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을 위하여

날짜: 
2021/02/14
말씀: 
창21:9-19
말씀구절: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설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들을 결국 좋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좋은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나쁜 하나님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가 그런 마음을 주었나요? 도대체 뭐 때문에 하나님을 나쁘다고 생각합니까?

불신자들이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종종 믿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심이 들어서 그 믿음이 약해지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의 ‘안수지‘라는 복음성가 가수 분이 ’새롭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에서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분은 그 프로그램에 나와서 간증을 하려고 이전에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근데 당시에 그 분의 아버지가 췌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증 섭외 온 것을 뒤로 미루고 아버지를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죽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많이 했는데 아버지가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되고 도리어 하나님께 원망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는 우울증 증세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간증은커녕 믿음이 떨어져서 교회를 가는 것조차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는 깨닫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나님이 나쁜 분은 아니구나!”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의 아픔과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고 발견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고 ‘새롭게 하소서‘에 나와서 간증을 합니다. 그 분의 간증에 몇 분이 댓글을 남겨주었는데 그 중에 이런 댓글이 있습니다. “저도 아빠를 췌장암으로 하늘나라로 보내드렸습니다. 암 선고 받으시고 3개월 사시고 가셨어요. 수지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제는 그것도 주님의 주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즉 안 좋은 일이나 불행이 닥칠 때 그로 인해 처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되지만 나중에는 그 일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모두 선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나중에라도 깨닫고 돌아서면 참 다행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둔하면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즉 당장에는 좋지 않게 생각되는 것들도 나중에는 다 좋게 된다는 것을 미리 확실히 알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도 인생 살면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지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믿음의 전진을 계속 했으면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해가 잘 안 되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그러한 사건들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의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맹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아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는데 예수님이 싸가지 없게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하고, 그것도 아주 쌀쌀맞게 대답을 하는 것 보니 예수님이 참 무례하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을 즉시 들어 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아-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가 부탁을 하면 다 들어주신다.”라는 공식이 성립됩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중보자가 되는 겁니다.

즉 요즘 가톨릭에서 “마리아는 죄가 없다. 마리아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이 들어주신다.“라는 잘못된 교리가 있는데 이런 잘못된 교리를 지지하게 되는 겁니다. 고로 당시에는 마리아가 기분이 나쁠지라도, 그리고 예수님도 좀 쌀쌀맞다는 오해가 생길지라도 나중에 그런 잘못된 교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 부탁을 단호히 거절한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이 내 기도대로 다 이루어주시지 않습니다. 이때 이런 깨달음이 없으신 분들은 낙심이 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하나님께 대한 선하심이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들의 미래를 내다보시기 때문에 나중을 위하여 가장 좋게 하신다는 것을 미리 인지를 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나옵니다.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생한 모세를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 모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섭섭한 일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뭡니까? 성경에 나오는 확실한 이유 중 하나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 화딱지가 나서 그만 가지고 있는 지팡이로 바위를 탁탁- 두 번 치면서 물을 냈다는 것입니다. 즉 바위에게 명령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면서 물을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모세가 성질 한 번 잘못 냈다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면 우리들 중에 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세상에 성질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더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고 하신 분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모세가 성질을 낼 정도면 그 상황 속에서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성질이 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질이 나서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면 이것 참 심각한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천국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교리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모세가 단지 성질 한 번 냈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전체 맥락을 아는 분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가장 큰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중을 위해서입니다. 즉 그 당시 하나님이 율법의 사람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면 오늘날 신약에 와서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안타깝지만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모세가 죽고 나서 그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아시다시피 여호수아는 다른 말로 ‘예수아’ 또는 ‘예수’라고 합니다. 즉 오직 예수님만이 믿음으로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지킴으로,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런 모세가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된 교리는 그대로 굳어지고 마는 겁니다. 고로 하나님은 나중을 위하여, 믿음을 통하여 천국에 간다고 하는 바른 구원의 진리를 세우기 위하여 단호하게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좀 이해가 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의 시체나 무덤을 이 세상에 남기지 않고 없애버렸습니다. “아니- 그렇게 위대한 신앙의 인물은 죽어서라도 그 시신과 무덤을 잘 보관하여 후대에 길이 기리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하기도 쉬운데 여러분이 하나님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만약 모세의 시체가 잘 보존이 되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우상으로 모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시체라도 있으면 안 됩니다. 유다서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과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서로 취하겠다고 변론을 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유1:9)

만약 모세의 시체가 마귀의 손에 들어가면 마귀는 모세를 우상으로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 죄를 짓도록 유도했을 겁니다. 즉 하나님은 나중을 위하여 당장에는 우리가 좀 납득이 안 되는 일들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하나님의 뜻이 잘 납득이 안 될 때에는 “아하, 하나님이 나중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거구나!” 하고 깨달으면 좋습니다.

그런 이유 중에 또 다른 예가 있는데 하나님은 구약의 성막 중에서 십계명 돌판이 있는 가장 중요한 언약궤를 어디론지 없애버렸습니다. 그것 역시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성경의 원본도 없애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모두가 복사본입니다. 원본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캐나다에 와서 병원이나 병원용 비상차량(EMS)에 보면 뱀이 지팡이에 매달린 표시가 있습니다. 이게 뭐지요? 구약 시대에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니까 독사가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많이 물어 죽였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지팡이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놋뱀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으로 계속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이 “아- 이것은 잘못됐다” 하고 이 놋뱀을 아예 부셔버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우상 숭배가 될 만한 것들은 우리들을 위하여 아예 없애버리는 겁니다.

특히 요즘 사람들은 황금 송아지 즉 돈을 우상으로 많이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은 가끔 우리들에게 돈을 많이 주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가지고 있는 돈을 없애버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에게 돈이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익하지 못한 돈은 없어야만 도리어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좋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처인 하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갈이 낳은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자꾸 괴롭히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이 여종과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21:10)

이때 아브라함이 깊이 근심하며 번민하며 괴로워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스마엘도 내 혈육인데...” 그렇게 아브라함이 번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아, 번민하지 말고 그렇게 해라.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21:12)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어주고 어린 자식을 이끌고 나가라 합니다. 그렇게 졸지에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급기야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됩니다. 아이가 목이 말라 죽겠다고 소리 내어 웁니다. 어린 자식이 죽을 지경에 놓이니까 엄마인 하갈도 통곡을 하며 웁니다.

여러분, 이런 스토리를 들으면 속에서 화가 날 수가 있습니다. “아니, 쫓아내더라도 얼마간 재산을 띠어주던지, 당장 먹을 것이라도 충분히 줘서 내보내야지...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떡하나? 아- 참 냉정하다. 그리고 하나님도 이러면 안 되지요? 이거 완전히 인권유린 아닙니까?”

자- 이것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나중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오늘날 아랍인들의 조상입니다. 오늘날 아랍 사람들은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도 이스마엘을 번제로 드렸다고 말을 합니다.

즉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겁니다.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정통이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 아브라함 당시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지 않았거나 그에게 기업을 주었다면 이런 설이 더욱 힘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어그러지게 됩니다. 고로 당장은 안타깝지만 나중을 위해서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빈손으로 쫓아내신 겁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우리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섭섭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배운 사실, 즉 하나님은 미래를 내다보시기 때문에 나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다 뜻이 있습니다. 나중을 위해서입니다. 더 좋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로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십시오. 불평을 그치고 도리어 감사를 돌리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절대로 의심하지 마십시오. 결국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관 하에 저와 여러분에게 더 좋게 될 것을 굳게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