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거하라

날짜: 
2005/09/26
설교: 

요15:1-7 내 안에 거하라
이제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밴프나 카나나스키를 비롯해 로키 산에는 벌써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 캘거리도 서서히 단풍이 물들고 있습니다. 단풍과 함께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면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곳 캘거리의 가을을 맞이하다 보면 “아- 이제 곧 눈이 내리겠구나! 그 기나긴 캘거리의 겨울을 어떻게 지낼까? 주여, 춥지 않게 지내게 하여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가을을 맞이하면서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래, 가을은 열매의 계절이지! 농부가 지금까지 땀 흘려 수고한 것이 열매로 나타나 보람을 느낄 때지! 그런데 만약 농부가 열매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소출이 없다면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울까? 열매가 많으면 겨울을 훈훈하게 지낼 텐데... 그런데 열매가 없으면 겨울이 더 춥게 느껴지겠지!”
여러분, 우리는 열매가 많기를 원합니다. 삶이 풍성하기를 소원합니다. 어찌 보면 이곳 캐나다에 유학 와서 공부를 하는 것도 장래에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이민을 온 것도 한국에서보다 더 좋은 열매를 많이 얻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인생의 겨울을 보다 따듯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 없는 가을, 열매 없는 인생은 쓸쓸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결을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여러분,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초등학생도 알아들 수 있도록 너무도 쉽게, 그리고 너무도 확실하게 우리에게 풍요의 비결, 축복의 비결, 열매 맺는 비결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내 안에 거하라. 내게 붙어 있으라. 나를 떠나지 마라. 나를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가지된 우리는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안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가 생길 때부터 자연스럽게 붙어 있지만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이기에 예수님 안에 붙어 있기 위해서는 본인의 단호한 결단과 부단한 투쟁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예수님 안에 거할 의지도 있고, 예수님을 떠날 의지도 있는데 그 선택을 우리가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아니,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나는 가지라면 내가 뭐하려고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괜히 죽으라고?” 하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도 아주 단호하게 예수님을 떠나서 인생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믿지 않고 말합니다. “에이, 예수님 떠나 살아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 지금은 제가 아주 바쁩니다. 그러니 일단 바쁜 일을 마무리하고 나중에 예수님 안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진리를 깨닫고 체험한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들으면 속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쯧쯧쯧, 이 사람아, 어떻게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 살 수가 있겠는가? 가지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잘났어도 일단 나무에서 떨어지면 얼마 못가서 죽고 말지 않는가?”
오늘의 본문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 물론 꽃피운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화병에 담아놓으면 며칠은 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꽃피운 가지가 화병에 아름다운 모양으로 장식되어지면 많은 사람들에게 “햐, 저 꽃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우쭐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 칭찬과 존귀와 영광은 아주 아주 잠시뿐입니다. 결국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아무리 애써도 힘써도 말라버리고 맙니다. 칭찬도 말라지고, 부요도 말라지고, 기쁨도 말라지고, 소망도 말라지고, 행복도 말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말라진 나뭇가지를 쓰레기 모으듯 모아서 불에 던져 사르고 맙니다. 즉 예수님을 떠난 인생은 그 자체가 불행의 시작이요, 생명을 포기하고 사망을 향해 질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무서운 불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젊어서는 예수님을 떠나 독립해서 살고 싶겠지요. 예수님을 떠나면 보다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하겠지요. 자기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열매 맺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 떠난 인생의 결과를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이 진리는 바로 우리 자신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고백합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당신이 마음속에서부터 이 고백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상당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하기에 당신은 아직 너무 젊지 않은가 모르겠습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저자 안요한 목사님은 아버지가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목사님인 아버지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그늘이 너무나 지겹게 느껴졌습니다. 젊은 나이에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너무나 갑갑하고 따분하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를 쓰고 하나님의 품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일류대학도 나오고, 예쁜 아내와 결혼도 하고, 미국유학에 오를 수 있는 길도 열리고,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어. 하나님을 떠나서도 잘 되잖아.”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그는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도 떠나고 미국유학 허가 통지서도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거지가 되었습니다. 구두닦이 소년이 빌어다 주는 빵 몇 조각으로 전전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포도 나무되신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 떨어지면 말라비틀어지게 됩니다. 영혼이 말라비틀어지고, 가치관이 말라비틀어지고, 생활이 엉망이 됩니다. 결국 밖에 버리어져서 불에 던져 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지인 나는 포도 나무되신 주님으로부터 떨어지면 안된다.”라는 확실한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너무 과신하지 마십시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는 어디까지나 가지일 뿐입니다. 가지의 생명은 가지에 있지 않고 원나무에 있습니다. 가지는 결코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고 원나무에 붙어 있어서 계속하여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너무 따분하고 얽매이는 것 같아서 잠시 나무를 떠나게 되면 그것은 곧 사망을 의미합니다. 저주를 의미합니다.
물론 세상의 학문과 세상의 철학과 세상의 친구들은 예수님을 떠나도 얼마든지 살 수가 있다. 오히려 예수님을 떠나면 인생은 재미있게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하루는 배고픈 여우가 있었습니다. 여우는 먹이를 찾기 위해서 어슬렁거렸습니다. 여우는 연못가에 이르렀습니다. 보니까 연못 속에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서 놀고 있었습니다.
여우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 물고기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물고기 형제들이여! 연못 속에 갇혀 있느라고 얼마나 답답하십니까? 용기를 내서 한 번 뛰쳐나오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너무나도 자유스럽습니다. 또 그 속에 있으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큰 물고기들이 여러분을 잡아먹으려고 하고, 또 어부들이 쳐놓은 그물에 잡힐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위태한 그곳에 갇혀 있지 말고 용기를 내서 뛰어 나오십시오. 여기는 안전합니다."
여러분, 만일 물고기들이 그 말을 듣고서 연못 밖으로 뛰어나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우에게 잡아먹히고 말지 않겠습니까? 또 질식해서 죽어버리고 말지 않겠습니까? 물고기는 물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가지는 나무에서 떨어지면 안됩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앞에 놓여진 땅을 놓고 서로의 갈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때 롯은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의 눈에 비친 소돔과 고모라 땅은 아주 풍요하고 윤택합니다. 거기가 마치 지상낙원 같아 보였습니다. 롯은 그 성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인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단지 그렇게 풍요한 도시로 이민을 가면 자신이 행복해 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하나님을 떠난 롯의 결말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습니까? 롯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애써 모은 금은보화는 화산이 터져 모두가 불에 타고 화산재에 잠기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의 아내는 불에 타는 자기의 재산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죽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그의 두 딸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남편을 잃어버리자, 아비인 롯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비운의 씨앗인 모압과 암몬 족속을 낳지 않았습니까?
처음 하나님을 떠나 갈 때에는 그렇게 의기양양하고 자신만만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결말이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물론 얼마동안은 열매가 없이 고생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가 되자 그에게 영혼육의 축복을 허락하시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게 하심으로 만민의 아비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 예수님 안에 거하면 결국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진액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기 위해서는 하루 이틀 짧은 시간이 아닌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즉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지속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인내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열매는 과정이 아니라 총결산이기 때문에 결코 조급하게 중간 결산해서는 안됩니다. 대개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중도에서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을 보면 인내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조급해서 무엇이나 빨리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당장에 좋은 결과를 보기를 원하고 빨리 빨리 열매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열매 맺는 일은 그렇게 서두르면 안됩니다. 포도나무에서 열매가 맺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봄이 되어 싹이 나고 꽃이 피어야 합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세차게 불 수가 있습니다. 황충이 틈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바람이 불어도 황충이 틈타도 가지는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와 생사고락들 같이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외국 땅에 오기 위해서는 때때로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과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변치 않는 신앙고백입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신앙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결국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진액을 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어 추운 캘거리의 겨울을 보다 따듯하고 보다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