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복하는 용기

날짜: 
2002/09/09
설교: 

제 목 : 굴복하는 용기
본 문 : 눅 5:1-7

어부 베드로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낙심과 허전한 마음으로 해변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셨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성적으로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이 드는 불합리한 말씀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평생 고기를 잡은 어부임. 그는 나름대로 고기 잡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요, 갈릴리 바다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훤히 잘 알고 있었음.
반면에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지 어부가 아닙니다. 목수인 예수님이 어부인 베드로에게 고기잡는 법을 강의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어불성설임.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방법대로 고기를 잡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보았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자 자신의 인간적인 실력의 한계를 느꼈음.
그리고 자신의 실력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았음. 자신의 아이큐도, 이성적인 판단도, 쌓아온 경험도 신뢰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았음.
결국 베드로는 자신의 실력, 자신의 이성,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 자신의 아이큐를 예수님께 모두 굴복시켰음.
어부로서 쌓아온 자신의 경험, 자신의 실력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 것임. 그것도 자기보다 어부생활을 많이 한 고참 어부에게 굴복하는 것도 아니고, 젊디젊은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예수님에게 자신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이요, 자신의 실력이 형편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임.

여러분,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더 실력이 있거나 남들보다 조금 더 배웠거나, 남들보다 좀 더 안다고 생각하면 남을 가르치려고 하고 남을 지배하려고만 하지 결코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스스로 실력이 있다 스스로 뭔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남에게 복종하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함.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오기도 꺼려함.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오면 자신의 잘난 점이 없어지고 자신이 하나님께 굴복해야 되고 자신의 자존심이 때로는 상하기 때문임.
물론 개중에는 교회에 와서도 자신의 실력, 자신의 경험, 자신의 판단으로 하나님을 이겨보려고 하고 하나님을 굴복시키려고 하는 미련한 사람도 있음.

그러나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 나오는 목적은 하나님께 내 자신을 굴복시키려고 나오는 것임.
그리고 기도하는 목적도 내 생각 내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임. 하나님께 나아와서도 내 경험, 내 판단, 내 실력을 고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함. 결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함.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때로는 자존심이 상해도 굴복해야 함.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굴복'이란 단어를 굉장히 싫어함. 굴복이란 비겁한 것이라고만 생각함.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은 큰 용기요, 큰 축복이요, 큰 명예임. 진리에 대해 굴복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신앙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굴복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돈에 대해 굴복하고 세상 명예와 세상 쾌락, 세상 거짓과 헛된 속임수에는 굴복하기를 너무나 잘함. 그리고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을 마치 미련하다고 생각하거나 약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함.
그러나 진짜 신앙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 굴복하기를 잘함.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잘함. 원래 신앙의 첫출발은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 즉 순종에서부터 시작됨. 굴복과 순종이 없는 신앙은 결코 신앙이 아닙니다. 순종이 없는 신앙은 오히려 하나님을 파괴하는 행위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임.
교회에서 직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신앙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욱 굴복하고 순종하는 아름다운 신앙이 되어야 함.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예수님께 굴복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자신보다 어부로서의 경험은 부족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했음. 어찌 보면 줏대가 없는 인간 같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을 예수님께 굴복시킴으로 어부로서 가장 많은 고기를 잡는 기적을 체험했음. 진정한 굴복이 곧 기적을 창조해낸 것임.
만약 베드로가 자신의 이성, 자신의 경험만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큰 축복과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 그리고 예수님께 굴복하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여전히 빈 배, 빈손으로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을 것임.

여러분,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나 가난한 목수로서 살다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한민국 사람도 아니고 우리 할아버지도 아닙니다. 서양 종교를 만드신 종교가 예수님,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가 예수님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것임.
더구나 바쁜 이민생활 속에서 시간들여 교회까지 나아와 애써 벌은 물질을 헌금으로 드리고, 힘껏 봉사하고 나서 자신의 자존심까지도 죽이고 예수님께 자신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임.
어찌 보면 헌금 드리고 봉사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임. 그러나 자신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임. 그러나 교회는 이렇게 자기를 굴복시키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필요함. 교회에서 자기를 예수님에게 굴복시키지 못하면 그 신앙은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함.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느라고 피곤했음. 집안에는 열병으로 신음하는 장모님도 있었고, 많은 고기를 가지고 집에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아내도 있었음.
즉 베드로의 형편은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 아무리 고기를 잡아보려고 해도 자신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어떡합니까 ?

그러나 그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음. 그 분의 말씀에 굴복했음. 만약 베드로가 몸이 피곤하다고, 시간이 없다고,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다고 예수님께 굴복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큰 축복이 없었을 것임.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도 되지 못했을 것임.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게 굴복했음. 오히려 자신의 방법, 자신의 경험이 실패함으로, 그리고 환경이 어려워짐으로 예수님에게 굴복하기가 쉬어진 것임. 즉 고난과 실패를 통하여 예수님에게 빨리 굴복하게 되고, 결국 그 역경은 베드로와 베드로의 가정에 큰 축복의 계기가 되었음.

여러분, 저는 목회 생활을 하면서 이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렇게 목사가 이런 저런 일을 가르쳐 주어도 안듣다가 자신에게 큰 고난이 닥치고 코너에 몰리게 되면 그때서야 깨닫고 예수님에게 굴복하려는 사람들을 봅니다. 물론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욱 굴복하게 되는 신앙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큰 고난이 닥치지 않아도 미리미리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그 말씀에 굴복하면 더 좋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고 소 잃기 전에 미리미리 외양간이 고쳐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 잃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축복이지 결코 재앙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은 소망이지 결코 우리를 절망가운데 빠트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진정한 축복과 소망은 굴복하는 사람들의 것이요, 순종하는 사람들의 것임. 우리는 이 이국 땅에서 축복을 받고 누려야 합니다. 소망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판단으로는 결국 베드로처럼 실패를 맛보고 맙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해도 한 마리의 고기를 잡을 수 없는 너무나 큰 고생과 피곤함을 겪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굴복할 수만 있다면 진정한 예수임의 제자가 될 수가 있음. 이 이국 땅에서도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 인생의 참 보람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만선의 축복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과연 하나님께 굴복하고 있는가 ?
하나님은 나의 무엇을 굴복시키기를 원하시는가 ?
그리고 하나님께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당신께 굴복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당신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저에게도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저도 하나님께 굴복하겠습니다." 굴복할 줄 아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베드로처럼 만선의 축복이 이 이국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