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보다 옳도다.

날짜: 
2023/06/03
말씀: 
창38:24-26
말씀구절: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설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 그들에게 사망이 다가왔습니다. 일단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 사망이 왔고, 질병과 함께 육체의 사망도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땅도 저주를 받아 옥토가 변하여 가시와 엉겅퀴가 계속 돋아나는 황량한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간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이좋게 지냈던 동물들에게도 평화가 깨어지고 서로 잡아먹는 살벌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사단 마귀가 이 세상의 왕이 되어 우리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니 이 세상이 그야말로 지옥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나쁘게 되느냐? 도대체 하나님은 세상을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여러분, 이 세상이 이렇게 갈수록 살기 힘들고 악한 세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고 인간의 죄와 마귀 때문입니다. 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하나님 탓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보시고 “참 좋았더라.”고 거듭 감탄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와 마귀가 그 아름다운 세상을 이렇게 망쳐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매우 괴롭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옥으로 변한 세상을 하나님은 다시 천국으로 바꾸기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즉 장차 이 땅에 구원자를 보내서 그가 우리들의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귀신들을 쫒아내고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일단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이삭을 택하고, 또 그 아들 야곱을 택하고... 이에 대해 마태복음 1:2-3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는 낳고...”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38장은 바로 유다가 다말에게서 예수님의 조상인 베레스를 낳는 과정을 꾸밈없이 아주 세밀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넷째 아들인 유다를 택하여 예수님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만약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을 예수님의 조상으로 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를 택하셨습니다. 유다는 요셉에 비하면 윤리와 도덕성이 한참 뒤떨어지는 사람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이 금하시는 이방 여인을 취하여 장가를 갔습니다. 그녀로부터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장자 엘을 위하여 다말이라고 하는 가나안 이방 여인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장자 엘이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악하므로 하나님이 그를 죽이셨습니다. 그러자 당시 결혼한 형이 후사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 자녀를 낳아주므로 그 씨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 그 기업과 재산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관습법이 있었습니다. 그 법대로 야곱은 둘째 아들인 오난에게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씨를 이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난은 형수와 결혼을 했지만 자손이 생기면 그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닌 죽은 형의 아이가 되고, 따라서 형의 재산이 자기에게 오지 않고 다말이라고 하는 형수에게 돌아가는 것이 못마땅하여 땅에다가 일부러 설정을 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오나니’라는 단어도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매우 괘씸하다고 생각하여 오난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다말은 졸지에 두 번이나 과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팔자가 센 여인이 된 겁니다. 이제 유다는 셋째 아들인 셀라를 형수인 다말과 결혼을 시켜 그 형들의 씨를 이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자기 집에 들어와서 아들 둘이 죽으니까 셋째 아들도 죽을까봐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서 다말에게 셋째 아들은 아직 어리니까 그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리라고 핑계를 대고 며느리 다말을 친정집으로 쫒아버렸습니다. 그렇게 다말은 괴부가 되어 친정집에서 처량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시아버지 유다가 셋째 아들인 셀라가 이미 장성했는데도 자기와 결혼을 시켜주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 당시에는 여자가 결혼해서 남편이 죽고 아들도 없으면 완전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는 겁니다. 더구나 남편이 둘이나 죽었으니 사람들이 그 아내 다말이라는 여자 때문에 남편 둘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남편의 씨를 이어주지 못하면 큰 죄인으로 취급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다말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되는데 시아버지가 셋째 아들 셀라를 자기와 결혼시켜주지 않는 겁니다. 이제 몇 년 만 지나면 다말도 나이가 먹어 생리가 끊어지므로 아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계획을 세옵니다. 시아버지를 통해서 씨를 받아내는 겁니다.

하루는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가 가까운 동네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을 가리고 창녀로 분장을 해서 시아버지를 유혹합니다. 당시 유다는 아내가 죽고 외로운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며느리가 창녀로 분장한 것을 모르고 그 창녀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여러분,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유혹을 해도 단호히 물리쳤는데 유다는 나이가 먹어도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다말은 시아버지의 씨를 받아 단번에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세상에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말이 임신을 했는데 쌍둥이 아들입니다. 혹시 하나가 죽어도 스페어타이어, 즉 대타가 있습니다. 다말의 입장에서는 이제는 좀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유다에게 말합니다.

“당신 며느리 다말이 행음을 하고 임신을 했다던데...” “뭐야!” 유다는 노발대발하여 다말을 끌어내어 불태워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말이 끌려나와 말합니다. “내가 이 물건의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보니까 유다가 창녀와 관계를 맺을 때에 준 물건입니다.

유다는 즉시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셋째 아들 셀라를 며느리 다말에게 주어서 씨를 잇게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며느리가 내 씨를 받아서라도 남편의 씨를 이어주려고 했구나.” 애야, 너는 나보다 옳도다.“ 자-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말이 낳은 쌍둥이 아들 중 베레스가 구원자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여러분, 대개 어떤 정치적 위인이나 종교적 인물 같은 위인의 역사는 그것을 전달하려는 목적에 맞게 그 위인을 보기 좋게 미화하여 꾸며내는 것이 정석입니다. 특히 한 종교의 교주이거나 나라를 세운 왕의 경우는 거짓말이나 과장까지 보태어 그 사람을 미화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장 중요한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 족보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아주 지저분하고 수치스러운 것인데 하나도 꾸미지 않고 그대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 성경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사실에 입각한 책이라고 더욱 신뢰가 갑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미화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타락성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이런 막장 드라마에서 나오는 스토리를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에이, 더러워! 예수님의 조상이 뭐가 이래? 이런 것들이 뭐가 하나님의 사람이야? 에이, 더러워서 같이 교회 못 다니겠네.”

여러분, 이렇게 말하며 시험 드는 사람들이 요즘도 제법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며 시험 드는 분들께 한번 묻고 싶습니다. “그런 당신의 조상님이나, 당신의 부모님의 스토리는 어떤가요? 그리고 당신의 과거의 스토리는 어떤가요?” 물론 이 질문에 “아- 우리 조상님은 떳떳하고요. 내 부모님도 떳떳하고요. 뭐- 저도 떳떳합니다. 적어도 이 정도 개막장 드라마는 아닙니다.”

아- 좋습니다. 흥분할 필요 없습니다. 개막장 드라마의 주인공 보다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훨씬 좋고 추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윤리와 도덕성이 훨씬 좋고 인품도 좋은 요셉을 예수님의 조상으로 택하지 않고 유다와 같이 지저분한 죄의 성품이 있는 유다를 예수님의 조상으로 택하셨습니다.

더구나 자기의 목적을 위해 창녀로 분장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하는 다말이라는 이방 여인을 택하여 예수님의 족보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쓰시는 것을 보니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겠다.” 그리고 또 이런 깨달음이 옵니다. “야, 너도 더럽니? 나도 더럽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자. 우리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다. 홧팅!”

또한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하나님, 왜 요셉 같은 사람을 예수님의 조상으로 택하지 않고, 하필 유다를 택하여 이런 막장 드라마를 쓰십니까? 하나님은 취미가 참 별나십니다.” 그러면서 제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착한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도 하시지만, 도리어 죄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구나. 왜 그럴까? 아하- 그렇구나!”

뭐가 그래요? 아- 그러잖아요. 사단의 입장에서는 이미 자기 편이고, 자기 졸개인 저 죄 많은 인간을... 저것은 틀림없이 100% 지옥에 끌고 가는 녀석인데... 그걸 하나님이 택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니 사단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마귀야, 약 오르지? 용용 죽겠지!” 하고 아주 고단수로 원수를 갚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용해서 크게 써야만 더욱 효과가 나타나고 좋은 겁니다. 할렐루야! 제가 이런 진리를 깨달으면서 저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야- 김원효! 과거에 너는 어땠니? ”아이고, 주여- 주님이 아십니다. 죄송합니다.“ ”아- 뭐!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과거의 죄도 이미 사했으니 됐고... 지금은 어떠니?“ ”아이고- 주여! 지금도 여전히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가 속으로 제 자신을 살피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속으로 외칩니다.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물론 제가 나이도 먹고 목사이다 보니 선악과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좋을 겁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제가 다른 사람들을 보며 “아- 너희들 도대체 왜 이러니?” 하고 책망을 했다면 요즘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물론 그들이 나보다 하나님을 더 열심히 믿지 않습니다. 나보다 더 성경을 많이 보고, 나보다 더 기도를 많이 하고, 나보다 더 전도를 많이 하고, 나보다 더 봉사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그저 간신히 주일 예배에 나옵니다. 그것도 자주 빠집니다. 그것도 늦게야 나타납니다.

이전에는 그 모습을 보면 “아이고- 그렇게 믿으려면 차라리 믿지를 말지.”라고 속으로 말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아- 그러잖아요. 저는 하나님이 성령 충만을 주고 하나님의 음성도 듣게 하고, 많은 은혜를 주셨고, 목사를 만들어주셨는데, 저 사람은 별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도 못했는데, 목사도 아닌데 그 정도 하면 솔직히 나보다 낫잖아요?

예를 들면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동전 두 개를 헌금한 것과 100억이 있는 갑부가 만원 헌금한 것과 어느 것이 더 많이 헌금한 겁니까? 즉 능력이 적은 사람이 그 정도 하면 능력이 많은 사람이 좀 더 많은 일을 했어도 둘을 비교하여 판단하는 겁니다.

그리고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오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서로가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당신은 왜 자꾸 그래요?” 즉 “나는 괜찮은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 하고 상대방을 아래로 깔보며 말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대화하면 상대방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진리를 깨달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낫구나!“(복창)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심하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하얗게 회를 칠해 놓았지만 속은 시체가 썩고 있다는 겁니다. 즉 위선자라는 겁니다. 또한 그들을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무덤이 봉긋 솟아올라야 사람들이 그게 무덤인 줄 알고 피해 가는데, 그냥 땅과 같은 높이로 평평하게 무덤을 만드니까 사람들이 모르고 밟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7일간 부정해져서 7일간 근신을 해야 합니다. 즉 남을 시험 들게 함정을 파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새끼’라고 했습니다. ‘독사의 새끼’는 오늘날 한국의 ‘개새끼’ 보다 더욱 심한 욕입니다. 독사는 사단 마귀를 상징합니다. 고로 ‘독사의 새끼’는 마귀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종교적인 유대인들에게 매우 심한 욕입니다.

그리고 이런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자기들이 일반 백성들보다 낫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즉 자기가 남들보다 훨씬 의롭다는 겁니다. 그러나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조차 멸시받고 천대 받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여러분, 이 둘 중에 누가 더 의롭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리가 저 바리새인보다 의롭도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8:14) 즉 “당신보다는 내가 더 낫다.”고 하는 사람은 오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고, “당신은 나보다 의롭도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오늘의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남의 죄와 잘못은 잘 보이는데 자신의 죄와 잘못은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남을 비판합니다. 아- 물론 그런 비판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가 아니고 거의 사실일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남의 눈에 티를 보고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눈에 들보를 보고 스스로 반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을 향해 “아- 저런 죽일 것들!” 하며 크리스천을 죽이고 심하게 핍박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진리를 깨닫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딤전1:15)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가(두목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아- 저 새끼에요. 사도 바울이요.”라고 말한다면 좀 더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자기 자신을 보다 정확이 살펴보면 오늘의 본문에 유다처럼 “그가 나보다 옳도다.”라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보다 잘 믿어보려고 애쓰는 당신이 그렇지 못한 저 사람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으면 “내가 너보다 의롭도다.”라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허물을 보며 “너가 나보다 더 의롭도다.”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진리를 깨달아야 근본적으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런 진리를 깨닫고 겸손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그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끝까지 주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