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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은 그저 듣기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순종하며, 말씀을 실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말쟁이 듣기쟁이만 되지 말고 행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님들 중에는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익숙해 있는지 모릅니다. 설교 제목만 들어도, 설교 본문만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짐작을 합니다. 더구나 심지어는 설교에 나타날 예화까지도 알아맞힙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말씀의 제목, 본문, 예화대로 행하는 성도님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본문 22절에서는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행함이 없는 신앙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12:47-48)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되지 말라.”(약3:1)
즉 많이 듣는다고, 많이 깨닫는다고, 많이 안다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배우기만 하고 실천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심판을 더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어리고 잘 모를 때에는 그 어린아이가 웬만한 잘못을 해도 부모가 좀처럼 징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서 웬만큼 알고 행할만한 나이가 되었는데에도 행치 않으면 징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여러분,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거울을 쳐다봅니다. 그 거울을 통해 얼굴을 쳐다봅니다. 얼굴이 더럽습니다. 그러면 가서 물로 깨끗하게 세수를 해야 할 것입니다. 머리를 쳐다봅니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빗을 가지고 머리를 바르게 빗어야 할 것입니다. 혹 넥타이가 삐뚤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삐뚤어진 넥타이를 바로잡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거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만약 거울을 보고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얼굴이 더러워져 있고, 넥타이가 삐뚤어져 있는데도 그냥 다른 일을 하려고 깜빡 잊었다면 거울을 본 의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거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늘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 하나님! 말씀의 거울을 통해서 내 모습을 바르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고쳐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내가 깨끗이 씻어버려야 할 더러운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으면 나아가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 적용을 해야 하는 행함의 과정이 없다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것은 한낱 바리새인의 외식에 불과할 것이고 주님께 책망만 듣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행함이 없이 믿기만 하는 것은 진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 신앙이요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가짜 믿음을 가지고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6)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성경에 보면 기생 라합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5)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여호수아 장군이 여리고 성을 치기 전에 먼저 두 정탐꾼을 여리고 성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탐꾼들이 성안에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여리고 성의 왕은 두 정탐꾼들을 찾아서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정보를 얻어서 그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간 것을 알아차리고 그곳으로 군사를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생 라합은 그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성벽에 줄을 매달아 두 정탐꾼이 무사히 도망가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행한 것을 여리고 왕이 알아차리면 그녀는 죽고 맙니다. 그러기에 정탐꾼을 숨겨주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내놓는 위험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무릅쓴 행위가 있었기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성경은 말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인 유다 지파 살몬과 결혼해 예수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일을 말로서 하기란 대단히 쉽습니다. 어느 정도 성경 지식을 알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을 하면서 수고가 들어가고, 물질이 들어가고, 행함이 따르며 주의 일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말로서만 아니라 행함과 함께 주의 일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 박상례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한 달에 한번씩 가정에서 교구 목사님을 모시고 100여명 정도 모이는 교구 단합 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교구 식구들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구 단합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는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해 떡과 과일도 준비해야 되고, 목사님과 몇몇 분들의 식사도 준비해야 되고, 이것저것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물론 권사님은 돈이 많이 들어가도 자신의 집이 어느 정도 크기 때문에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먹어 노처녀인 큰딸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배를 드리면 굉장한 히스테리를 부리고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어 박상례 권사님은 같은 교구의 제법 집이 큰 다른 권사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교구 단합 예배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내가 될 테니까 권사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 어때요?”
그렇게 해서 교구 단합 예배는 박상례 권사님 댁이 아닌 다른 권사님 댁에서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과 교구의 식구들은 그 비용을 박상례 권사님이 모두 댄 것을 몰랐기 때문에 예배를 드린 그 집의 권사님에게 수고를 많이 했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예배를 드린 그 권사님이 박상례 권사님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지난 밤 꿈에 주님이 나타나서 ‘상급은 모두 박상례 권사 것이다.’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즉 힘이 든 물질 봉사, 행함의 봉사를 한 사람을 하나님이 칭찬을 하고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오늘 우리는 행함이 있는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갖추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이 외국 땅에서 행함으로 축복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 즉 행함에 있다고 했습니다.(고전4:20)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한 나에게는, 너에게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고로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야 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15:5)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혼자 못합니다. 이 외국 땅에서 자기의 능력을 믿고 살다간 큰 코 다칩니다.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며, 그 행하시는 일에 큰 복을 받으시는 한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