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사랑하자

날짜: 
2008/09/13
설교: 

골1:24 교회를 사랑하자
한국에서 여기 캘거리로 이민이나 유학을 오면 처음에는 여기저기 구경도 가고, 답사도 하면서 다니는 곳이 제법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세계 최대의 쇼핑몰이라고 하는 에드먼턴도 있고, 남쪽으로는 워터톤 파크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아주 멀지만 나이아가라 폭포도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은 갈만한 곳이 제법 많아서 밴프 국립공원을 비롯하여 로키산맥, 그리고 더 나아가 켈로나 휴양도시, 벤쿠버, 빅토리아 섬, 나나이모 섬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서 어느 정도 살면서 갈만한 곳을 제법 가보다 보면 거기가 거기고 여기가 여깁니다. 한국의 어느 유명한 스님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고 한 것처럼 별로 특별한 곳이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솔로몬 왕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1:9-10)
이곳 외국 땅에 와서 처음에는 이곳저곳을 가보지만 이제는 가는 곳이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집, 학교, 직장(사업장), 쇼핑몰, 그리고 교회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교회가 항상 정기적으로 가는 곳이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이곳 외국 땅에서도 교회는 띠려야 띨 수가 없는 장소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므로 교회에 가지 않는 무교회주의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 가서 예배도 드리고, 찬양과 기도도 하고, 헌금도 드리고, 여러 가지로 봉사도 하고, 성도들과 교제도 나누면서 하늘나라를 가꾸는 기쁨으로 낙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자고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교회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보면 예수님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향하여 너무도 심한 비난을 하는 분들이 있어서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도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를 향하여 비난을 일삼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양반! 교회 생활이 지금 만족스럽지 못하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구나 자기가 현재 다니는 교회를 향하여 공공연히 비판을 하는 것을 보면 “아- 저 양반은 언제든지 쉽게 교회를 떠날 수 있겠구나!”라는 안타까운 생각도 듭니다.
오늘 우리는 이민생활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교회에 대하여 알아봄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가시면서 이 땅에 남겨 놓으신 유일한 것이 있는데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교회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에 150회 이상 사용되었는데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cclesia)`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구별된 무리, 빼어낸 무리’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요,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장소요,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이 전달되는 곳이요, 하늘나라 천국의 지점입니다. 고로 초대 교부인 터툴리안은 이런 말로 교회의 중요성을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로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머니와 같은 교회를 통하여 사랑과 위로를 받고, 올바르게 양육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본인도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단들의 특징 중 하나는 교회를 향하여 매우 담대하게 비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계속 무료로 나누어주고 있는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에서 나온 ‘이단 사이비 연구’라는 책에 보면 ‘이유빈’이라는 장로가 나옵니다. 이 양반은 ‘공개죄자백’ 사상으로 인하여 물의를 빚고 있어 그의 집회에 참여를 금지하고 경계를 해야 한다고 교계에서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혔을 때, 그 잘못을 입으로 고백하고, 용서함을 구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까지도 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공개적으로 스스로의 죄를 자백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타의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는 것은 마치 공산주의 국가에서 하는 ‘자아비판’과도 같이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큰 두려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지 않는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은 사람에게 또 다시 율법의 회초리를 가지고 내리치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귀한 구원을 잃는다고까지 주장을 하면 그것은 결국 행함이라는 조건을 구원으로 내세우는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무효화시키는 위험스런 사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좀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고 싶은데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네가 구원 받기 위해서는 너의 모든 죄를 모든 사람들 앞에 낱낱이 공개하고 자백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 이 소리를 들으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야- 이거 어디 살벌해서 구원받겠냐?” 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번 일일이 자백할 수 없을 만큼 허다한 죄와 허물을 짓고 살아갑니다. 더구나 마음으로 짓는 죄는 머리털보다도 더 많습니다. 이러한 죄를 일일이 다 공개적으로 자백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밥 먹는 시간까지도 놓치면서 사람들 앞에서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지만 그것은 일단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지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특정한 사람 앞에서 죄를 고백한다고 그 죄가 사해지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도 필요 없게 되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도 필요 없게 되고 맙니다. 단지 인간끼리 서로 죄만 고백하고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논리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개죄자백’ 사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를 수 있는 위험스런 사상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개죄자백’ 사상을 만든 이유빈 장로라는 분은 자신도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와 목회자를 향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인격에 대한 비판, 목회자의 설교에 대한 비판, 교회 제도에 대한 비판, 성도의 거룩하지 못한 모습에 대한 비판, 오늘날의 신학에 대한 비판 등을 말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런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아- 어찌하여 이런 양반이 장로가 되었는가?” “이 양반은 교회에서 은혜 받기가 참으로 힘들겠구나!” “아- 이 양반 참으로 불행한 장로구나!”
여러분, 교회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면 한없이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천사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00년 교회 역사상 교회가 타락하는 것에 대하여 늘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대건 교회의 개혁에 대하여 항상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교회의 머리는 인간이 아닌 예수님이시기에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입니다. 고로 믿는 사람이 교회를 욕하면 엎드려 침 뱉기입니다. 내가 내 몸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에 상처를 주는 것이요, 바로 예수님을 때리고, 침 뱉고, 욕하고, 찌르고,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입니다. 고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욕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말도 안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사랑하면 그 사람의 허물을 가려주지, 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습니다.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면 교회의 허물을 들추거나 교회를 향하여 비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사랑함이 마땅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교회가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아도 그 교회를 정죄하고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약한 모습이 있기에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자신이 지고 교회를 섬겨야 되는 이유가 됩니다. 마치 못난 자녀를 부모가 더욱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듯이 우리는 교회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교회를 더욱 아끼고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수많은 고생을 하면서 교회를 세우신 사도 바울이 이런 멋있는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주의 복음을 전하면서 수없이 옥에 갇히고, 수없이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고, 39대 맞는 매도 5번이나 맞고, 돌에 맞아 거의 죽기도 하고, 강의 위험, 시내의 위험, 바다의 위험, 광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으로부터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 항상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2:23-28)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한때 교회를 유난히 핍박하고 교회를 없애려고 무던히 힘을 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교회를 비난하고 교회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것인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지방을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즉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요,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이런 애틋한 사랑이 없습니다. 통계가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2003년 교회성장연구소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개신교인의 76.5%가 교회를 옮긴 경험이 있고, 또 다른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인 6명중 1명이 교회에 등록하지 않고 매일같이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58.4%가 예전에는 기독교를 믿었는데 다닐 만한 교회를 발견하지 못해서 종교를 바꾸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약 1천만 명 이상의 한국 사람들이 교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관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신앙이 제대로 성장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 교회에다가 만물을 충만케 하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통하여 우리 성도들이 복을 받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즉 우리가 이 외국 땅에서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는 통로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으로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하고, 교회는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도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를 우리들에게 허락하시면서 반드시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저런 축복을 주시면서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교회를 세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데에만 만족하지 말고,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며 교회를 더욱 봉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고로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이곳 외국 땅에서도 행복합니다. 보람을 느낍니다. 아무쪼록 교회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