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날짜: 
2015/12/06
말씀: 
행26:8-15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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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요? 나름대로 생각을 하시겠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이 가장 좋은 방법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족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도 역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늘 이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죄 많은 인간인 고로 언제든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회개하는데 가장 빠르게 하옵소서.”
그래서 개인 기도를 하거나 공중 대표 기도를 하거나 할 때 회개 기도를 항상 빼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잘못 혹은 공동의 잘못을 깨닫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진정한 회개가 가능합니다. 그렇게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사람은 언제든지 회개하며 다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좋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이 은혜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깨닫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면 이 세상에는 멸망을 당할 사람도, 지옥에 떨어질 사람도 하나도 없습니다. 즉 망하는 사람은 결국 깨닫지 못하여 회개를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다행하게도 깨닫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어떤 깨달음입니까?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이런 저런 잘못을 제가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고 저도 마음이 안 좋습니다. 회개합니다. 저의 잘못을 돌이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의 비유 중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23) 즉 누가 좋은 신자이고, 누가 좋은 열매를 맺는 자냐 하면 ‘깨닫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 특히 선악에 대한 깨달음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 가정에서 부모님에게 배우고,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배우고, 내 속에 있는 양심을 통해서도 배웁니다. 특히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고, 예수님이 보내 주신 성령님을 통해서도 깨닫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를 보면 선악에 대한 개념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동성애는 분명 성경적으로나 인간의 본성으로 보나 좋지 않은 것인데 그것을 자꾸 좋다고 합니다. 그것도 요즘은 거의 모든 정치가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그럽니다. 그래서 선악에 대한 우리들의 깨달음이 뒤틀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바로 그것을 노립니다. 선악에 대한 깨달음을 뒤틀리게 하면 너무도 쉽게 자기 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즉 바르게 깨달으면 바른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잘못 깨달으면 잘못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성경을 보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좋은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란 것이 없어서 자기도 고생하고 남도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초대교회 당시에 크리스천을 몹시 핍박하고 교회를 파괴하는데 일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즉 잘못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자기가 가장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리아 다메섹이란 다른 나라에까지 원정을 가서 크리스천들을 잡아다가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서 옥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제 그냥 나두면 안되겠습니다. 도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메섹 길에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을 비추며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
‘가시채’란 짐승, 특히 소를 몰기 위해 뾰족한 나무 막대기의 한 쪽 끝에 쇠나 뼈를 박아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농경에서 사용하는 ‘가시채’란 도구를 가지고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가 가시채에 어거되는 것이 싫어서 가시채를 뒷발질 하여 보지만 그럴수록 더욱 자신에게 고통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이란 청년이 크리스천을 자꾸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자신에게 고통만 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그런 행동이 도리어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것이니 이제 그만하라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사울이 묻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음성을 듣고 사울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잘못 알았구나! 내가 하는 행동이 틀린 것이구나!” 그리고 그 후에 그는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종 위대한 사도 바울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보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애급의 바로 왕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급 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왕이 자꾸 고집을 부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가시채를 계속 뒷발질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 열 가지 재앙을 당하고 마침내는 홍해수에 수장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사람이 어디 바로 왕과 사울만 그렇습니까? 우리는 모두 적든지 많든지 혹은 크든지 작든지 나름대로 고집을 부리고, 오해를 하고, 깨달음이 부족해 가시채를 뒷발질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인생을 살지만 결국 인생에 있어서 쓸데없이 고생을 자초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고생하며 살기를 원치 않는데 인생 스스로 가시채를 뒷발질하며 살기 때문에 인생이 너도 나도 힘이 듭니다.
적어도 가시채를 뒷발질하지 않고 살면 인생이 제법 행복해질 수 있는데 어디 인간이 그렇습니까?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가시채를 뒷발질합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행복을 깨는 악수를 두고 맙니다. 지금 중국의 일인자는 시진핑이란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전에 많은 나라의 수상들과 대통령들이 모였습니다. 거기에 영부인들도 같이 동행했습니다.
그때 있었던 일입니다. 시진핑의 부인이 다른 나라 영부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남자를 관리하려 합니까? 여자는 자기 자신만 관리해도 됩니다. 똑똑한 남자는 관리할 필요가 없고, 멍청한 남자는 관리해도 소용이 없고, 당신을 사랑하는 남자는 관리하지 않아도 되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관리할 자격이 없습니다. 때문에 당신은 열심히 여자로 살면 되는 겁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감탄했습니다. “와- 이 여자, 도대체 이런 깨달음을 어디서 얻은 거야? 정말 똑똑한 여자네!” 여러분! 보통의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잔소리를 합니다. 물론 자기는 남편을 위하고 남편을 돕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돕는 방법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잔소리가 아니라 우선 아내가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남편은 무언중에 아내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꾸 잔소리를 하면 남편이 열이 받칩니다. 화가 납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말발로 안되니까 남편은 큰소리 지르고 폭력을 쓰게 됩니다. 결국 아내는 좋은 일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우리말 중에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괜한 고생, 안해도 되는 고생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생은 해봤자 아무런 상급이 없고, 후회와 아쉬움만 남게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될 수 있으면 안 받으면 좋고, 또 빨리 끝나면 더 좋은 그러한 고난들입니다. ‘매를 자초한다.’는 말도 이와 상통하는 말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을 체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다른 여러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얌전히 맞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나를 때리는 선생님을 향하여 도끼눈을 뜨고 쏘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어- 너 이 새끼, 뭐야? 감히 대드는 거야?” 하면서 몇 대 더 맞았습니다.
저도 생각해보니 당시에 보통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더 맞게 되자 화가 나서 선생님에 대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신나게 터졌습니다. 그렇게 당하고 나서 저는 수업 시간 내내 엎드려져 선생님에게 무언의 데모를 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 그 선생님이 말씀합니다. “너 이 새끼! 교무실로 따라와.”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알아서 상상하십시오. 이런 경우가 바로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경우의 한 예화입니다. 한 대만 맞고 끝낼 것을 괜히 대들다가 여러 대를 맞고 험한 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디 이런 경우가 저만 있습니까?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가시채를 뒷발질하다가 쓸데없이 고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좋게 말할 때 교회 나오고, 좋게 말할 때 하나님 잘 믿으면 되는데 웬 똥고집을 그렇게 부리다가 결국 얻어 터져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하나님께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그래도 참 다행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계속 가시채를 뒷발질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다가 결국 인생이 끝나고 지옥 앞에 도달해서야 “아-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의 자녀들 중에 특히 예수님 믿는 아버지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오는 자녀들이 제법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 역시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경우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하나님을 더 잘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 자녀들 중에 자기 뜻대로 안되었다고 툭하면 “나 밥 안 먹어요.” 하고 땡강 놓는 자녀가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말합니다. “안 먹으면 너 배고프지, 나 배 고프냐?” 즉 가시채를 뒷발질 하면 너만 고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적어도 인생에 있어서 가시채를 뒷발질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목사로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가시채를 뒷발질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외국 땅까지 와서 쓸데없이 고생해서야 되겠습니까?”
성경을 들여다보면 어떤 경우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경우인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가시채를 뒷발질하지 않게 되는지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목사가 수없이 많이 설교를 한 것도 거의 대부분이 가시채를 뒷발질하지 말라는 내용과 상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아도, 설교를 들어도 그런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가시채를 뒷발질합니다. 아- 운명이여! 아- 팔자여!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즉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잘하고 아멘을 잘하니까, 즉 쓸데없이 가시채를 뒷발질하지 않으니까 고생도 덜하고 인생이 순탄하게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스스로 깨달으십시오. 어느 것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겁니까? 술 먹고, 도박하고, 음란하고 방탕 하는 것도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이요, 학생이 공부를 게으르게 하는 것도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이요, 성도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도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이요, 권세자를 비난하는 것도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이요....기타 등등, etc
오늘 우리는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내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보길 원합니다. 그리고 짧은 인생 가시채 뒷발질하는 것을 이제 그만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좀더 평안한 인생, 좀더 복된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특히 이 외국 땅에까지 와서 가시채를 뒷발질하며 사는 것은 비극입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의 가시채 뒷발질하는 것을 막아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