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좋아야 한다.

날짜: 
2016/12/18
말씀: 
계22:13
말씀구절: 

....

설교: 

어느덧 2016년 마지막 달인 12월이 다가왔습니다.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올해의 이 시간을 갖자가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유종의 미를 거두시기를 축원합니다. 욥기 8:7에 보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처음 보다는 나중이 더욱 빛이 나며, 시작보다는 끝이 더욱 아름다워지시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처음에는 좋아 보이고 행복해 보이지만 나중에는 나쁘게 되고 불행해지는 분도 있습니다. 특히 결혼식장에서는 신랑 신부 두 사람이 그렇게 다정하고 행복해 보이는데 나중에 보면 서로가 원수가 되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분명히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끝까지 같이 살자고 맹세를 했지만 그 맹세가 나중에는 깨지고 만 것입니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에서 낱말 맞추기 게임을 했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부부가 짝이 되었습니다. ‘나온 단어는 ’천생연분‘이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설명을 합니다. “당신과 나 사이를 뭐라고 하지?” 아내가 대답합니다. “원수” 남편이 당황하여 말합니다. “아니 그것 말고 네 글자 있잖아?” 아내가 또 확신에 차서 대답합니다. “평생 원수”
아- 이거 뭡니까? 처음에는 그렇게 사랑스럽고 행복해 보이던 사람들이 왜 나중에는 쓰디쓴 상처 속에 서로를 미워하는 원수가 되었습니까? 인생의 처음과 시작은 장미 빛 향기로 가득했는데 왜 그 나중과 끝은 쓰레기같이 악취 나는 인생이 되었습니까? 처음에 는 자기의 간이라도 빼어줄 것같이 좋던 사람이 왜 나중에는 깊은 상처만 입히고 돌아서는 끝이 안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까?
오늘날의 시대는 처음은 있지만 나중은 상실한 시대요, 알파는 그럴 듯하지만 오메가는 형편없는 시대입니다. 여러분, 결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혼하여 끝까지 잘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락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제의 신앙생활도 중요하지만 내일의 신앙생활이 더 더욱 중요한 것이요, 이 세상에서의 인생도 중요하지만 저 하늘나라의 인생이 더욱 중요합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끝이 좋아야 합니다. 2016년을 마감하는 이 시간에 우리는 내 자신의 나중과 끝이 어떤 모습으로 결론지어져야 할지 성경을 통해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끝이 좋은 사람과 끝이 나쁜 사람
성경에는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끝이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 끝이 좋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과 다윗은 그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베냐민 지파요, 풍족한 가정의 출신이요, 준수한 용모를 갖춘 사울은 나이 40세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자 그는 변하여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3가지 징조도 분명히 보았습니다. 당시 암몬 사람이 침입해 왔을 때 사울은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울의 왕권은 더욱 튼튼해지고 그는 이제 이스라엘의 당당한 제 1인자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이 세워준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 더군다나 요나단이라는 아들을 잘 둔 덕분에 블레셋 군대도 무찌르고, 사무엘 선지자의 지시를 받아 아말렉 족속도 멸하는 승리의 개가를 마음껏 불렀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과 더불어 찬란한 인생의 첫 출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쪽 구석에서 어느 때부터인지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야- 이 큰 일을 내가 내가했지! 어디 나보다 잘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그래!” 그는 어느새 목이 뻣뻣해졌습니다. 어깨에는 괜히 후까지가 들어가고, 걸음걸이도 옛날 같지 않았습니다. 이 사울은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 잘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인 사무엘 선지자가 해야 될 일을 자신이 몽땅 해치워 버리고 이를 책망하는 사무엘에게 조차 회개하기는커녕 “아, 당신이 늦게 오니까 내가 제사를 드렸지요.” 하고 변명하며 자기 합리화만 꾀하고 말았습니다. 아말렉 족속을 멸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 소와 양까지도 다 멸절하라고 했는데 사울 왕는 그만 탐욕에 눈이 멀어 이들 중 좋은 것을 전리품으로 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 선지자가 또 다시 책망하니 사울이 핑계하여 말하기를 “아,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가져왔는데 왜 그리 쫀쫀하게 굴고 있소!”라고 도리어 사무엘을 이상하게 몰아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시고 탄식하며 사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나자 사울에게는 이제 고통과 번민의 악신이 달라붙고 말았습니다.
밤이면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고, 등에서는 괜히 식은땀이 흐르며, 머리가 깨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더불어 사울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떠난 사울에게 는 하루하루가 지겹기만 했습니다. 이때 유다 지파 이새의 막내아들인 양치는 목동 다윗이 수금을 타며 사울 앞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찬양하라~♬”.
다윗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드리는 그 찬양의 능력 가운데 사울에게 붙은 악신은 떠나가고, 사울은 이때부터 다윗을 자기의 전속부관으로 삼고 때때로 악신의 고통을 당할 때면 다윗에게 수금을 타도록 명령했습니다. 여러분, 이 다윗이 도대체 누구였습니까? 다윗 스스로 고백하듯이 자신은가난하고 천한 사람이요, 형들로부터 다 떨어진 옷을 물려받고 냄새나는 양떼들과 더불어 추위 속에서 떨며 자야만 했던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그 형제들 중 이스라엘의 왕을 뽑을 때에도 다윗은 형들처럼 그 자리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날 찬밥 신세가 되어 이른 아침부터 양떼들과 더불어 여기저기 늦게까지 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이 다윗, 보십시오, 인생의 첫 출발을 퀴퀴한 냄새와 더불어 시작하는 볼품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를 택하여 기름을 부으시고, 이때부터 다윗은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에 또다시 쳐들어 왔을 때 하나님의 신이 이미 떠나버린 사울을 비롯한 수많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적장수인 골리앗 앞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차돌멩이 5개를 취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그를 쓰러트리게 되자,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큰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다윗은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요, 개선장군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여인들이 소고를 치며 노래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하고 사울보다 다윗의 공로를 더 높이게 되자 사울은 그만 시기와 질투심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다윗을 군대 장관으로 올렸다가 이제는 천부장으로 그 지위를 탁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나쁜 마음 품고 있는 사울에게 악신이 또 다시 강하게 내리자 그는 다윗을 죽이기 위해 창을 던지고, 군대를 보내고, 갖은 모략을 베풀며 9번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어느새 그 성격이 짐승같이 포악스러워지고 잔인해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여 오늘은 이랬다 내일은 저랬다, 왔다 갔다 하는 불쌍한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사울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는 극도로 불안한 나머지 나중에는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하고, 결국 그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 시체조차 성벽에 못 박히고 그 자손들도 모두 지리멸렬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이 사울, 처음은 좋았지만 그 나중은 수치와 불명예요, 시작은 하나님으로 출발했지만 끝은 악신의 노예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다윗은 사울로부터 수많은 생명의 위험을 받았지만 결코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다윗은 끝까지 자기 왕께 대한 지조를 지키고 계속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공의를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한 때는 사단의 시험에 들어 밧세바라는 한 여인을 간음하게 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살인죄까지 저지르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대해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책망하자 다윗은 즉시 하나님께 무릎 끊고 엎드려 자신의 죄를 눈물로 통회자복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나의 죄악을 깨끗이 씻어 주옵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다윗은 누구보다도 회개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기 위해서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이 다윗, 보십시오. 처음에는 양치는 목동에 불과했지만 그 나중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요, 하나님께는 합한 사람이요, 육신 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요, 우리에겐 위대한 신앙의 모범자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왕들 중에 특별히 다윗 왕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윗은 처음도 하나님이요, 나중도 하나님이요, 시작도 하나님의 영광이요, 끝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일생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제발, 다윗같이 끝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렐루야!
이 2016년을 결산하는 바로 이 시간 이 같은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는 처음에는 그럴듯하지만 그 나중과 끝이 결코 좋지 못한 멸망의 길, 심판의 길로 계속 치달려 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보게 됩니다.
2. 도대체 왜 끝이 나빠졌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울에게도, 다윗에게도 똑같이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말씀에 불순종했고, 다윗은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성경66권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해 놓고 이 말씀대로 살라고 저와 여러분에게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말씀대로 살면 그는 나중과 끝이 결국 좋아질 것이요, 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나중과 끝이 결국 좋지 않음. 고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7-28)
또한 신명기 28:15-19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여러분, 도대체 이 말씀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 말입니까? 요한복음 1:1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셨고, 또한 요한복음 1:15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떠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결국 살수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영혼은 결코 살수가 없습니다. 고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4:4)
또한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사8:20-21) “만일 누구든지 이 예언의 말씀 외에 더하든지 빼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또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치 못하게 하리라.”(계22:18-19)
여러분, 이단이 왜 이단입니까? 이단이란 글자 그대로 ‘끝이 다르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은 그럴 듯한 것 같지만 그 나중과 끝은 결국 사망과 멸망의 길로 가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좇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아담과 하와가 저주를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반드시 그 끝이 좋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를 저버리면 그 어떠한 사람도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끝이 좋지 않습니다. 사울이 자기보다 더 의로운 다윗을 시기하여 계속 죽이려는 행동, 이것도 하나님의 정의를 저버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반드시 심판 받고 그 올무에 자기가 걸려들고 맙니다.
왜 하나님께 노아시대 때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으며, 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을 화산 폭발로 멸망케 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각종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모두 짓밟아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택한 나라요, 하나님의 복을 주겠다고 약속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이 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습니까? 하나님의 정의를 저버리고 각종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모스 6:24,27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로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사로잡혀 끌어내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불의를 계속 저지르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지금은 말세지말입니다. 이 말세의 특징은 극도로 음란한 시대요, 도덕이 땅에 떨어지는 시대입니다. 수많은 처녀들이 환경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자기의 몸을 팔아먹는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모르게 시집만 잘 가면 된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남자들도 음행을 저지르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정의를 저버리고 난 후 끝까지 잘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시편 73편에 보면 아삽이라는 사람이 이상한정의를 저버린 악인인데 오히려 형통하고, 재물은 늘어나고, 고난도 없고, 죽을 때조차 고통도 없습니다. “이게 웬 일인가?” 이상히 생각했는데 결국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당하고 졸지에 망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정의를 끝까지 저버리면 제 아무리 잘난 사람도 종말에는 망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일을 발견했습니다. 분명 저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를 저버린 악인인데 오히려 형통하고, 재물은 늘어나고, 고난도 없고, 죽을 때조차 고통도 없습니다. “이게 웬 일인가?” 이상히 생각했는데 결국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당하고 졸지에 망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정의를 끝까지 저버리면 제 아무리 잘난 사람도 종말에는 망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3. 끝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저는 가지니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5-6). 즉 우리의 끝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안에서 계속하여 성령의 진액을 받아야만 됩니다.
고린도후서 13:5에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셨음. 즉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 끝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을 믿습니까? 저는 이전에 10년 간 교회를 다녀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요한일서 4:15에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고 하셨고, 요한일서 3:24에도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한다.”고 하셨고, 또한 요한복음 6:56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고 하셨지만 저는 제가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4:13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또한 요한복음 14:20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는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신, 예수님의 영, 보혜사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결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함을 받지 못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참으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떠나므로 끝이 좋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성령을 소멸해 버린다면 그 누구도 나중과 끝이 좋아진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할 수 잇단 말입니까?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고 했습니다.
성령과 동떨어진 생활을 계속 하다보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정의에도 동떨어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 나중과 끝이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자기에게 떠날까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0-11)
죽기까지 예수님을 좇겠다던 그 베드로가 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했을까요? 한 때 예수님을 그렇게 열심히 믿고, 그렇게 열심히 충성했던 사람들이 왜 이제 와서 끝이 안 좋습니까? 은혜 받고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기쁨이 충만했었는데 왜 이제는 그 기쁨과 사랑이 식어지고 말았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을 때에는 “주여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죽으면 죽으리라!”고 외쳤는데 오늘은 그 고백이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습니까? 모두 다 성령이 소멸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가지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계2:4-5)
즉 우리는 나중과 끝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첫 사랑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한 때는 크리스천을 옥에 가두고 죽이기도 했던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인 바울이 사도중의 사도요, 온 유럽에 복음을 편만 하게 증거하고,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가 된 것은 그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윗이 여러 가지 허물과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이 좋았던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떠나지 않고 계속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30세 까지 목수로서 일하시다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요단강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자기 인생의 끝이 좋아지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영원한 성령과 더불어 계속 동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우리는 끝이 좋아지기 위해서 좀 더 인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인내가 필요하며, 사람들을 용서할 때에도 일흔 번의 일흔 번까지 참을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결국 하나님께 복을 사람도 살펴보면 인내하는 사람이요, 다윗이 끝이 좋았던 것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기도하며 인내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떠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사명을 잃지 않고 인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느니라.”(딤후4:7-8)
여러분, 한때 예수님을 그렇게 잘 믿던 사람들이 왜 일순간에 타락하고, 그렇게 열심히 충성했던 불같은 사람이 왜 오늘은 그 충성의 불이 꺼졌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던 사람이 왜 나중은 육체로 마치는 것입니까? 바로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구비하고 온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10:36) “끝까지 참고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고,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않게 하고,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며, 흰옷을 입히며,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며, 내 보좌에 앉게 하리라.”(계2-3장) “잘 이기는 자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연약하여 혹 다윗과 같이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쓰러졌다고,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제 시험에 들었다고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좀 더 인내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6:14-15)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기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니라.“(약5: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인내하지 못하고 그냥 내려왔다면 저와 여러분의 영혼은 과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 만약 내가 인내하지 못한다면 나의 가정, 나의 자녀, 나의 교회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녀가 부부가 되어 백년해로 하는 것도 인내가 필요한 것이요, 하늘나라가 이 땅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것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합니다. “끝까지 충성하라. 죽도록 충성하라.”(계2:10)
제가 은혜 받은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1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시고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심. “끝까지 사랑할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울과 같이 끝이 좋지 않은 사람도 보았고, 다윗처럼 끝이 좋은 사람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마땅히 끝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정의를 저버리면 우리의 나중과 끝은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회개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성령님을 가까이하고 좀 더 인내해야만 합니다.
2016년을 보내면서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까지 지내오면서 처음과 시작은 그럴 듯 했지만 나중과 끝은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주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의 끝이 좋아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자리에 계속하여 주님의 손을 뿌리친다면 주님은 당신의 인생의 끝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아직까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신 분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서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의 처음과 나중을 책임져 주시는 주님을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을 영접하면 인생의 끝 날에 영원히 살 수 있는 소망의 선물을 얻게 됩니다.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작정하시는 분은 저의 기도를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