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 예수님

날짜: 
2007/01/29
설교: 

행16:19-34 구원자 예수님
인생을 살다 보면 종종 어려운 일을 만나고 죽을 고비를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외국 땅에서 겪는 어려움은 고향 땅에서 겪는 어려움보다 우리의 마음에 더욱 큰 스트레스와 근심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어려움에서 나를 구원해주실 분이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의 근심은 사라지고 오히려 평안이 다가올 것입니다.
혹시 이 외국 땅에서 알게 모르게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구한테 이야기하기 힘든, 그리고 이야기 하고 싶지 않는 나 혼자만의 어려움 때문에 근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당하는 이 문제는 어떤 사람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하고 끙끙대고, “이 문제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물론 당신의 현재가 이 살기 좋은 캐나다 땅에서 모든 것이 풍족하고, 건강하고, 아무 문제가 없이 평안하여 당장 구원자가 필요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당신도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내가 이 외국 땅에서 병들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나를 구원해주실 분이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물론이지!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시다. 그리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지금 분명히 나와 함께 계시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당신은 이미 평안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무슨 문제 때문인지 아직도 불안하고, 아직도 근심하고, 아직도 마음이 초초하다면 당신에게는 오늘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말씀을 통하여 만나므로 다시금 평안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에 넉넉한 여유를 찾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여유가 충만하여 다른 사람들의 구원도 생각하는 복된 자리에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지금감옥에 갇혔습니다. 빌립보 지방이라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당하여 송사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많이 얻어터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발에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무거운 착고가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평안합니다. 그 음침하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오히려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자 그곳 감옥에 갇혀있는 다른 죄수들이 바울의 찬양소리를 듣습니다. “아니, 저 자람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곳 감옥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로 인하여 안절부절못하고 얼굴에 수색이 가득한데 저 사람은 오히려 얼굴이 평안하잖아! 그래, 혹시 저 사람 미쳤는지도 몰라! 그래, 저렇게 억울하게 얻어터지고 이곳 지하 감옥까지 들어왔으니 미치고 환장할만하지!”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모든 사람들이 바울의 찬양과 기도 소리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립니다. 지진이 난 것입니다. 여러분, 지상도 아니고 지하에 지진이 나면 보통 상식으로는 그곳의 기초가 흔들리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몰사당하는 매몰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번 지진은 굳게 잠겼던 옥문만 열어지게 하고, 또 모든 사람들의 묶였던 것만 풀어지게 하는 희한한 일들만 일으켰습니다.
감옥에 갇혀진 죄수들은 지진으로 인하여 옥문이 열어지고 손과 발에 묶였던 밧줄과 착고가 풀어지자 얼굴에 놀라움과 함께 희색이 돌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그곳 감옥을 지키고 있는 간수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죄수가 도망가면 그 죄수를 지키는 간수가 고문을 당하고 사형에 처해지는 엄격한 법률이 있었습니다. 옥문이 열어지고 죄수들의 착고와 밧줄이 풀어진 것을 본 간수는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아, 이제 어쩌면 좋으냐? 고문을 당하고 죽느니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 생각하며 자살을 하려고 자기의 칼을 빼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먼저 죽 습니다. 여보, 나 없는 동안 우리의 자녀들을 잘 키워주시오. 애들아, 이 못난 아빠를 용서해다오!“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 찼습니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이대로 죽어야만 하는가?“ 생각하면서 ”별 방법이 없지 않는가? 더 이상 살다가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명예스럽지 못하게 죽느니 빨리 죽고 말자!“
간수는 빼어든 날카로운 칼로 자기의 가슴을 푹 찌르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중지!(Stop!)" 간수가 눈을 들어보니 조금 전에 아름답게 찬양을 드렸던 바울이라는 한 죄수가 자기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보시오. 당신의 몸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 우리가 도망가지 않고 다 여기 있지 않소!“
간수가 정신을 차리고 등불을 비추어보니 옥문이 열어지고 죄수들의 착고와 밧줄이 모두 풀어졌는데 죄수들이 다행히 도망가지 않고 다 그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간수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다시 옥문을 잠글 수도 없었고, 다시 그 모든 죄수들을 묵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만약 죄수들이 연합하여 간수인 자기를 죽이고 도망가도 자기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의 생명은 죄수들의 손에 달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미래와 그의 희망도 죄수들의 손에 달리고 말았습니다.
간수는 자기의 생사를 가르는 이 사건 앞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묻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 물음에 바울은 원색적인 대답을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할렐루야!
여러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오늘의 문제, 내일의 고통, 과거의 슬픔에서 구원받을 줄을 확실히 믿습니까? 나의
고통뿐만 아니라 내 가족의 고통까지도 구원받을 줄을 확실히 믿습니까? 그렇다면 근심이 얼굴에서 사라져야 하지 않습니까? 얼굴을 펴야 되지 않습니까? 얼굴에 환한 희색이 돌아야 하지 않습니까? 혹시 말로는 “믿습니다!”고 하지만 실지는 믿음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과연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지금 당하는 이 문제와 이 근심과 이 고통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구나 여기는 한국 땅이 아닌 캐나다 땅인데! 과연 예수님은 이곳 캐나다 땅에서도 나를 구원하실 수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구나 예수님은 2000년 전의 사람이요. 우리 한국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가? 더구나 그는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은 힘없는 사람이 아닌가? 아니 자기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을 내가 구원자로 믿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불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이렇게 불신하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불신의 모습이 보통 사람들의 당연한 생각이요 상식일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나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고통에서 나와 내 가족을 구원한다는 것이 이상한 사람들의 생각이요, 비정상적일지 모릅니다. 고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한 사람의 종교가나, 철학가나 사회주의자로 생각한다면 따르기가 쉬운데 예수님을 나와 내 가족의 현실의 고통을 해결하고 구원하실 분으로 믿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 가운데에는 예수님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고통에서 구원하실 분인 것을 믿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분들은 어떻게 믿은 것입니까? 물론 나름대로 믿음의 이유와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 가운데 확실한 하나는 체험입니다. 말로만 듣던 예수님이 진짜 나와 내 가족을 고통에서, 문제에서, 어려움에서 건지어내셨네!“ 하고 스스로 체험했기에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이 계속 쌓이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오늘의 사도 바울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간증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여러분,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을 가진 히브리 말인 '예수아' 또는 ‘여호수아‘의 그리스 말입니다. 고로 마태복음 1장 21절에 천사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리고 예수님에게 적용된 '그리스도'라는 칭호도 '구원자, 구세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의 ‘메시아(Messiah)’를 그리스 말로 표현한 것으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뜻, 즉 구세주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칭호는 모두 인간을 구원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즉 구원자의 이름을 부르면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데살로니가 전서 5장 9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여러분, 혹시 나와 내 가족 중에 병이 들었습니까? 그 병에서 나를 구원해 주실 그 분의 이름을 믿음으로 부르십시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여, 나와 내 가족을 병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이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5:15)
예수님의 제자들은 풍랑이 일고 배에 물이 들어오거나 배가 파선하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5) 이렇게 구원자 예수님을 부를 때 예수님은 바람과 풍랑을 향하여 외치셨습니다. “바람아 파도야 잠잠하라.” 그러자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졌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서로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가 누구기에 바람과 풍랑조차 잠잠하게 만드는가?”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살아계셔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령으로 우리들을 찾아오시고 계속 구원의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지 못하고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습 즉 성육신하여 오셨을 때에는 자기들의 눈에 보인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예수님은 자기를 구원자로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를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여러분, 이곳 캐나다 땅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그 고통과 그 문제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과 당신 가족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은 멀리 떠나계시지 않고 당신 바로 곁에 계십니다. 바로 옆에서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구원해주실 분이 있는데 그 분을 의지하지 않고 자꾸 딴 데다 구원을 요청하면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안타까워하지 않겠습니까? 그 분이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어려움을 만날 때에는 구원자 예수님을 찾을 때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가까이 할 때입니다. 특히 외국 땅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는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를 때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여러분, 우리는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한 인간입니다. 고로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날마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부르고 순간마다 예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부르고,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순간마다 의지하므로 그 분이 주시는 구원을 맛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확실히 믿고 고백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은 현재에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장래에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우리에게는 문제가 다가와도, 어려움이 닥쳐와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자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곁에 우리 안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으로 더불어 얼굴에 근심을 물리치고 기쁨이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사도 바울과 같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라고 힘껏 외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