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몸을 의탁치 아니했다.

날짜: 
2021/11/07
말씀: 
요2:23-25
말씀구절: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설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누구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갓난아이일 때에는 부모가 항상 옆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모든 것을 돌봐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기 자녀들을 언제까지 돌봐줘야 할까요?

여기 캐나다의 문화는 자녀가 18세가 되기까지만 돌봐주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도 18세가 되면 독립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부모는 자기 자녀가 결혼할 때까지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 자녀들도 결혼하기까지는 부모님 집을 떠나지 않습니다. 뭐- 문화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캥거루 족’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어미 캥거루가 자기 새끼들을 주머니에 넣고 안전하게 보살펴 주는데 새끼가 다 커서 이제는 어미 주머니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머니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가 너무 무겁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장성한 새끼가 계속해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어미 주머니에만 머무는 겁니다.

이를 가리켜 ‘캥거루 족’이라고 합니다. 특히 요즘 한국은 청년들 일자리가 없어서 청년들이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다 보니 부모를 떠나기가 현실적으로 힘이 듭니다. 또 돈도 벌지 못하니 결혼도 힘들고, 결혼을 못하니 출산의 기회도 줄어들어서 한국이 세계에서 출산율이 꼴찌라고 합니다.

한국의 어떤 미디어에서 한국이 왜 출산율이 꼴찌인가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질문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그 이유에 대하여 대답을 했습니다. 그중 아주 눈에 띠는 대답을 하신 분이 있어서 제가 그 대답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아- 둥지가 없어서 그렇잖아요. 새가 둥지가 없는데 어떻게 알을 낳고 새끼를 깝니까?” 즉 직장도 없고, 돈도 없는데, 집값은 너무 올라서 장만할 수도 없고, 그러니 어떻게 결혼을 하고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 대답을 들어보니까 아- 쉽게 이해가 됩니다.

딸을 가진 부모의 입장에서도 장래 사위감이 직장도 없고, 둥지도 마련하지 못할 형편이라면 딸을 주기가 참 걱정이 됩니다. 그래도 요즘은 여권이 많이 신장이 되어 남편이 돈을 벌지 못해도 아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가정을 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여성의 인권이 안 좋아서 여성이 밖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을 매우 안 좋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딸은 장성하고 부모는 늙게 되어 딸을 더 이상 돌볼 힘이 부족해집니다. 그래서 어른이 된 여성은 자기의 몸을 의탁할 결혼 배우자를 찾게 됩니다. 이것이 당시에 여성의 결혼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아내가 자신의 몸을 일방적으로 남편에게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 역시 자신의 몸을 아내에게 의탁하는 상호 신뢰와 상호 도움의 관계입니다. 혹 부부가 살면서 남편이 아프면 아내가 남편을 돌보아주고, 아내가 아프면 남편이 아내를 돌보아줍니다.

그리고 자녀가 아프면 부부가 합심해서 자녀를 돌보아 줍니다. 그러면 나중에 그 부모가 늙어서 병들고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면 누가 그 부모를 돌보아 줄까요? 한국의 경우에 옛날에는 장남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늙으신 부모님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한국의 부모님은 자신이 늙을 때 자신을 돌보아 줄 아들, 특히 장남을 좋아하고 장남에게 더 많은 유산을 주었습니다. 구약 시대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남에게는 더 많은 유산을 주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힘들 때 나를 돌보아 줄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다는 것은 좀 더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한국도 개인주의로 사회로 변화가 되다 보니 서로의 몸을 의탁하는 상호보완의 관계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녀들도 늙은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도 늙어서 자녀들에게 얹혀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늙은 몸을 자녀들에게 의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들게 혼자 살아가는 독거노인들이 많이 생기고, 그들의 안타까운 모습도 자주 보게 됩니다.

캐나다의 경우는 의료보험이 모두 무료이고, 노인 연금이 제법 나오므로 부모들이 늙어서도 자신의 몸을 자녀들에게 의탁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젊은 분들은 이에 대하여 그렇게 마음에 와 닫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약해지는 노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몸을 최후까지 돌봐줄 좋은 국가가 있고, 좋은 제도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베풀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며칠이고, 몇 달이고, 예수님을 평안히 모시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집에 들어가 융숭한 대접을 받고 편리함을 제공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라.”

여러분, 예수님은 인간의 속성을 아셨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들이 예수님이 행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높이고 좋아하지만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지 않고 뭔가 자신들의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을 때에는 가차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할 것을 아셨습니다. 실지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거의 마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즉시 자신의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미친 듯이 외쳐댔습니다. 즉 예수님은 오늘은 나를 좋아하지만 내일은 나를 싫어하고, 배신할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거의 대다수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에게 신세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현재에는 굉장히 좋아하지만 나중에는 나를 배신하고 나를 힘들게 할 사람의 집에 들어가 같이 식사를 하고,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겠습니까?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 선지자요 메시아라고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같이 머무르지 아니하고 그들을 떠나서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 아니, 예수님이 그들의 임금이 되어서 그들을 다스리면 예수님도 좋고, 백성들도 좋고, 서로 좋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버리고 혼자 산으로 떠나셨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속마음을 다 아셨습니다. 그들이 지금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려는 것이지, 예수님의 통치하심을 진실로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으면 그들은 언제고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들의 임금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산에 가서 혼자 기도하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저의 경우도 어디 다른 지방으로 휴가를 가게 되면 특별한 용무가 없는 한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지지 않습니다. 물론 낮선 지방에서 나를 안내해주고 대접해 줄 사람이 있으면 당장은 편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도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속마음을 압니다. 그렇게 내 몸을 의탁하는 것이 나중에 서로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고로 그런 상처를 사전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그러는 겁니다.

시부모의 경우도 며느리가 사는 집에 오래 있으면 안 좋습니다. 나중에 며느리와의 관계가 안 좋아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저도 이제 62세가 되어 노인이 되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젊은이들에게 짐이 되지 말자. 늙어서 남에게나, 자식에게나 신세지지 말자.”

그리고 목사로서 성도님들에게 신세지기 싫습니다. 그러면 내가 혹시 아프거나, 혹시 궁핍해지거나, 늙게 될 때 나는 누구에게 내 몸을 의탁해야 할까요? 그래서 저는 기도합니다. “주여, 저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목회를 다 마치기까지, 늙어서 죽을 때까지 저를 돌보아 주시옵소서.”

결론입니다.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다가 나중에 더 큰 상처를 주고받고 힘들어질 수가 있습니다. 고로 불완전한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지 마십시오.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를 끝까지 돌봐주실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