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4:16-20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어느 부부이야기를 전해드리면서 오늘의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므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 한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결혼 적령기가 된 아들은 어느 참한 아가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세 식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막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는데 아들 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급하게 미국 지사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수속만 밟고 얼른 미국으로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남편은 그렇게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새 신부는 남편과의 깊은 사랑을 충분히 맛보기도 전에 이별의 아픔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시집을 왔으니 시댁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신랑이 미국으로 간 뒤에 6개월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1년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미국 간 아들에게서 소식이 없자 며느리를 잘못 얻어서 아들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이라고 허구 한 날 며느리를 구박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도 딴 마음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고생하지 말고 내 살길을 찾아 떠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보따리를 싸서 막 집을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시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내가 모시고 있던 시어머니인데, 갈 때 가더라도 따뜻하게 밥 한 공기는 대접하고 가야겠다." 그래서 맛난 음식을 만들어서 시어머니께 대접해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영문도 모르고 기뻐하며 식사를 했습니다. 설거지까지 끝낸 뒤, "이제는 진짜 이별이다." 생각하며 집을 한 번 둘러보고 대문을 나서려는데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편지 배달부였습니다. 남편에게서 날아온 편지가 그의 손에 들려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보따리를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편지 첫머리에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보, 고생 많지. 나 이곳에서도 당신을 잊어본 적이 없소."
편지를 읽다보니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편의 마음도 모른 채 집을 떠나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또 남편이 그립기도 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편지는 금세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샀던 보따리를 다시 풀었습니다. "내가 못난 년이지. 남편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데 가기는 어딜 가?" 그리고 시어머니가 구박을 할 때마다 방에 들어가 남편의 편지를 읽으며 용기를 얻었습니다. 나중에는 그 내용을 몽땅 외워버렸습니다.
그 첫 편지를 받은 후 1년이 지나도록 남편에게서는 다시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남편 없이 홀로 2년여의 시간을 보낸 새댁은 "내가 그 편지 한 통 때문에 쓸데없이 1년이라는 세월을 또 보냈구나. 이번에는 진짜 가야겠다." 하며 1년 만에 다시 보따리를 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시어머니가 마음에 걸려 쉽게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에게 따뜻한 밥을 한 끼 대접해 드리고 나와서 집을 한 번 쳐다보고 대문을 나서는데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이번에도 편지배달부가 남편에게서 온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 읽어 보았더니 이런 내용이 씌어 있었습니다. "여보, 그 동안 연락이 없어서 걱정이 많았지. 걱정하지 마오. 당신이 살 집을 마련하느라고 바빠서 연락을 못했소. 내 조만간 당신을 데리러 갈 테니 조금만 더 참기 바라오. 사랑하오."
편지를 읽고 나니 그 동안 쌓였던 설움이 눈물이 되어서 뚝뚝 뚝 떨어졌습니다. 편지는 다시 눈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집을 떠나기로 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습니다. 시어머니의 구박이 심해질 때마다 새댁은 편지를 읽으며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읽고 또 읽다 보니 나중에는 편지 내용을 다 외워 버렸습니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편지 때문에 인생을 망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떠나면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으리라 마음먹으며, 마지막으로 시어머니에게 식사를 차려드리고 나오려는데 초인종이 울리더니 "소포에요! 도장 가지고 나오세요." 하는 편지 배달부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습니다. 남편이 보내온 소포였습니다.
도장을 찍고 방으로 가지고 와서 뜯어보았습니다. 예쁜 상자가 들어있었습니다. 상자 안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고이 들어있었습니다. 마치 신랑이 그 안에서 웃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작은 쪽지에는 "여보, 내 사랑의 증표로 이 선물을 보내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새댁은 시어머니의 눈을 피해 반지를 이불 밑에 숨겨 놓고 힘들 때마다 반지를 끼어 보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눈총을 주고 구박을 해도 이제는 반지를 보며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서 전보가 왔습니다. "0월 0일에 한국에 도착하오. 김포공항으로 마중 나오구려." 드디어 남편이 오는 날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무슨 옷을 입고 공항에 갈까 고민하며 옷장을 뒤졌지만 그 동안 딱히 옷을 사 입은 적도 없고 해서 마땅한 옷이 없었습니다. 집에서 입는 막옷 외에는 결혼식 날 입었던 드레스가 전부였습니다. 면사포 없이 드레스만 입어보니 뜻 밖에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공항에 도착해 출입문 앞에서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국 절차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흰색 신사복을 입은 남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들의 눈길이 오가는 순간 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신랑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아내의 눈물을 닦아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그 동안 고생이 많았지? 나 없는 동안에 애 많이 썼구려. 당신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해 놓고 오느라고 이렇게 늦었소. 자 이제 갑시다. 나와 함께 가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삽시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경의 스토리입니다. 첫 번째 온 편지가 구약성경이요, 두 번째 온 편지가 신약성경이요, 세 번째 온 선물이 성령의 은사요, 네 번째 온 전보가 천사의 나팔소리요, 그리고 공항에 온 신랑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수님입니다. 공항으로 마중나간 신부는 물론 우리를 상징합니다. 신부 된 우리는 신랑을 만날 때 하얀 세마포를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한국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매우 어려웠던 1950년대의 크리스천들이 떠올랐습니다. 당시의 하루하루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신랑 되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참고 사는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아른거리면서 이런 노래가 제 입에서 나왔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 신랑 되신 예수님을 고대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리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어도 예수님 다시 만날 것을 고대하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이 세상의 출세가 아니요, 이 세상의 성공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신랑 되신 예수님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하는 목표가 돈이 아니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신 이유는 돈이 아니요, 예수님과 사랑하며 예수님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요즘은 신랑과 신부가 결혼하는 날에도 여차하면 헤어지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남편과 아내를 그렇게 쉽게 배반하는데,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신랑 예수님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섬기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눈에 보이는 남편을, 아내를 일편단심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도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오늘의 신랑신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이 너무 대책 없이 떠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신부가 마치 신랑에게 버림받은 것 같아서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신부를 챙기지 못하는 신랑 되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우리도 참 처량한 신세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훌쩍 떠난 신랑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는 신부인 우리들은 얼마나 외로운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대책 없이 그렇게 우리를 훌쩍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훌쩍 떠난 무정한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처량한 신세의 여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즉 예수님의 육체는 부활체를 입고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예수님이 영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6-20)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즉 주님은 우리와 지금도 같이 있고, 앞으로도 같이 있고, 영원히 신부되는 우리와 같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외로워서 눈물로 밤을 지새울 필요가 없습니다. “외로워 외로워서 못살겠어요.” 하고 자신의 인생을 탄식하며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있기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행복해요!” 하고 떳떳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9:15) 여러분, 우리가 슬픈 것은 돈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세가 처량한 것은 세상에서 출세하거나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외로운 것은 이 외국 땅에서 나만 홀로 떨어져 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슬픈 것은 사귀던 애인에게 이별통지를 받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은 예수님을 빼앗길 때입니다. 예수님을 잊어버릴 때입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이 식어질 때입니다. 그만 사랑의 권태기가 와서 예수님을 봐도 아무런 감동이 없을 때입니다. 예수님과의 첫사랑이 식어졌기에 우리는 슬픕니다. 예수님과 사랑을 못 느끼면 우리는 그 사랑을 감동적으로 전할 수 없습니다. 그만 맹숭맹숭한 신앙이 되고 맙니다.
주님은 우리와 늘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기를 원치 않습니다. 날마다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주님은 나를 너를 우리를 너무도 좋아합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십시오. 주님은 인격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싫어하고 주님을 멀리하면 주님은 우리를 스토킹하면서 괴롭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면 들어오시는 분이지 내가 문을 열지도 않는데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와 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친구의 우정적인 사랑보다 더 찐하고, 이성간의 사랑보다도 더 달콤하고, 가족 간의 사랑보다도 더 끈끈한 주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의 힘이 없으면 누구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다. 그 사랑을 맛보지 않고서는 감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오늘도 맛보고 살 수 있다니 이게 웬일입니까? 이 말은 그냥 그 분의 철학이나 사상을 사랑하면서 얻는 지식의 습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분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 분과 지적으로 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사랑을 나눌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분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은 지정의를 갖추신 분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님과의 사랑의 교제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아와 같이 혹은 버려진 신부와 같이 처량하게 살지 마십시오. 신랑을 가까이 모시고 기뻐하며 행복하게 사십시오. 예수님 믿는 것은 슬픔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상을 쓰며 화나는 모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의미합니다. 아무쪼록 예수님 믿고 이 땅에서도 행복하며 저 천국에서도 예수님과 더불어 무한한 행복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날짜:
201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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