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짜: 
2007/05/19
설교: 

살전5:16-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에 지져스 가르샤라는 유명한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동료들로부터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삶을 보내던 어느 날 그에게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조각을 위한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채석장에 갔는데 인부가 부족하여 그가 직접 채석장에 나가 인부들과 함께 돌을 나르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돌이 그의 오른손 위로 떨어졌습니다. 겨우 돌을 들어내었지만 이미 그의 오른손은 완전히 문드러져 버렸습니다.
유명한 의사들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큰 사고였습니다. 조각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이제 끝이 난 것입니다. 가르샤뿐 아니라 그를 아끼던 모든 사람들이 실망을 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현실을 원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만 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왼팔로 조각하는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꾸준히 땀을 흘리며 운명과 싸웠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오른손 대신에 왼손으로 조각하는 기술을 다시 익혔고, 결국은 오른팔로 하던 조각보다 더욱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작품을 마을 한 가운데 세우고 그 작품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 이름은 다름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였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터널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복음의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셨습니다.
또한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극한 시련이 다가옵니다. 절망되고 낙심되는 상황에 눈앞에 펼쳐지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들도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부터 18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라는 말을 쉽게 해석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기뻐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무슨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어떤 사업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곳에 이민을 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앞으로 나와 우리 가족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 좀더 믿음이 있으신 분들은 금식을 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저 자신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가를 알기 위하여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환경과 형편에 상관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
여러분, 오늘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 당한 환경이 어떠했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수없이 매를 맞고, 손과 발이 착고에 묵이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는 도저히 기뻐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며 한탄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당하는 환난은 모든 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절망적인 환경 때문에 낙심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런 환경과 이런 위기 속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외쳤던 그 외침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여러분, 우리들이 이 외국 땅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근거는 ‘주 안에서’입니다. 주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할지라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의 경우 환경보다 더욱 어려운 인간관계의 악화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부부관계나 친구관계 혹은 이웃관계와 같은 인간관계가 나빠지지 않으면 어려운 환경을 잘 극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이나 환경은 견딜 수 있지만, 인간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할 때에는 정말 참을 수 없습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내가 밥은 굶을 수 있겠지만, 남들에게 조롱당하는 것은 견딜 수 없습니다.”
이런 말들은 무엇을 뜻합니까?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더 크게 어려움 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외국 땅 좁은 한인 사회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과의 관계가 뒤틀리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같이 봉사하기 힘들고, 기쁨으로 같이 교회 다니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한번 찾아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때문에‘ 기뻐합니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남편 사업이 잘 되기 때문에, 취직이 되었기 때문에, 남부럽지 않은 부요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듣기 때문에... 등의 여러 가지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때문에‘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의 삶이 최악의 환경으로 바꿔질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으로 배신당하고, 비난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의 고통은 외국 땅 좁은 한인사회에서 더 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쁨의 반대는 슬픔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당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외국 땅에서 기뻐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시각이 아닌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 주님을 굳게 신뢰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라.
케몬스 윌슨(K. Wilson)이라는 미국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재소에 다니는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침에 출근해보니 자기의 책상 위에 해고 통지서가 있었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황당하게 해고된 그는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직장과 자기 상관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올랐습니다. 그는 제재소 옆에 똑같은 제재소를 만들어 볼까 생각해 보았지만 자본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포자기한 나머지 집을 떠났습니다. 여러 달 동안 방황하면서 모든 것을 잊으려 했지만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가진 돈을 모두 다 써버리고 다시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자살하고 싶어. 모든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어.” 이때 아내는 남편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한 가지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이 있어요. 당신은 당신이 처한 이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기도해 본적이 없잖아요.” 그날 아내의 그 말 한마디는 그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맞아, 나는 기도해 본 적이 없지!”
그 후 그는 아내와 더불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기도하는 동안 신기하게도 자기 마음에 있었던 직장과 상사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서 조그마한 건축업을 시작했는데, 그 건축업이 너무 잘되어 5년 만에 은행 빚을 다 갚으며 자기 발로 일어 설 수 있는 기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새로운 소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건축을 하면서 여러 곳을 여행하다 보니 맘에 드는 호텔이 없습니다. 좋은 호텔은 있지만 그것은 너무 비싸고, 작은 호텔은 너무 분위기가 좋지 않더군요. 제가 호텔을 한번 지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하고, 아주 깨끗하며, 적절한 가격에 쉼을 제공할 수 있는 그런 호텔을 짓고 싶습니다.” 이런 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 둘 호텔을 짓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세계적인 체인이 되어 홀리데이인 호텔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큰 문제를 만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좀 작은 문제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문제라도 언어와 문화와 인종이 다른 외국 땅에서 당하는 문제는 고향 땅에서 당하는 것보다 더욱 큰 스트레스와 근심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문제 중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실수 때문에,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실수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실수 때문에 문제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 원망과 불평과 탄식, 그리고 자포자기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의 태도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기에 힘이 듭니다. 기도 자체가 스트레스요, 더욱 무거운 짐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려고 애쓰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제를 허락하시는 것은 기도하라고 하는 뜻이지 낙심하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우리와 더욱 가까이 지내고 사랑을 나누시기를 원하시며, 더욱 좋은 것을 허락하시려고 합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외국 땅에 포로로 잡혀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메대와 바사의 본토인들 보다 더욱 뛰어나서 국무총리가 되자 여러 사람들이 그를 시기질투를 합니다. 마침내 다니엘의 정적이 다니엘을 죽이려고 왕에게 법령을 발표하게 합니다. “누구든지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를 하는 자는 사자굴 속에 처넣는다.”
이것은 외국 땅에서도 하루 세 번 어김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다니엘을 죽이기 위한 법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계속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결국 법령에 묶여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기도하는 다니엘을 사자굴 속에서도 구출하여 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기도’라고 하는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특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그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능력을 이끌어 내게 됩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
여러분,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라는 분은 삼중고의 장애자였습니다. 그녀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듣지도 못했습니다.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고난과 역경에 쓰러지지 않고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녀는 건강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대학에 들어가서, 당당히 우등생으로 졸업했습니다.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녀는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8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가 노년에 이르렀을 때 한 신문기자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고통 속에서 일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따금씩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신 적은 없습니까?" 그때 헬렌 켈러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하나님을 원망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는 자기의 삶을 다 살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아! 참으로 나의 인생은 아름다웠다."
여러분, 당신이 헬렌 켈러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없는 것, 부족한 것 때문에 불평하기보다, 헬렌 켈러처럼 주신 것, 있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감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세 종류의 감사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첫째로 ‘만일(If)’의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조건부 감사입니다. 통계적으로 교회 안에서 약 70%정도의 교인들이 이러한 조건부 감사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무엇을 해주신다면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일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일 선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사는 일차원적인 감사이며 초보적인 감사이며, 어린아이의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때문에(Because of)‘의 감사가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교회 안에서 약 20%정도의 교인들이 ’때문에‘의 감사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건강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부요를 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남편 사업이 잘 되게 해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시험 잘 치게 해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이것은 If의 감사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아직도 온전한 신앙인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감사인 것입니다.
셋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의 감사가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교회 안에서 약 10%정도의 교인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교통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시험을 잘 치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부도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줄 믿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려지는 감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감사입니다.
한 가지 예화를 더 드리며 말씀을 맺습니다. 화단 구석에 장미 한 송이가 화사하게 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미는 언제나 불평이 가득했습니다. 장미는 눈만 뜨면 불평을 털어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장미는 밤이면 춥고 어둡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따뜻하고 환한 거실로 옮겨 달라고 주인을 졸랐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화분에 옮겨서 거실에 두었습니다. 얼마 후 장미는 또다시 주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여기는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니 창가에 옮겨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창가에 옮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장미는 창가에는 고양이가 다녀서 싫다며 방안 꽃병에 꽂아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싹둑 잘라서 꽃병에 꽂아 주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장미는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다시 햇살이 비치는 바깥 화단으로 옮겨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장미는 이미 뿌리가 잘려 시들어버렸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뽑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이 왜 쓰레기통에 버려져야 했을까요?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맛좋은 음식을 먹어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금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만족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까요? 범사에 불평하는 사람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며 감사하는 가운데 이 외국 땅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