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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기독교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책이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입니다. 이 책이 쓰인 배경이 있습니다. 존 번연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자들의 손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본시 대단히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감옥에 갇혀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속히 제가 이곳을 나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어느 날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세미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고후12:9에 있는 말씀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는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비록 감옥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변함없이 족한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구나!”
이러한 사실을 깨닫자 지긋지긋하게 여겨졌던 감옥 생활도 그에게는 천국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장장 12년 동안 갇혀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쓰인 것이 「천로역정」입니다. 그는 자신이 말로 복음을 전할 때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가 쓴 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 그는 약해졌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오히려 더 크고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신비한 영적인 체험도 했습니다. 셋째 하늘로 표현된 낙원, 곧 천국으로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천국의 놀라운 광경을 자기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와 같이 신령한 체험을 했던 사도 바울이었지만 그에게는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는 마치 사단의 사자처럼 그를 괴롭혔습니다. 몹시도 그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에게 간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시는 아마도 그의 안질, 곧 눈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바울은 시력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다멕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아주 강한 빛이 그에게 비추어졌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사흘 동안이나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 뒤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일로 인해서 바울이 시력이 나빠지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도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시켜야 될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그에게 있어서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가시는 바울에게 몹시도 큰 고통을 주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가시가 나를 찔러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가시를 저에게서 물리쳐 주시옵소서."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바울에게서 가시가 제해지도록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듣고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비록 그에게서 육체의 가시가 제하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가시를 이길 수 있는 큰 힘을 은혜 가운데 얻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가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가시가 오히려 자기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바울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에게 있는 가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생각을 하던 가시가 사실은 자기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이상 그 가시를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억지로 그 가시의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시를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시가 원인이 된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약할 때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를 통해서 더욱더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믿음으로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었습니다. 믿음으로 자기의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이런 저런 가시로 인해서 우리가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찬송가 작가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창487장)
여러분, 누구에게나 찌르는 가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가시로 인해서 약해졌을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낙심을 해 버립니다. 좌절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만큼 우리는 인생의 실패자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우리의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자기를 찌르는 가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시가 자기를 찌를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무턱대고 염려부터 합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염려한다고 해서 너희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염려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4:6~7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염려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기도의 제목일 뿐입니다. 시편 50:15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여러분,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하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우리를 환난 가운데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환난이 변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축복된 계기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로 인해서 약해졌습니까? 염려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도 하지 말고 바울처럼 언제나 하나님께 나와서 아뢸 수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크게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방법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첫째,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경우입니다. 소경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눈뜨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간구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보게 되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동안이나 병들어서 누워있던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병 낫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그의 병을 깨끗하게 낫게 해 주셨습니다.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병 낫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원하는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둘째,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하시는 경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응답을 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시를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큰 은혜 가운데 가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가시가 주는 유익이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이나 동일한 제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피땀을 흘리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고난의 잔을 옮기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통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을 북돋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응답하시는 경우입니다.
옛날 영국에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친구들의 눈동자는 다 파란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자기의 눈동자만 갈색이었습니다. 소녀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 문제 때문에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소녀는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성경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눈동자도 친구들처럼 파란색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베개를 눈물로 적시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대를 가지고 맨 먼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기의 눈동자 색깔을 확인했습니다.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많이 낙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나서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인도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의 인도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파란 눈동자의 사람을 보면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은 갈색이었습니다. 인도 사람의 옷을 입고 인도 사람처럼 치장을 하면 영락없이 인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쉽게 사람을 사귈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쉽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받는 응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혜롭지 못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돌이 떡인 줄 알고 돌을 달라고 하나님께 조를 때도 있습니다. 뱀이 생선인 줄 알고 뱀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가장 좋은 응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가시로 인해서 약해지셨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