제나 인생의 여유에 있다고 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크리스챤의 삶은 아닌 것 같습니다. 즉 크리스챤들은 동물들처럼 이 땅의 일로만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의 일, 즉 하나님의 일을 하며 만족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당시에 큰 핍박으로 인해 분명 의식주 생활에 있어서 우리보다 넉넉하지 못하였고 여유를 갖고 가족들끼리 취미 생활이나 여행을 하는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에게는 분명 행복이 없어야 했고, 만족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삶에 보람과 만족이 있었고, 진정한 행복도 있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복음을 전하면서 수 많은 핍박과 위험을 당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번 춥고, 헐벗고, 매를 맞고, 여러번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고후11:23-27) 더구나 복음 전파 때문에 가족들과 제대로 만나서 즐거운 시간도 보내지 못하였고 결혼도 못했고 자신의 뒤를 이어줄 자녀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에게 있어 도저히 기쁨과 행복과 만족은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에 분명히 큰 기쁨이 있었고 큰 만족이 있었습니다. 그는 배고플 때나 배부를 때나 어떠한 형편에든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빌4:11) 왜냐하면 그에게는 배고플 때나 배부를 때나 늘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기까지 그토록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 즉 복음을 증거하며 하늘 나라를 세우는 보람과 기쁨이 있었기에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만족하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즉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만족의 이유는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만족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만족이 아니라 보다 완전하고 보다 영원한 만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히13:18) 사도 바울이 어두운 옥에 갇혀도 예수님은 그와 함께 계셨고, 순교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그와 함께 계셨기에 그리고 죽음 후에도 예수님은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에게는 늘 기쁨과 행복이 있었고 만족이 있었습니다.
모세라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당시 최강대국인 애굽나라 공주의 아들로 자라났습니다. 그에게는 좋은 음식, 좋은 집이 있었고, 좋은 교육과 더불어 찬란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여유 있게 인생을 즐기며 살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히11:24-26)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모세의 만족이 의식주에 있었다면, 그리고 삶의 여유에 있었다면, 이 모든 것을 포기한 그의 삶은 분명 실패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인생이 실패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요, 가장 성공하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만족한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 캐나다에 올 때 단지 잘 먹고, 잘 살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려고 왔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행복하다. 나는 만족하다”고 말을 한다면 정녕 우리는 앨버타의 소들에 비해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으로 만족을 느끼며 사십니까?” 돈이 많으면 만족하고, 돈이 적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그러한 삶입니까? 아니면 골프채를 갖고 필드에 나가 이글이나 버디를 잡으면서 만족을 느끼며 사는 삶입니까? 아니면 인터넷이나 TV, 혹은 영화를 보면서 만족을 느끼며 사는 삶입니까? 아니면 가족들과 야외에 나가 앨버타 비프를 구워먹으며 만족을 느끼며 사는 삶입니까?
물론 매사에 불평하는 것보다 매사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앨버타 비프 텐더 로인(tender loin)을 구워 먹으며 불평해 하는 것보다 99센트 햄버거를 먹으며 만족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20불 짜리 비싼 영화를 보며 불평하는 것보다 2불 짜리 싸구려 영화를 보며 만족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앨버타 비프는 무엇이며, 좋은 영화는 무엇이며, 홀인원과 이글■ 버디는 무엇이며, 좋은 차와 좋은 집은 무엇입니까? 만약 이런 것들이 우리의 행복과 불행, 우리의 만족과 불만족을 좌우한다면 사도 바울과 모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요, 제대로 골프채 갖고 필드에 나가 보지도 못한 저 역시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진정한 크리스챤의 만족은 이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생이 되더라도, 오히려 궁핍에 처하더라도, 오히려 위험한 일을 만나더라도 주의 일을 하며 하늘 나라를 세우는데 그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환경을 버리고, 심지어 가족들도 버리고 고생을 마다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하늘나라를 세우는 꿈이 없다면, 그리고 이곳 캐나다에 와서도 하늘 나라를 세우는 기쁨과 만족이 없다면 우리들의 삶은 무미건조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이민 생활, 객지 생활, 유학 생활의 삶은 조금 고생이 되더라도 이러한 만족을 얻는데 참 행복을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만족하며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고, 우리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오직 이 땅의 것만 바라보고 거기에 만족을 느끼며 산다면 결국 실패와 불행이요,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거기에 만족을 느끼며 산다면 우리의 미래는 성공과 행복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여행을 하는 중 피곤하여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의 한 우물가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우물가에 물을 길러 다가오자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그러자 이 여인이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여인에게 말씀합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4:16) 이 말에 여인은 속으로 뜨끔하고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어찌하든지 인생의 만족을 얻어보기 위해 남편을 다섯 명이나 갈아치우고 지금은 남편도 아닌 남자와 살면서 인생의 만족을 느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남편을 갈아 치워보아도 참다운 인생의 만족을 느끼지 못해 목말라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 즉 참 만족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 여인에게 참 만족을 줄 수 있으며, 누가 이 이민생활에 지친 우리들에게 참 만족을 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4:13-16)
즉 우리가 세상적인 것만 추구하며 거기에서 만족을 얻어보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결코 참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기에 바쁘고 놀기에 바쁜 이민 생활, 객지 생활 속에서 자칫 예수님을 멀리하고 예수님을 떠나 딴 곳으로 만족을 얻어보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또 다시 목마르고, 지치고, 불행해지고 맙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도다”(전5:10)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신다면 우리에게는 참 기쁨이 있습니다. 참 행복이 있습니다. 참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도 여전히 사마리아 여인처럼 거짓된 만족을 쫓으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즉 참 만족을 얻으며 살고 있습니까? 당신과 제가 참 크리스챤이라면 그리고 크리스챤으로서 참 만족을 얻고 싶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참 만족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족케 하시는 분이시오, 그 분은 이 이국 땅에서도 좋은 것으로 우리를 만족케 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가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5)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