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아주고, 홀아비 마음 과부가 알아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배고파 본 자만이 배고픈 자의 심정을 알 수 있고, 병들어 본 자만이 병든 자의 심정을 알 수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 본 자만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앞이 캄캄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누가 여러분의 심정을 가장 잘 알아주겠습니까? 바로 여러분과 똑같은 문제를 당해본 분이 여러분의 심정을 가장 잘 알아주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 오늘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2:18)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을 똑같이 당해보신 분입니다. 그 분은 배고파 보았기에 배고픈 자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40일을 굶으신 분인데 어찌 배고픈 자의 심정을 모르시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장면이 나옵니다. 왜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을 먹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배고픈 자의 심정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빈 배를 만선의 축복으로 채워주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당시 베드로의 형편을 보세요. 집에는 장모님이 열병에 걸려 누워있고, 애들은 배고파하고, 아내는 남편 베드로가 많은 고기를 잡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업은 어떠했습니까?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마음은 심히 허탈했고 도저히 힘이 생길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지 않았습니까?
이 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리라.”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할렐루야! 요즘 사업이 잘 안 되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새겨 보십시오. 여러분의 사업장에서 깊은 곳이 어디인지를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깊은 곳의 뜻을 깨닫고, 그 곳에다 그물을 치십시오. 예수님은 사업이 안 되는 자의 심정을 아시고 반드시 그 사업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에게 고기가 없다면 베드로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고, 가장으로서 힘을 제대로 쓸 수도 없고, 자존심이 심히 상할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6:32에도 보면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이 이국땅에서 살 때 물질이 있어야 할 것을 주님은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도 아시고, 용기를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도 주님은 아시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병든 자의 심정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53:3-4에 보면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가 모든 인류의 병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병도 짊어져 보았기 때문에 병든 자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시고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는 죽은 자를 살려주셨고 앞으로도 죽은 자를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시기, 질투와 배척도 받았고, 가장 가까운 제자로부터 버림도 배반도 당해본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나의 심정도 잘 아시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까요? 종교나 윤리나 도덕으로 우리를 죄인의 궁지에 몰아넣고 스트레스를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고난당하고 사는 인간의 사정을 아시고 우리를 돕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풍랑으로 인해 죽음의 위험을 느낄 때, 주님은 그들이 살기 위해 괴롭게 노 젖는 것을 아시고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한 밤중에 바다 위를 걸어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또한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심정을 아셨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오빠 나사로를 의지하여 살고 있었는데 오빠마저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슬펐습니다.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통곡했습니다. 이 때 그들을 찾아온 예수님은 그들의 슬픈 심정을 아시고 같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에 찾아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은 우리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창녀의 심정도, 강도의 심정도 아시고, 가난한 자, 병든 자, 눈먼 자, 포로된 자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믿음이 약해져 ‘과연 하나님이 나의 사정을 알고 계실까?’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을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께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7-31)
하나님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간 것을 아시고 그들을 도와 주셨습니다. 또한 하루 세 번 기도하며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 사자굴 속에 빠진 다니엘의 사정을 아시고 그를 도와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말라 죽을 때면 하나님은 그 사정을 아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쓴물을 단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한 양식이 떨어졌을 때면 그 사정을 아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바다에서 메추라기 떼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홍해수 앞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에 놓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사정을 아시고 홍해를 가르고 그들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무엇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고난에 처했다. 심지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도 큰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들은 고난을 극복하고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것을 이상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
여러분! 우리가 고난에 처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안 도와 주시면 누가 우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씁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펜실바니아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곳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벼농사를 짓고 이제 수확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들은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루는 헤아릴 수많은 메뚜기가 덮쳐와 다 익은 곡식을 쪼아 먹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발을 동동 굴리며, 소리쳐 보고, 막대기를 휘둘러보고,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일날도 아닌데 교회 종소리가 울려 교회에 가보니 한 성도님이 “여러분, 우리 다 같이 하나님께 기도합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쳐갈 무렵 밖에서 아주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에 나가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수많은 갈매기 떼가 어디서인지 날아와 메뚜기 떼를 다 잡아먹고 있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갈매기가 많은 배변을 하고 가므로 그것이 비료가 되어 그들은 그 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 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4:8-9)
왜냐하면 우리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능력이 심히 큰 보배 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는 오뚝이처럼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끝까지 예수님을 붙잡고 있다면 저와 여러분은 다시 일어납니다. 축복이 다시 임합니다. 치료가 다시 임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그 옛날 그들의 환경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 주위에는 수억의 아랍인들이 둘러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오뚝이처럼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그들의 사정을 아시고 그들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힘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우리에겐 죽음보다 강한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저주보다 강한 예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이 세상 어떤 질병보다 강한 예수님의 치료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세상의 절망보다 강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믿기만 하라.” 여러분! 기왕이면 그 분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을 바에야 끝까지 그를 믿으십시오.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