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나쁜 것이 가장 좋은 것이 되었다.

날짜: 
2021/06/26
말씀: 
출14:10-14
말씀구절: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설교: 

제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있을 때 잠실 운동장에서 큰 성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각 대교구와 각 지성전, 그리고 각 기관들의 대표들이 순서대로 입장을 하고 관중석의 성도님들이 그들을 일일이 환호와 박수로 맞아주었습니다. 그때 가장 열렬히 환영하고 맞아준 기관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바로 기도원입니다. 언뜻 보면 기도원은 많은 성도님들이 있는 대교구와 지성전 같은 큰 기관도 아니고, 경기도 오산리 시골에 처박혀 사역을 하는 주의 종들 몇몇이 초라하게 입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가 나와서 “어- 이거 왜 이러지?” 하고 이상해 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하- 그렇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관중석에 있는 성도님들이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자신들도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금식하며 기도했고, 결국 그 어려운 시기를 통과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시기에 자신들을 위해서 안수기도해주고, 친절히 상담해주고, 정성껏 보살펴 준 기도원의 주의 종들에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그 옛날 어려웠던 자기 자신에게 향한 박수였습니다.

또한 지금도 어려운 문제와 위기를 당하여 기도원에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성도님들을 격려하는 박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름같이 허다한 하늘의 수많은 성도님들이 오늘도 그 어려움 속에서 믿음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당신을 향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트랙을 달리다가 쓰러졌어도 다시 일어나고 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또 다시 전진해 보십시오. 결국 골인지점에 도달하고 찬란한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좀 드러누워 “주님, 주여, 힘을 주세요. 주님이 힘을 줘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고 신음이라도 계속 해보십시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속에서 간구해주시는 성령님이 결국 당신을, 나를, 너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면 화장실에서 얼굴에 물도 좀 묻히시고, 빗질도 해보십시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해보십시오. “주님, 나는 못하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잖아요. 주님이 내 인생 좀 같이 살아주세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내 안에 들어와 나와 함께 인생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나와 함께 희로애락을 느끼며 순간순간마다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가장 나쁜 것을 가장 좋게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새롭게 하소서’에 나오는 분들의 간증을 들으면 한결같이 그렇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여 가장 좋은 모습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간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 나오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수가 그들의 전진을 가로막았습니다. 뒤에서는 애급군대가 쫓아옵니다. 이제 모조리 죽게 생겼습니다.

아- 어떡합니까? 절망입니다. 최악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홍해수가 갈라졌습니다. 도저히 믿지 못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나를 죽이려는 애급 군대가 도리어 모조리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큰 홍해수를 만날 때, 인생의 가장 어렵고 긴 터널을 통과할 때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가장 나쁜 것을 가장 좋게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헬렌 켈러’라는 여성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복지 사업가로 전 세계에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는 건강한 우리와는 달리 듣지 못하고,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삼중의 고통을 안고 산 장애자였습니다. 생후 19개월 때 중병으로 시력, 청력, 언어 구사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녀의 가정교사인 ‘설리반‘이란 분은 헬렌 켈러보다 14년 먼저 태어난 ‘분입니다. 그녀는 10살 때부터 고아원에서 온갖 학대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설리반은 인내심과 애정과 신앙심이 남다른 기독교인으로 성장했습니다. 바로 그 설리반이 20세가 되었을 때 6살이 된 헬렌 켈러의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헬렌은 어떤 교육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손으로 음식을 먹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물건들을 집어던지는 야수와 같았습니다. 설리반은 이런 아이를 씻는 것, 머리 빗는 것,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하는 법을 가르치고, 글을 익히는 교육을 마치 격투를 하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헬렌은 설리반 선생의 엄격한 교육에 대해 울음과 소리를 지르고, 온몸으로 반항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싸운 지 7년이 되어서야 물을 퍼 올리는 펌프 가에서 헬렌은 최초로 ‘물(water)’이라는 단어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단어 하나를 아는데 7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헬렌은 1900년, 20세에 하버드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맹아, 농아로서는 세계 최초의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를 돌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복음을 심어 주는 사람이 되었고, 가장 나쁜 상황에 처했던 그녀가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누구와 더불어요? 하나님과 함께입니다.

그녀는 고백합니다.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을, 나의 일을,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역경 중에 만난 하나님이 그녀의 가장 불행한 한 인생을 가장 좋은 삶으로 바꾸어 살게 하신 것입니다. 삼중 장애는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운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시자 그 삼중고를 이기고 희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만일 이런 신앙이 내게 없다면 내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인생 중에 예상치 못한 최악의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크게 실패를 하여 인생 밑바닥으로 내려가기도하고, 중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 태어나면서부터, 아니면 갑작스러운 사고로 큰 장애를 입기도 합니다.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 저자인 이지선 씨의 간증입니다. 누가 봐도 사고 전의 지선 씨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미래의 꿈을 품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사고로 인해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2000년 이화여대 4학년 때였습니다. 음주 운전자가 낸 5중 추돌 교통사고로 전신 절반 이상의 몸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녀는 생사의 기로에서 40번이 넘는 대수술을 받은 끝에 간신히 살아났지만 보기 흉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온 몸은 보기에 흉한 화상 흉터로 뒤덮이고, 손가락 10개 중에 8개는 불에 타 절단 수술을 하여 끝마디는 없어졌습니다. 얼굴 역시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수술을 다 끝낸 의사는 절망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지선이는 앞으로 세상에 나가 살기가 어렵고 사람 구실을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최악의 상황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나쁠 것이 없습니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냈습니다.

그리고 미국 UCLA 대학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는 희망의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녀의 간증은 많은 절망 중에 빠진 사람들에게 살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애는 장애가 너무 심해 앞으로 사람 구실을 못할 것입니다.”라는 전문의의 절망적인 말에 대해 이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문의의 말은 틀렸습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녀의 장애가 도리어 하나님을 더욱 절실히 믿는 기회가 되고, 결국 “지선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이 그녀를 변화시키고, 그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고로 지금 그녀는 자신의 장애를 아주 나쁜 것으로 보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가장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인생은 짧지만 그 후의 인생은 영원하고, 그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저주 받고 죽으면서 누구를 구원하려고 하느냐? 네가 진짜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어 줄게.” 그렇게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고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은 너무나도 무능하고 너무나도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나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이 있었기에 저와 여러분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우리들이 구원 받을 하나님의 계획이 비로소 완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인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영영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의 죽음이 최선의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십자가를 걸어놓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깨닫습니다. “그래, 가장 나쁜 것이 가장 좋은 것이 될 수 있어. 저기 십자가를 바라바 봐. 그 고통의 십자가가 결국 영광의 십자가가 되었잖아. 나의 인생도 하나님과 함께 하면 가장 나쁜 상황도 가장 좋게 될 수 있어. 할렐루야!”

물론 내 마음 속에서는 “과연 그럴까?”라는 의심과 물음이 계속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계속 살아보십시오. 언젠가는 “아하- 그렇구나! 진짜 가장 나쁜 것이 가장 좋은 것이 되었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하- 그 동안 하나님이 잠잠하신 것 같았지만 다 역사하셨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깨닫기까지 세월이 좀 흐를 것입니다. 그 동안 절망과 희망 사이를 수없이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지나간 세월 속에서 눈을 들어 보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할 것입니다. “아하- 하나님이 가장 나쁜 것을 가장 좋게 하셨구나!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