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말씀 : 마 5:4
여러분! 인생을 살아오면서 통곡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요즈음은 인간의 심령이 하도 메말라서 좀처럼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더구나 통곡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주위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감정이 메말라도 이런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통곡을 합니다.
즉 사랑하는 가족 식구가 죽었을 경우입니다. 더구나 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죽은 경우에는 거의 모든 부모들이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그 통곡소리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리요, 가장 뼈아픈 눈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러한 통곡의 눈물을 흘린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나인성으로 지나가시는데 사람들이 한 죽은 자의 관을 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죽은 자는 그 성에 사는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난 후 아들 하나 잘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갖은 고생을 하며 이제까지 살아왔는데, 그리고 이제는 그 아들이 장성하여 슬픈 추억을 잊고 보람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아들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관이 나가는 장례식 날, 그 아들의 관을 붙잡고 통곡을 합니다.
"아들아, 아들아, 내가 먼저 가야지 왜 니가 먼저 가느냐. 이 불효자식아! 이 에미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그러자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던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 불쌍한 과부를 향해 "여인아, 울지 말라!"하시고 그 관에 손을 대시며 말씀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4)
그러자 그 죽은 아들이 살아 일어나고 그 과부의 슬픔과 통곡은 변하여 큰 기쁨과 감사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후처인 하갈과 그녀의 아들인 이스마엘, 그리고 본처인 사라와 그녀의 아들인 이삭 사이에 맨날 가정불화가 나니까 아브라함이 고민하다가 결국 그 후처인 하갈과 이스마엘을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어깨에 메워주고 내어 보냅니다. 졸지에 집에서 쫓겨난 하갈이 어린 자녀를 데리고 이리저리 광야를 방황하다가 그만 물이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린 아들은 목이 말라 죽겠다고 사정없이 울어댑니다. 그러자 하갈이 자식이 목말라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조금 떨어져 방성대곡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말씀합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21:17-18)
그리고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하갈이 바로 옆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아들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할 수 있었습니다.
즉 통곡과 눈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였고, 그로 인해 사망과 슬픔은 철폐되고 생명과 기쁨이 다가왔고, 도저히 소망이 없었던 최악의 환경이 변하여 찬란한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0장에도 보면 유다 왕 히스기야의 통곡을 봅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거의 죽게 되자 이사야 선지자가 왕께 나아와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 20:1)
그러자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통곡을 하며 기도합니다.
"여화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서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왕하 20:3)
그러자 하나님이 다시 히스기야에게 말씀합니다.
"히스기야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게 삼일 만에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오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이 성을 보호하리라"(왕하 20:5-6)
또한 열왕기하 22장에 보면 유다왕 요시야의 통곡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율법책을 보니 유다 백성들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유다 땅을 저주하겠다는 말씀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하나님께 통곡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요시야야. 네가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로 평안히 묘실로 돌아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아니하리라"(왕하 22:19-20)
즉 통곡의 기도를 통하여 죽을 질병도 떠나가고, 나라의 재앙도 물러가고, 오히려 전화 위복의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여기서 '애통'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펜테오'라고 하는데 '슬퍼하며 통탄해 한다'는 강력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이나 죄에 대한 통탄함을 나타내는데 쓰여지는 말입니다. 즉 죄악의 세력이 하도 강하여 아무리 애써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수 없이 죄를 짓게 될 때 너무나 안타까워 슬픔을 표시하는데 쓰이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해도 도저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때 이를 안타까워하여 그 슬픔을 표시하는데 쓰이는 말이 '애통'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애통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의 심령, 상한 자의 심령을 결코 멸시치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도다"(시34:18)
그러므로 성경은 또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욜2:12)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약4:9)
자고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애통해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애통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용서와 위로를 받고 새힘을 얻고 나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26:31)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주를 버리지 아니하겠나이다"(마26:31)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말씀합니다.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26:34)
그러자 다시 베드로가 힘있게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 그런데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단순히 부인만 한 것이 아니라,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마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이 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을 하니라"(마26:75)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은 80냥에 팔고 나서 '하아, 내가 잘못했구나!'하고 후회만 했지 회개와 통곡이 뒤따르지 아니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살의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간인 이상 종종 실수를 합니다. 죄도 저지릅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실수가 아닌 다분히 고의적인 범죄였다면, 그래서 남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면 단순히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디 가지고는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습니다.
즉, 죄가 크면 클수록 보다 강력한 사과의 표현이 일어져야만 합니다. 즉 손을 모으고 허리와 목을 굽히고 공손한 태도로 '대단히 죄송합니다!'라는 표현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죄가 너무나 커서 상대방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큰 피해와 상처를 입었다면, 사과의 말로도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습니다.
즉 이런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통곡을 하며 회개를 해야지 단순히 '미안하다, 죄송하다'라는 말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고 근본적인 해결이 안됩니다.
분명히 가룟유다는 베드로보다 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베드로는 통곡을 하며 회개를 했지만, 가룟유다는 단순히 '후회한다'는 생각으로만 그치고 말았습니다.
즉 베드로는 통곡을 통하여 '내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므로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아이고 이 나쁜 놈. 베드로야! 너가 그럴 수가 있느냐?'하고 스스로의 죄를 미워하며 '주님, 죽을 죄를 졌나이다'하고 바른 태로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자신의 죄 때문에 갈기갈기 찢겨진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가 죄를 저질러서 자기 자존심만 상했다는 이기적인 태도만 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베드로와 가룟유다는 처음에는 똑같이 예수님의 제자로 출발했지만 그리고 똑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를 저질렀지만 끝에는 완전히 그 운명이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통곡을 한 베드로는 용서와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나 예수님의 수제자의 길을 갈수가 있었고, 통곡을 하지 못한 가룟유다는 스스로 지옥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당신의 죄와 무능함을 자각하며 통곡을 할줄 아는 용기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통곡을 잊어버린 비겁하고 메마른 심령의 소유자입니까?
오늘날의 시대는 통곡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애통해 해야할 때 애통해 하지 못하고 그저 적당주의로, 기회주의로 자기 이익과 자기 자존심만 챙기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런 태도로는 하나님의 위로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조그만 죄라 할지라도 애통해 할 수만 있다면, 당신도 역시 위대한 수제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가 항상 당신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애통해 하십시다.
때로는 통곡을 하시면서 하나님께 매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옛날의 신앙의 위인들의 통곡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나의 통곡의 기도 소리도 들으시므로 나와 내 가정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십시다.
하나님은 통곡하는 개인, 통곡하는 가정, 통곡하는 성도, 통곡하는 목사, 통곡하는 교회를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줍니다.
이러한 위로가 우리 모두의 위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