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날짜: 
2021/10/24
말씀: 
골1:24-25
말씀구절: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설교: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단어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퀴리아칸(kyriakan)이라는 말로, ‘주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에클레시아(ecclesia)라는 말인데, ‘예수님을 최고의 지배자로 믿으면서 그분을 예배하기 위해서 모인 무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큐리아칸이라는 말은 주로 교회당(예배당)과 같은 어떤 공간적인 의미가 강한 반면,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공간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모임인 공동체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두 번째 단어인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훨씬 더 자주 쓰이고, 중요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너무 너무 기뻐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베드로의 반석처럼 굳건하고 바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때 사용된 단어가 에클레시아라는 말입니다.

혹 어떤 분들은 “아니- 예수님을 믿는데 교회(에클레시아)라는 조직과 기관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각자 예수님을 잘 믿으면 되지 않느냐? 더구나 요즘처럼 전염병이 만연하여 모이기를 서로 자제하는데 굳이 교회라는 공동체가 뭐가 필요하냐?”라고 말하면서 교회라는 조직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만약 교회가 그리 중요하지 않으면 뭐 하러 예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겠습니까? 예수님은 교회를 통하여 분명 하시고 싶어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고로 교회는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서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교회의 사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예배(라트레이아)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악과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까지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게 됩니다.

② 교육(디다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택하신 백성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③ 친교(코이노니아)입니다. 교회 공동체로 함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 교제하면서 사랑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자기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신앙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교제를 통해서 나의 부족한 부분을 사랑과 은혜로 채워가야 합니다.

교인들 사이에 서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사귀는 친교가 없이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교인들과 친교가 없는 사람은 바르게 신앙 생활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신앙 생활한다고 하면서 예배만 드리고 가버리고, 일주일에 한 번도 교인들과 사귐을 갖지 않는다면, 그건 신앙생활 가운데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④ 섬김(디아코니아)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과 또 성도들과 서로 사귐을 통해서 얻는 행복을 나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게 섬김입니다.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섬길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게 교회의 사명입니다. 세상을 섬기지 못한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반면 세상을 섬기는 그것만이 오직 교회가 할 일이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섬김은 교회의 사명 가운데 일부분이지만, 동시에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⑤ 선교(케리그마)입니다.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교회당 안에서는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교회당 밖에서는 우리 신앙인들의 입술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전도(선교)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 그게 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역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교회의 사명은 그 어느 것 하나 제외시킬 수 없는 것이고, 또 어느 것 하나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될 입입니다. 즉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들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그 사명들을 감당할 때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러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 안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통해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그 중요한 5가지 사명을 감당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그 중요한 5가지 사명은 목사님이나 교역자를 통해서만 이루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들은 모두가 힘을 합하여 그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교회가 교회다운 사명을 감당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교회를 ‘그의 몸된 교회’(24절)라고 말씀합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몸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교회가 이 땅에 남겨진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2000년 전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과 동고동락 하면서 일을 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부활 승천 후에 교회라는 몸을 입고 우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골1:18)라고도 합니다. 즉 예수님이 교회라는 공동체의 우두머리라는 겁니다.

또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교회의 일꾼’(25절)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교회의 일꾼’이란 헬라어 ‘디아코노스(diakonos)’를 번역한 말인데, 이 헬라어에서 영어의 ‘deacon’ 즉 ‘집사’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아코노스는 특별히 성직자들에게만 사용되던 단어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모든 자들에게 사용되는 보편적인 용어입니다.

요즘도 교회에는 ‘집사님’이라는 말이 아주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deacon(집사)’과 같은 또 다른 표현이 바로 ‘종(헬라어- 둘로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교회의 일꾼’을 NIV 영어 성경에는 ‘servant(종)‘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표현할 때 ‘종’ 혹은 ‘일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교회의 일꾼(집사, 종, 노예)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써진 당시 사회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기입니다. 당시의 노예(종)는 지금의 우리가 갖는 ‘종’의 느낌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 노예제도가 있는 사회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고, 게다가 노예 신분이 아닌 사람이 스스로를 ’종‘ 혹은 ’일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거의 드문 일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자원해서 종(노예)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구약성경에 보면 자원하여 종이 되는 딱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종으로 있던 자를 희년이 되면 빚을 탕감해주고 자유인으로 보내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주인의 종으로 계속 남아있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그대로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이전과는 다른 지위를 가집니다. 종은 종이되 자유를 가진 종입니다. 즉 자유인의 신분을 얻었지만 주인을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종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유인이고, 주인도 그의 인권을 유린하며 마음대로 부려먹는 종으로 여기지 않았고 친구나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할 때는 이런 성경적인 개념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신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구원해주신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해서 스스로 종이 되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이런 종을 ‘사랑의 종’ 혹은 ‘자유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종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일은 모두 주인을 사랑해서 한 일이기에 일을 하고나서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는 말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고 합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 종은 또한 ‘겸손의 종’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의미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에서 말한 ‘일꾼 된 자’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꾼이란, 종이란, 집사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며, 그 은혜를 알기에 기꺼이 즐거움으로 또한 겸손함으로 주님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을 교회의 일꾼(종)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자기 자신을 이렇게 교회의 일꾼으로 알고 즐거움으로 헌신하고,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추는 분들이 많을 때 교회는 진정 교회다울 수 있고, 참다운 주님의 교회로 꿋꿋하게 서 나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본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24절)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중에 누가 자기를 시기하고 질투해도, 누가 자기에게 마음 상하는 이야기를 해도, 혹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갖은 고생과 고통을 겪어도 그것을 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고난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진정한 일꾼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 것은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 주님을 따르다가 받는 고난이 필연적으로 있는데 자신은 그 고난을 피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면서 많은 교회를 세웠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로 사도 바울은 많은 교회와 많은 교인들로부터 영광을 받고,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사도 바울을 비난하고 그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도 바울이 삐쳤다고 말하거나 기분이 되게 나빴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고생하며 수고한 교회에서 칭찬과 영광은커녕 고통을 받는 것을 그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앞으로도 교회의 일꾼으로 일을 하면서 또 다른 고난이 다가와도 이를 피하지 않고 직접 몸으로 때우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교회를 섬길 때에 내가 칭찬을 받거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하면 일평생 교회를 섬기면서도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일하다가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사도 바울처럼 “아- 내가 일꾼이 되어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일을 하다가 당하는 고난이라면 마땅히 받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도리어 마음 편하고 기쁘게 일할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외국 땅에 와서 먹고 사느라고 혹은 공부하느라고 힘이 들고 바쁜데 교회를 위하여 또 고난에 동참하라고 하면 때론 무거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수고하면서 겪는 고난을 전혀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큰 기쁨과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이런 사도바울의 생각이 저와 여러분의 생각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