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크신 은혜

날짜: 
2005/11/20
설교: 

고후6:1-2 그 크신 은혜
주일학교 한 어린이가 목사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머리를 감을 때 어디부터 감아요?" 그러자 목사님이 아무생각 없이 “응, 뒷머리? 앞머리? 옆머리? 아니면 귀밑?” 그랬더니 어린이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아니에요! 눈부터 감아야 해요! “아- 맞다 맞아! 눈부터 감지!”
여러분, 머리를 감을 때 눈을 먼저 감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당연하고 본능적이고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당연하고 본능적이고 쉬운 일도 막상 물어보니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감는다’라는 한국말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중 첫째는 ‘씻는다’라는 뜻이고, 둘째는 ‘(눈을)감는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퀴즈는 답을 듣고 나면 “아, 그렇지!” 맞아! 난 또 뭐라고!“ 하고 수긍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쉽게 답변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대답이 상상외로 너무나 쉽고 너무나 당연하기에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로서 마땅히 부모님의 은혜를 고마워해야 하고, 성도로서 당연히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란 헬라어로 ‘카리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값이 없다고 해서 싸구려라고 뜻이 아닙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가보면 좋은 작품들과 그림에는 가격이 붙어 있는데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 밑에는 ’값이 없다, priceless‘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외국 땅에서도 집이나 자동차를 돈을 가지고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안과 차안에 있는 공기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도저히 돈으로 팔 수도 없고, 돈으로 살 수도 없기에 우리는 공기를 그냥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는 값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또한 값이 없습니다. 고로 우리는 그 은혜를 그냥 값없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누가 부모님의 은혜나 하나님의 은혜를 값을 주고 사려고 한다면 그것은 부모님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희생을 우리가 어찌 값으로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성적으로 계산이 빠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업이 당시 목수였지! 그 당시 목수가 받는 보수를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넉넉히 잡아 시간당 50불 곱하기 하루 8시간 하면 400불, 곱하기 일년 365일 하면 146,000불, 그리고 예수님이 33살에 죽으셨으니까 인간의 노동 평균수명을 60살까지라고 하고, 이를 계산하면 146,000 곱하기 27, 합계 3,942,000이네! 이를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캐나다 달러 1불에 약 900원 하고, 35억 4천 7백 8십만 원이네!”
만약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희생의 은혜를 환산하여 “예수님,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희생의 대가는 35억 4천 7백 8십만 원이네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야, 너 되게 똑똑하다! 수학의 천재네! 네가 35억 4천 7백 8십만 원만 주면 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실 까요? 그 대답은 여러분이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영어로 “No!"
위와 같은 계산법으로 부모님의 은혜를 값으로 따지면 어떻게 될까요? 나를 낳아준 대리모의 가치 약 10만 불, 나를 먹여주고 길러주고 재워준 가치 하루 약 100불, 곱하기 일년 365일 하면 36,500불, 그리고 내가 자립하는 20살까지를 곱하면 730,000불, 플러스 대리모 가치 10만불 하면 830,000불이네! 이를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캐나다 달러 1불에 약 900원하고 7억 4천 7백만 원이네!“
이런 계산법으로 여러분 부모님에게 ”아버님, 어머님, 당신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한국 돈으로 7억 4천 7백만 원입니다.“라고 말하면 여러분의 부모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야, 너 나를 닮아서 수학을 굉장히 잘하는구나! 과연 너는 내 자녀다!“ 하고 칭찬을 하실까요? 그 대답은 여러분이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니지요.” 영어로 “No!"
물론 이렇게 예수님의 은혜를 이성적으로 계산하여 35억 4천 7백 8십만 원이요, 부모님의 은혜를 7억 4천 7백만 원이라고 생각하여 그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한다 해도 꽤 괜찮은 효자와 효녀가 탄생하고, 꽤 괜찮은 교인이 탄생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부모님의 은혜를 이렇게도 생각하지 못하고 아예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기는커녕 짐승만도 못하여 그 은혜를 원수로, 상처로 갚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약 10년 전에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미국으로 유학 갔던 박한상이라고 하는 아들이 잠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 아들은 유학생활 중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도박을 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돈이 필요하니까 부모님을 무참히 칼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부모님들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야, 우리 자녀 함부로 유학 보냈다가는 내가 죽을 수가 있구나!”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 또 얼마 후에 비슷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번에는 대학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아버지를 계획적으로 살해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자기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재산을 띠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스러운 것은 그들 부모님들이 모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요. 이들 아들들이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님이 자녀에게 꾸중을 하고 심하면 욕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혹 부모님이 감정이 격해져서 자기 자녀에게 “너 같은 것 꼴 보기도 싫으니까 나가 죽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자녀들이 “응, 그래, 내가 나가 죽으면 될 꺼 아니야!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말하며 용감하게 가출하는 자녀는 여기에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모님을 죽인 자녀들이 우리처럼 부모님의 은혜를 바르게 깨달았다면 차마 부모님을 죽이고, 부모님에게 가슴 아프게 하는 일들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바른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도 할 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가치가 얼마나 됩니까? 35억 4천 7백 8십만 원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주님은 슬퍼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 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거룩한 성도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잘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자신들이 잘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위가 아주 훌륭하고 율법을 잘 지키므로 하나님께 축복과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거부했습니다. “아니, 내 의로움으로도 넉넉히 천국갈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어야 되느냐? 예수님, 나를 위해 죽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히 쓸데없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으셔서 그것으로 부담 팍팍 주지 마세요. 나는 예수님 안믿어도 예수쟁이보다 착하게 살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 제발 부탁합니다.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맙시다. 제가 예수님은 다른 훌륭한 종교 지도자나 학자나 인권 운동가처럼 존경을 할 겁니다. 그리고 가끔 교회에도 나올 테니까 저를 지배하려고 하지는 마세요. 저는 그것이 취미에 안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를 바르게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 저 같이 못난 사람을 위해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그 은혜로 말미암아 저를 영원한 심판과 사망에서 건져내주시고 영원한 축복과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귀중한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앞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여러분, 은혜 받기 전에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나 같은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합니다. 스스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랍다고 때때로 눈물을 글썽이며 예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그 크신 은혜가 고마워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바쳐 순교하며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크리스천에게 이런 주님의 그 크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외국 땅에서 먹고 살기 바빠서 그렇습니까? 외국 땅에서 공부하기 너무 벅차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그 크신 은혜에 감격해 보았자 시간 바쳐 물질 바쳐 헌신해야 되고, 봉사해야 되는 손해가 따르기에 차라리 은혜를 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까?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신앙생활은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 실력으로, 내 고집으로, 내 판단으로 내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길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크신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겸손하게 감사하면서 바르게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져도 장독간 뚜껑을 덮어놓으면 물 한 방울도 고이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고 구원의 손을 아무리 내밀어도 우리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고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여러분, 은혜를 받아야 천국과 지옥을 알 수 있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있고, 은혜를 받아야 예수님 믿는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로 히브리서 4:16에는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입니다. 고로 그 크신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교회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며 헌신하는 중에 넉넉한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넉넉하게 감사하며, 넉넉하게 사랑하며, 넉넉하게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드라마 사극에서 신하들이 임금에게 '성은이 망극하여이다'라는 말을 하는 장면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아- 저것은 하나님께나 쓸 수 있는 말인데…'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성은(聖恩)은 '거룩한 은혜'라는 뜻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진심으로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본문이요 행복입니다. 이런 행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 외국 땅에서도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