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신교 성경은 총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 39권과 신약성경 27권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성경의 순서를 다 외우고 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손들어 보실래요? 성경의 순서를 다 외우시는 분? 대단하십니다. 그걸 다 어떻게 외우고 기억하고 있습니까?
원래 머리가 좋아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철저한 수고와 노력의 결과입니까? 보통 그 순서를 외울 때 앞머리 글자만 따서 외우겠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한번 해볼까요? “창출레민신, 수삿룻, 삼상하, 왕상하, 대상하, 스느에, 욥시잠전아, 사렘애겔단, 호욜암, 옵욘미, 나합습, 학슥말” 이상 구약 39권이고요.
신약성경은 저의 경우 앞머리만 따서 외우지 않고 그냥 외웁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행 롬 고전후 갈 엡 빌 골 살전후 딤전후 딛 몬 히 약 베드로전후 요123 유 계” 이상 27권입니다. 제 나이가 만 63세인데 아직도 뇌가 잘 작동하고 있네요. 할렐루야! 그런데 구약성경을 나눌 때 크게 4가지로 나눕니다.
1. 모세오경(5권 : 창출레민신) : ‘율법서’라고도 합니다. 2. 역사서(12권 : 수삿룻 삼상하 왕상하 대상하) :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3. 시가서(5권 : 욥시잠전아) : 시적인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4. 예언서(17권 : 사렘애겔단, 호욜암, 옵욘미, 나합습, 학슥말) : 이중에 ‘사렘애겔단’ 5권을 기록한 사람을 ‘대선지자’라고 하고, 나머지 ‘호욜암, 옵욘미, 나합습, 학슥말‘ 12권을 기록한 사람을 ’소선지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선지자와 소선지자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한번 알아맞혀 보세요. 사지선다형입니다. 1. 대선지자는 키가 크고 체중이 많이 나가는 덩치가 좋은 사람이고, 소선지자는 키가 작고 체중이 적게 나가는 사람이다. 2. 이스라엘 왕에게 잘 보인 사람은 대선지자고, 이스라엘 왕에게 밉게 보인 사람은 소선지자다.
3. 예언한 책의 분량이 많으면 무조건 대선지자고, 예언한 책의 분량이 적으면 무조건 소선지자다. 4. 교회사적으로 볼 때 중요한 인물은 대선지자고, 덜 중요한 인물은 소선지자이다. 자- 여러분, 알아맞혀 보세요. 1번, 체격에 따라 대선지자와 소선지자가 나뉜다. 손들어 보세요.
2번, 이스라엘 왕에게 잘 보이면 대선지자고, 밉게 보이면 소선지자다. 자- 손들어보세요. 다음은 3번, 예언한 책의 분량이 많으면 무조건 대선지자고, 분량이 적으면 무조건 소선지자다. 손들어 보세요. 마지막 4번, 교회사적으로 볼 때 중요한 인물은 대선지자고, 덜 중요한 인물은 소선지자다. 손들어보세요.
정답은 뭡니까? 예- 3번입니다. 예언한 책의 분량이 많으면 무조건 대선지자고, 분량이 적으면 무조건 소선지자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좀 의아하지요? 저도 처음에 이것을 알았을 때 “어- 진짜 그런 거야?” 하고 좀 의아해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많은 분량의 예언서를 쓴 분이 누군가 봤더니 단연코 이사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총 66장의 예언서를 작성했으니 이런 기준으로 하면 이사야가 가장 큰 대선지자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인용한 신약성경을 보니 총 398번입니다. 이중 시편이 99번으로 가장 많이 인용이 되었고, 그 다음으로 이사야서가 80번으로 많이 인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사야서를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인용한 이사야서 중에 잘 알려진 구절은 이겁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6-18, 사61:1-2)
그리고 신약성경에 인용된 이사야서 중에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구절은 이겁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은즉 이를 번역하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사7:14) 특히 이사야서 53장은 예수님의 고난을 바로 옆에서 본 것 같이 너무도 생생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이사야 53:5절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의 4명의 왕인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가 있을 때 약 60년간(BC739-BC680) 예언 사역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인 ‘이사야’의 뜻은 ‘주께서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 가장 많은 예언을 남기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복음의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관하여 그 어떤 구약의 책보다 훨씬 많은 예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리켜 또한 ‘희망의 선지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그는 희망의 예언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희망의 메시지를 읽으면 정말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특히 제가 올해 1월 1일 신년 첫 주일에 설교한 본문도 이사야 60장에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바탕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본문 기억하시고 있나요. 한번 다시 들어보십시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저는 이 본문을 바탕으로 그때 “당신의 전성기는?“이라는 제목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본문 다음에 있는 구절들을 저 혼자 읽으면서 더욱 큰 희망과 함께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근데 제가 혼자 읽은 그 나머지 구절들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하고 싶지만 이 구절들은 아직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기에는 좀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더욱 희망을 가지고 싶고, 저처럼 더욱 기분이 좋아지고 싶으면 이 나머지 구절들도 혼자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인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말씀을 읽고 난 후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고 선포하셨습니다.
즉 성경의 말씀은 사람에 따라서 응하는 말씀이 있고, 응하지 않는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암튼 여러분들 중에 가슴 벅찬 희망을 찾고 싶으면 이사야서를 보십시오. 저의 경우는 오늘 본문인 이사야 60:22에 눈이 가고 필이 꽂혔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통해 희망을 가져봅니다. 같이 한번 볼까요?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어때요? 이 말씀을 보면 목사님들이 희망을 갖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특히 저의 교회의 경우 이제 COVID-19을 벗어나 “으샤으샤! 전도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가 되고 있습니다. 근데 지금은 주일 출석인원이 120-130명 수준입니다. 물론 재적인원은 훨씬 많습니다. 제가 지금 이름을 적고 기도하고 있는 분들은 총 425명입니다. 근데 그 인원이 본문처럼 천 명이 되면 어떨까요? 아- 기도하기 힘드니까 천 명까지 오지는 말라고 할까요?
아- 그건 아니잖아요. 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천명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천명을 보내주면 좋겠습니다.” 하여간 이사야서를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다름 아닌 희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은 이렇게 이사야서 60장 중에 한 구절만 뽑아서 같이 희망을 나누고 있지만, 여러분들 중에 나머지 구절들도 읽어보실 분은 읽어보십시오. 더욱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희망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희망은 인간에게 의지를 심어주고, 용기를 키워주며, 불행을 치료합니다. 희망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이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때는 어려울 때가 아니라 희망이 없을 때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어떠한 큰 고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아주 망하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서 60장이 예언한 것처럼 나라가 회복되고, 기쁨으로 다시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방의 재물과 풍부도 따라오고, 그들의 슬픔이 큰 기쁨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햇수가 70년이 차면 그리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가 있었기에 고달픈 이방의 포로생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대장에 의해 또다시 이스라엘 나라가 망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로 팔리고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유대인이라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히틀러에게는 유대인들이 600만 명이나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1900년 만에 다시 나라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요? 다름 아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이란 히브리어로 ‘티그마’라고 합니다. 이는 ‘끈’ 혹은 ‘밧줄’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그 성에 있던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피신시켜 주고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난 후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성에 들어올 때에 너는 붉은 줄을 이 창문에 매달고 네 부모와 형제 가족들을 네 집에 모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수2:18)
여러분, 이 붉은 줄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생명을 살려주기로 약속한 표시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 붉은 줄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이 줄이 바로 히브리어로 희망을 뜻하는 ‘티그마’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란 우리가 사는 밧줄입니다. 이 희망의 밧줄이 있어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저와 여러분이 영생하는 생명의 밧줄이요, 희망의 밧줄입니다.
결론입니다. 이사야가 성경의 예언으로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같이 저와 여러분들도 희망을 전달해주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 나도 기분이 좋아지고, 나와 만나는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지면 좋겠습니다. 이사야가 외친 희망이 너와 나의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희망의 밧줄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 외국 땅에서도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을 계속 성취해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