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질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다.

날짜: 
2015/01/31
말씀: 
마22:15-22
말씀구절: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안 바쳐야 합니까?

설교: 

어른들이 가끔 애들에게 이런 질문을 함. “엄마 아빠 중에 누가 더 좋아?” 이때 아주 어린 아이들은 솔직하게 대답을 함. “엄마!” “아빠!” 그러나 애가 좀 머리가 커지고 그 질문에 대한 영향력을 아는 아이는 대답을 망설임. 왜냐하면 엄마가 더 좋다고 하면 아빠가 싫어할 테고, 아빠가 더 좋다고 하면 엄마가 시험이 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임.

그래서 좀 더 아이가 머리가 커지면 이 질문에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함. “둘 다 좋아요.” “아니, 그래도 누가 더 좋아?” “응... 둘 다 좋아요.” 아마 이 어린아이가 성경을 알았더라면 예수님처럼 이렇게 반문할는지 모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어찌하여 그런 질문으로 나를 시험하느냐?”

한국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 비교하여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음. 예를 들면 고향, 학벌, 결혼 상태, 과거의 삶... 등 해서는 안 될 질문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함.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도 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질문을 나도 모르게 대화 중에 불쑥하곤 함. 그리고 속으로 후회함. “아차, 실수했구나!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되는데... 이런 질문은 상대방의 프라이버시 문제고 기분이 상당히 나쁠 텐데...”

결혼을 앞둔 처녀 총각들에게 기혼자들이 해주고 싶은 교훈이 있음. 행여나 신혼여행 중에 이런 질문을 상대방에게 하지 마십시오. “자기야, 나 말고 몇 번이나 해봤어? 괜찮아. 나는 다 이해해. 나는 솔직한 게 좋더라.” 이 어리석은 질문에 어리석게 솔직하게 대답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거짓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는 어리석은 배우자에게 어떻게 대답하느냐? 이렇게 대답해 보십시오. “응- 우리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그런 질문은 부부 간에 하는 것이 아니래.”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려면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됨. 상대방의 마음과 인격을 상하게 하고,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질문을 하면 안 됨. 그런 질문들을 하면서 꼬치꼬치 캐묻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속으로 말함. “야- 니가 형사냐? 내가 죄인이냐?”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에게 이런 난처한 질문을 하면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음. 요즘 젊은 애들 말로 하면 참 재수 없는 녀석들이고, 어른들 말로는 버르장머리 없고 싸가지 없는 녀석들이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참 교만하고 악하고 못된 녀석들임.

그들의 질문은 이렇음.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안 바쳐야 합니까?” 성경을 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당시는 로마가 이스라엘 나라를 통치하고 지배했던 시대임. 황제에게 세금을 일부러 안내면 죽습니다. 그렇다고 세금을 바치라고 가르치면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힙니다. 결국 이 질문으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함.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그 사람하고 관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도 먼 당신이 되고 맘.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사람이 됨. 이런 난처하고 못된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질문으로 응수하면 좋습니다. “글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할까? 바치지 말아야 할까?”

아니, 자기도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왜 남에게 하는 겁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기분이 상당히 나쁘셨음. 그리고 이렇게 응수하셨음.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심.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가끔 보면 질문자가 상대방에게 질문을 하면서 자기의 만족을 얻으려고, 혹은 자기의 의도하는 대로 상대방을 유도하려고 하는 질문이 있음. 좋지 못한 질문임.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 여기 있는 김목사 어떠세요? 그렇게 나쁘지 않지요?” 제가 이 질문을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공식적으로 하면 이 질문에 “아닙니다. 당신은 나쁜 놈입니다. 죽일 놈이에요.”라고 솔직하게 말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반대로 여러분이 저를 시험 들게 하는 질문이 있음. 예를 들면 이런 질문임. 돈에 대해서 사람에게나 하나님에게나 굉장한 구두쇠 성도가 있음. 그 분이 저에게 핏대를 세우며 이런 질문을 함. “목사님, 십일조를 꼭 내야만 합니까?” 이때 목사가 “그래, 임마, 십일조는 죽어도 내야 된다.”라고 대답하면 그 다음 주일부터 그 성도는 우리 교회에 안 나오겠지요.

그렇다고 목사가 “성도님, 십일조는 구약의 사상이니까 신약에 사는 우리는 십일조 안해도 되요. 그러니 같이 내지 맙시다. 같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합시다.”라고 목사가 대답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 저보고 “십일조 낼까요?” 그런 질문으로 제발 저를 난처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십일조는 알아서 하십시오.

여기서 목사가 알아서 하라는 것은 니 멋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하라는 뜻임.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성도가 싸가지 있는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고, 싸가지 없는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음.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음.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질문은 싸가지 있는 질문임. 괜찮은 질문임. 정상적인 질문임. 이 정상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성의껏 바르게 대답해주셨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사람이 몰라서 질문하는 것은 정상적인 질문임. 그런데 뻔히 알면서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들고 시험하는 질문은 좋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음. “하나님, 저 미운 녀석을 죽일까요? 아니면 병신을 만들까요?” 이때 하나님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응, 죽이지는 말고 병신으로 만들어라.“고 대답했다면 이건 누구의 응답입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고 마귀의 응답임. 아니면 자기의 감정에서 나오는 응답임.

또 다른 나쁜 질문임. “하나님, 아무래도 이 여자는 내 갈비뼈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여자랑 이혼할까요? 말까요?” 이때 하나님이 “나도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든다. 속 시원하게 이혼하고 빨리 새 출발해라.”고 응답이 왔다면 이건 어디에서 온 응답입니까?

여러분! 마귀가 좋아하는 질문을 하면 마귀가 대답함. 반면 하나님이 좋아하는 질문을 하면 하나님이 대답함.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질문을 하면 내가 대답하기 쉽습니다. 처녀 총각들이 가끔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면서 이런 질문을 함. “하나님, 이 사람이 좋습니까? 저 사람이 좋습니까? 알아 맞혀 주십시오.”

이 질문 자체로는 정상적인 질문임. 그런데 문제는 이 질문을 하면서 이미 자기의 생각이 있다는 것임. 이미 90%는 자기가 점찍어 놓은 사람이 있음.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생각과 반대로 응답하면 “예수의 피! 물러가라.” 하고 또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 다시 한 번 잘 대답해 보세요. 남의 결혼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대답하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이 좋습니까? 저 사람이 좋습니까?” 이때 내가 하나님이라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니 멋대로 하세요. 괜히 나 핫바지 만들지 말고!” 여러분! 신앙생활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좋지 못한 질문을 하고, 좋지 못한 응답을 받고, 좋지 못한 길로 감.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을 탓하고 원망함.

그러나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바른 질문, 좋은 질문을 함. 그리고 바른 응답, 좋은 응답을 받고 바른 길로 감. 고로 하나님께 질문을 하기 전에 자기의 마음 상태를 먼저 체크해보십시오. 탐욕의 질문을 하면 탐욕의 귀신이 응답함. 교만의 질문을 하면 교만의 귀신이 응답함. 망령된 질문을 하면 망령된 귀신이 역사함.

그러나 순수하고 겸손한 상태에서 올바른 질문을 하면 하나님이 응답함. 오늘의 설교 제목은 “그런 질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다.”임. 연말연초에 쓸데없는 탐욕과 교만의 질문을 하지 마십시오. 연말연초에 헛된 맹세도 하지 마십시오. 자기의 위치를 잘 지키어 꾸준하고 겸손히 가십시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역사함. 완벽하게 역사함.

하루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함.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6-7)

어찌 보면 이스라엘의 독립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은 합당하고 종요한 질문인 것 같음.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 그것은 니네들이 알 바 아니라는 것임. 그런 질문 하지 말라는 것임. 그리고 니네들은 니네들의 사명이나 잘 감당하라는 것임. 그 사명은 바로 성령 받고 나가서 전도하라는 것임.

이러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제자들이 “주님, 어떻게 하면 전도를 잘 할까요? 어떻게 하면 교회를 잘 섬길까요? 어떻게 하면 열매를 잘 맺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더욱 겸손해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욱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아- 뭐 이런 좋은 질문도 많은데 왜 하필 그런 질문을 해서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가려고 합니까?

결론임. 질문이 좋으면 응답도 좋습니다. 반면 질문이 나쁘면 응답도 나쁩니다. 질문이 엉터리면 응답도 엉터리가 되기 쉽습니다. 고로 하나님께 응답을 받으려고 하기 전에 과연 그 질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질문인지 먼저 체크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 바른 질문을 하고, 바른 응답을 받고, 바른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