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좋으신 하나님인가?

날짜: 
2015/08/30
말씀: 
마7:7-11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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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야, 하나님을 믿으면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괜히 쓸데없이 하나님 믿는다고 시간 뺏기고, 돈 뺏기고, 몸 피곤하게 하지 말고 늙어지면 못 노나니 젊었을 때 열심히 놀자 말이야! 그리고 생각 좀 해보아라. 이곳까지 돈 버리고 유학 와서, 그리고 이민 와서 공부하기 바쁘고, 이민 생활 적응하고 먹고살기 바쁜데 꼭 그렇게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야 되냐?”
이렇게 말하는 분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으신 분이신 것을 체험하지 못했거나, 잠시 그 사실을 까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체험으로 보면 하나님은 밥도 주고, 돈도 주고, 기쁨도 주고, 복도 주고, 영생도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오늘 여러분들처럼 ‘아멘’ 하고 “아, 물론이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처럼 좋은 분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을 한다면 당신의 신앙은 일단 안심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글쎄요, 하나님은 좋으신 분인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나쁘신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하고 대답을 한다면 당신의 신앙은 불안합니다. 장차 당신에게 좀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면 “거봐, 하나님은 나쁘신 분이잖아. 그러니까 우리 집안에 이런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할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굉장히 긴장이 될 때가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예기치 못한 재난을 당한 후 그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 하고 기다릴 때입니다. 재난을 당한 후에도 “하나님이 무슨 더 좋은 뜻이 있겠지요!” 하고 고백하면 목사는 안심이 됩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야, 이 양반 신앙이 바로 섰구나!”
그러나 “아니, 목사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해놓고 이게 뭡니까?“ 하고 핏대를 세우는 사람을 보면 목사는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저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성도 아슬아슬합니다. 저러다가 믿음 떨어지고 실족하겠습니다. 빨리 붙잡아 주시옵소서.“
여러분, 신앙이 튼튼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이라고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고백할 줄 아는 성도입니다. 반면 신앙이 약한 분은 조그만 어려움이 다가와도 “하나님이 왜 그 모양이냐?“ 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며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 길을 통과하면서 물과 양식이 떨어지고, 가는 길이 험하고 힘들고, 고난이 다가오면 늘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좋을 때는 좋지만, 때로는 나쁜 면도 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100% 좋으신 분이란 확신이 없었기에 불평 원망이 나오고 마침내 하나님을 멀리하고 멸망의 길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집을 지을 때 ‘좋으신 하나님’ 이라는 튼튼함 반석 위에 세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고난의 비바람이 세차게 불 때 그 집은 기초가 약하므로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욥이라는 사람을 보세요. 그는 동방의 의인이요, 동방의 가장 큰 갑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오랑캐가 침범해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10명의 자녀는 집이 무너져 몽땅 압사 당하고, 자신은 온몸에 악창이 들어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이보시오, 미련한 남편 양반, 우리 재산 다 빼앗아가고, 자녀도 몽땅 죽게 만들고, 당신도 이렇게 몹쓸 병에 걸렸는데 그런 나쁜 하나님을 뭐 하려고 믿는 거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그러나 이때 욥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할렐루야!
이렇게 멋있는 고백을 하며 욥은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욥2:10, 1:21:-22) 여러분, 욥이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러한 아름다운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욥의 마음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이러한 신앙이 있었기에 그는 결국 좋으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갑절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일찍부터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간직하고 사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그 꿈 때문에 형들의 질투를 받아 인신매매를 당하여 먼 나라로 끌려가 노예로서 고생하다가 결국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수년 동안 감옥생활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 않고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에 결국 이 모든 일이 더 좋게 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도 보세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사자굴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겼기 때문에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고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 속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에 설사 우리가 이렇게 죽더라도 우리를 더 좋은 곳,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좋으신 분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도 보면 고등학교 때부터 하나님은 믿었지만, 좋으신 하나님을 확실히 체험하지 못했을 때에는 친구 따라 혹은 세상 명예나 쾌락을 따라 순간순간 하나님을 멀리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군대 제대 후 성령을 받고 나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시요,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도록 내버려주셨고, 이 큰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이 나의 일생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모든 것을 주시되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니까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되고, 혹 여러 가지 고난이 오거나 할 때, 이로 인해 하나님의 선하심이 의심이 들다가도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니까 결국 모든 일을 다 좋게 만들어 주실 거야.” 하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우리가 보기에 때로는 나쁘게 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니,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도록 유도하는 겁니까?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죄를 왜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바로 전에 ‘애들아, 먹지 마라.’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왜 따먹도록 기다리고 난 다음 ‘너희들 내 말 안 들었으니까 에덴동산에서 나가라.‘ 하고 쫓아내시는 겁니까? 참, 병 주고 약 주는 이상한 하나님이네!”
“그리고 하나님은 왜 사단을 만들어서 우리보고 사단하고 만날 싸우라는 겁니까? 왜 싸움을 붙이는 거예요? 왜 이간을 놓는 거예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아니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들어서 사람 겁주는 겁니까? 그렇게 협박 공갈해도 되는 겁니까? 어디 입이 있으면 대답 좀 해보세요?“
이렇게 따지는 애들에게 부모가 아무리 설명해줘도 애들은 부모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종종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너도 결혼해서 자식 낳아봐라. 그러면 부모의 마음을 알거다.“ 여러분, 어린아이가 어찌 부모의 마음을 다 알겠습니까? 더구나 저와 여러분이 어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다 헤아리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에 우리가 설사 무식해서 돌을 달라고 해도 하나님은 떡을 주시며, 뱀을 달라고 해도 하나님은 생선을 주시며, 나쁜 것을 달라고 졸라도 오히려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 하셨은즉” (히11:40)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시85:12)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주의 종에게 허락하셨나이다.”(대상17:26)
헌금 생활을 할 때에도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고 믿는 성도는 “하나님, 이렇게 어려운 중에도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하지만 좋으신 하나님이란 신앙이 없으면,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내 십일조를 달라고 합니까? 하나님도 돈이 없으시면 나처럼 고생도 하고, 비즈니스를 해서 돈을 벌든지 해야지, 왜 내가 이 어려운 이민 생활 속에서 고생 고생해서 번 돈을 등쳐먹고 삽니까? 하나님, 그렇게 성도들 시험 들게 하면 안 됩니다. 회개하세요. 그리고 이제부터 관계 끊읍시다. Bye Bye!”
여러분, 노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온통 노랗게 보일 것이요, 빨간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나쁘신 하나님’이란 안경을 썼다면 목사도 도둑놈으로 보일 것이고, 교인들도 위선자들로 보이고, 교회도 좋지 않게 볼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도 모순투성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 하나하나가 모두 마음에 안 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좋으신 하나님’이란 안경을 썼다면 목사도 성도도 비록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다 좋게 보일 것이요, 성경이 비록 이해가 안 돼도 믿어보려고 애를 쓸 것이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도 당장 납득이 안 돼도 ‘무슨 좋은 뜻이 있겠지!’ 하고 인내하고 기다릴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안경을 쓰기를 원하십니까? ‘좋으신 하나님’ 이란 안경입니까? 아니면 ‘나쁘신 하나님’이란 안경입니까? 어떤 안경을 쓰든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나쁘신 하나님’ 이란 안경을 선택하면, 그리고 그 안경을 쓰고 이 세상을 살면 당신의 인생은 부정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이 늘 그치지 않고 결국 불행을 자초하고 맙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이란 안경을 쓰면 아무리 큰 고난이 다가와도 결코 부정적이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묻고 싶습니다. “과연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당신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끝까지 좋으신 하나님을 포기하지 말고 믿음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