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제가 지금까지 37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12년, 여기 캘거리에서 25년입니다. 목회를 제법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경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제 설교 스타일도 좀 변했습니다. 이전에 성경 지식을 하나만 알았을 때에는 그 하나에 관련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의 여러 지식을 접하고, 인생의 경험도 쌓이면서 좀 더 다양한 각도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즉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반드시 정반합의 논리로 설교하는 스타일로 변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기도하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반면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그리고 성경에는 기도할 때 ‘부르짖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반면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6:6)
특히 제가 요한 계시록이나 종말론에 대해 가르칠 때에는 여러 각도, 여러 학설을 비교하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부터 여러 교단의 여러 목사님들이 각기 다른 학설을 바탕으로 종말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님들이 이에 대해 어느 한 가지만 알고 있다가 다른 것을 접하게 되면 굉장히 당황스럽고, 혼란이 오고, 의심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좀 복잡하게 생각이 들지만 이 역시 정반합의 논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도 보십시오. “중용이냐? 회색지대냐?” 한국의 역사를 보면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약 1,000년 동안 불교 사상이 지배를 했습니다. 그러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억불숭유정책’을 폈습니다. 즉 불교는 억제하고 유교를 숭배한다는 겁니다.
그 당시 유교의 핵심인 책 일곱 개가 있었는데 이를 ‘사서삼경’이라고 합니다. ‘사서’란 ‘논어, 맹자, 대학, 중용’ 4개의 책을 말합니다. 그리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 3개의 책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부터 사서 중 하나인 ‘중용’은 굉장히 중요한 유교 사상으로 한국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용’이란 뭐든지 지나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과잉도 아니고 결핍도 아닙니다. 딱 중간입니다. 감정표현의 경우도 더워도 덥다고 말하면 양반이 못됩니다. 추워도 춥다고 말하면 양반이 못됩니다. 좋아도 좋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나빠도 나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양반은 항상 중용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쌍놈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참 답답한 면이 있습니다. Yes도 아니고 No도 아니고 도대체 뭐야? 아- 중용이라니까요. 그런데 ‘중용’이란 의미를 좀 나쁘게 말하면 ‘회색지대’입니다. 까맣지도 않고, 하얗지도 않습니다. 그 중간입니다. Yes도 아니고 No도 아니고, 그냥 ‘흠-’입니다.
이를 좀 더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입니다. 그런데 ‘기회주의자’를 좋게 말하면 ‘합리주의자’요 ‘실용주의자’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바라볼 때 시각에 따라, 영어로 표현하면 point of view에 따라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마라.“(신5:32-33)는 말씀이 구약성경에 총 8번이 나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 성경을 근거로 ”신앙인은 ‘중용’을 지켜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와 반대의 구절도 있습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또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11:23) 그러니까 중간은 없고, Yes인지 No인지 입장 표명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 이런 구절을 바탕으로 어느 목사님이 “신앙인은 회색지대에 있으면 안 된다.”고 설교합니다.
특히 19세기 영국의 침례교 목사님 중에 ‘설교의 황태자’라고 불리던 ‘찰스 스펄전’이란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회색지대에서 어슬렁거리는 자여! 지금 즉시 그 위험한 자리를 떠나 하나님 편에 서라.” “어느 민족 누가 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건가...♫”(찬송가 586장)
즉 둘 중에 하나를 반드시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중간은 없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성경 구절을 찾으면 많습니다. 십계명 중에 제 1계명이 바로 이겁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출20:3) 아니 왜요? 왜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만 섬기라고 하는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하나님입니까?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그 이유를 좀 압시다.
여러분,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바로 이겁니다.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출20:5)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가 결혼한 부부관계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 분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바람이 나면 남편이 기분이 좋겠습니까? 질투로 인해 마음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잘 모릅니까? 여태까지 질투의 감정을 느껴보신 적이 없나요? 아가서 8:6에 보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음부같이 잔인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온라인 동영상에 보면 남편과 아내가 결혼을 했는데 한쪽이 바람을 펴서 그 현장을 배우자에게 들킨 장면이 나옵니다.
그 모습을 본 배우자가 눈이 뒤집어집니다. 질투와 배신감으로 인해 상대방을 죽어라고 두들겨 팹니다. “아이고 나 죽어! 사람 살려!” 사실 여러분, 사랑이 크면 클수록 질투도 배신감도 더 심하게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큰 사랑을 싹- 무시하고 배신하면 하나님은 질투의 감정을 크게 느낍니다. 고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상을 섬기거나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됩니다.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면 안 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하면 하나님이 매우 화가 납니다. 크게 질투합니다.(고전10:21-22)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시선을 두지 않고 세상에 한 눈을 팔면 안 됩니다. 특히 돈에 마음이 빼앗기면 안 됩니다. 본문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해보십시오. 100억(10 million dollars)을 가질래? 하나님을 믿을래? “아- 저는 하나님도 믿고 100억도 가지겠습니다. 둘 다 주십시오.” “아- 이 바보야!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니까?” “주여-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에이- 그게 뭐가 시험에 드는 일이야?”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면 돈이 다 없어지고, 거지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거나, 돈의 노예가 되어 돈에 끌려 다니지 말라는 겁니다. ‘양다리 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쪽 발은 주님께 놓고, 다른 한 쪽 발은 세상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중용을 지키는 좋은 신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회색주의자 신자라고 말합니다. 저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꽤 오랫동안 회색주의자 신자였습니다. 양다리 신자였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여전히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각종 세상 쾌락에 빠졌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분들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처음부터 그렇게 열심히 믿지는 못했을 겁니다. 저처럼 한동안 회색지대에 머물렀을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투철한 신자가 되었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것을 보고 ‘광신자(fanatic)'라고 말을 합니다. 중용을 지키며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게 적당히 믿는 것은 별로 우리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기왕 믿을 것 누구보다 열심히 믿고 싶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일등으로 잘 믿고 싶습니다. 그게 순복음 신앙입니다. 순복음의 특징은 ‘열심’입니다.
요즘 ‘종교 다원주의’ 혹은 ‘종교 통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의 하나님, 이슬람의 하나님, 힌두교의 하나님, 각종 종교의 하나님, 민속 신앙의 하나님, 다 좋다는 겁니다. 너가 믿는 하나님도 신이고, 내가 믿는 하나님도 신이고, 서로 인정하면서 종교를 통합하자는 겁니다.
어찌 보면 참 좋은 말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흑백논리로 따지거나 비판하지 말고, 서로 포용하고, 서로 타협하고, 서로 상생하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겁니다. 아- 뭐 서로 사랑하며 지내는 것, 참 좋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종교가 통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100% 진리가 사이비 진리와 믹스가 되면 더 이상 100% 순수한 진리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의 진리에 바탕을 둔 저와 여러분들의 순수한 신앙이 무너지게 됩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차별 금지법’도 그런 경우입니다. 서로 차별하면 안 된다. 아- 그래야지요. 백인 흑인 황인 서로 차별하면 안 됩니다. 기분이 나쁩니다.
그렇다고 큰 죄를 저지르고 여전히 그 죄를 반성하지 않는 매우 위험한 사람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게 해서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면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즉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은 좋지만 구별까지 못하게 해서 피해자가 생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역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입장을 바꿔서 생각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의 차별 금지법은 그 법을 빙자해서 죄와 악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므로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고, 진리가 훼손되고, 도덕이 땅에 떨어지게 하고, 결국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하는 위험이 뻔히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법을 결사반대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공공장소에 남녀 화장실이 따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심심치 않게 나오는 뉴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분명 신체적으로 남성인데 스스로 자기는 여성이라고 말하면서 여자 화장실을 들어가는 겁니다. 이에 대해 여성 여러분,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 이 미친 새끼야! 당장 여기서 나가지 못해.”라고 말하면 당신은 차별금지법에 저촉이 되어 징역살이를 하거나 큰 벌금을 물게 됩니다. 즉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방치하면 결국 너와 내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는 겁니다. 역차별을 받게 되는 겁니다.
2021년 LA 코리아타운 찜질방 사건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저도 LA에 여동생이 살기 때문에 10년 전쯤에 그곳에 방문해서 그 사건이 난 찜질방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임이 분명한 한 고객이 자신을 여성이라고 말하며 여탕에 출입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그 종업원이 ‘차별금지법’ 때문에 그 고객을 여탕에 들어가도록 허락하고 방치했습니다. 그렇게 벌거벗고 들어온 남성의 모습을 보고 여탕에 있었던 여성분들이 기겁을 하며 난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 인터넷을 타고 확산이 되면서 전국적인 이슈로 번졌습니다. 나중에 경찰이 그 사건을 수사해보니 그렇게 여탕에 들어간 인물이 과거 성범죄자였습니다. 참 기가 막힙니다. 아니, 이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런 뉴스도 있습니다. 한 격투기 남성이 자기는 여성이라고 말하며 여성 격투기 시합에 출전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대방 여성은 너무나 처참하게 얻어터져 두개골도 깨어지고, 온 몸이 큰 부상을 당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 사진을 보고 기막 막혔습닏. 아- 이게 뭡니까?
자- 오늘의 결론을 내려 봅시다. 때로는 중용을 지키고 통합을 할 때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중용이 더 큰 죄를 방치하는 범죄의 회색지대로 쓰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흑백논리로 서로 비난만 하다가 자칫 화합과 사랑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 모두에게 좋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들의 마음이 선악간에 서로 일치가 되어서 보다 행복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