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날짜: 
2022/11/26
말씀: 
시142:1-7
말씀구절: 

1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4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설교: 

어느 한 노인이 시내 길거리를 가다가 큰 불편함을 겪었습니다. 그 노인은 마침 시청이 가까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 자신이 겪은 불편함을 시청 직원에게 민원을 넣으려고 했습니다. 마침 젊은 남성 직원이 보입니다. 그 노인은 그 남성 직원에게 여차여차해서 내가 시내 길거리에서 큰 불편을 겪었으니 그 불편함을 좀 제거해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남성 직원이 노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귀찮듯이 계속 딴청을 피우고 무시했습니다. 노인은 “아니, 이 젊은 직원이 왜 내 말을 자꾸 무시하지. 기분 나쁘게!”라고 생각하며 그 젊은 직원을 붙잡고 다시 한 번 정중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직원이 그 노인 분에게 뭐라고 딱 한 마디 했습니다.

여러분, 그 직원이 무슨 말을 했을까요? 한번 알아맞혀보십시오. 딱 한 마디입니다. 글자 수로는 세 글자입니다. 아- 물론 영어 아니고 한국말로 세 글자입니다. 뭘까요? ‘개새끼’ 아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개새끼라니! 그 말을 듣고 노인은 기가 막혔습니다. 자기가 혹시 귀가 어두워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그 직원은 그렇게 ‘개새끼’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 그냥 바쁘다고 자기 길을 가버렸습니다. 노인은 너무나 황당하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시청의 더 높은 사람에게 그 젊은 직원을 신고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장이나 더 높은 사람들은 약속도 없이 바로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 직원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고 조금 더 높아 보이는 여성 직원에게 다가가 자신이 방금 겪은 ‘개새끼’ 모욕을 신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 직원이 같은 시청 직원이라서 그런지 그냥 웃으면서 그 노인의 민원과 모욕을 무시하는 겁니다. 아- 뭐야 이거!

그 노인은 더 기분이 상했습니다.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 젊은 남성 직원을 모욕죄로 고소를 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개새끼’ 라는 말은 자기만 들었지 증인이 없습니다. 그 직원이 자기는 그런 말 안했다고 잡아떼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흔한 욕인 ‘개새끼’라는 말로 모욕죄가 성립되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아- 그러잖아요. 변호사처럼 법률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 아니면 일반 노인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리고 노인은 부자가 아닙니다. 변호사를 사서 고소할 정도로 돈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민사소송은 한번 말리면 시간 뺏기고, 몸과 마음이 심히 피곤해집니다.

암튼 그 노인은 그날 이 사건으로 인해 하루 종일 기분이 상했습니다. 화가 많이 났습니다. 우울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속에서 욕이 나왔습니다. ‘개새끼’ 그러다가 잠을 깼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이야기는 며칠 전에 제가 꿈에서 겪은 이야기, 즉 꿈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꿈에서 나온 그 노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제가 그 꿈을 꾸고 일어나서 바로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게 뭡니까? 이런 일로 인생 피곤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 나이도 제법 많고 이 땅에서 살 날도 그리 많지 않고, 요즘 전도도 하기 바쁜데 이런 일로 괜히 시간 낭비하고, 마음 상하고, 자존심 상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혹시 여러분들 중에 지금까지 제 꿈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목사님! 난 또 뭐라고? 그건 그냥 꿈이잖아요.” 하고 피식- 웃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잠에서 깨기 바로 전에 꾼 꿈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꾼 꿈이 또렷이 기억이 되는 것은 거의 계시의 꿈입니다.

무슨 계시일까요? 삶의 현장에서 이런 조그만 일로 인해 시간 뺏기고, 마음 상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우울해질 수 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기도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2022년도에도 합심으로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항상 기뻐하라.”는 성경 말씀처럼 우리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겁니다.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 큰 힘이 됩니다. 그 기쁨이 있기에 우리가 이 외국 땅에서도 주님의 일을 하고 힘과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갉아먹는 것이 있습니다. 꿈속에서처럼 이런 조그만 일들로 말미암아 기쁨이 사라지고, 도리어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나쁜 감정들이 계속 쌓이다보면 나도 모르게 큰 스트레스를 받고 심하면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결국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고로 순간순간 일어나는 이런 나쁜 감정과 기분을 즉시즉시 풀어야 합니다. 주님과 대화하면서 주님의 너그러운 마음과 용서의 마음으로 자기의 나쁜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아예 그런 조그만 사고도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께 미리 부탁하는 겁니다.

그리고 조그만 사고가 큰 사고로 번지지 않도록 주님께 부탁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런 설교를 하면 믿음 생활 처음하시는 분들은 좀 의아해할 겁니다. “뭐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그런 조그만 일들도 하나님이 컨트롤 하시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고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주시는가?”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꼭 예배 시간이나 기도시간에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고, 그렇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주님과 날마다 순간마다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구약 성경 시편에 보면 기도문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님께 아뢰며 자신의 힘든 처지를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로 인해 마음이 상한 그 감정을 하나님께 너무나도 솔직하게 아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달라고 합니다. 자신이 겪은 수치를 영광으로 돌려달라고 간절히 호소합니다. 때로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어찌 보면 “아니, 이래도 되나?” 할 정도로 너무나도 솔직한 감정의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아무리 친한 친구나 부부 사이에서조차 못하는 그런 감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이런 감정에 공감을 하며 응답합니다. “그래, 너 참 힘들겠다. 내가 너의 그 힘든 것을 잘 알고 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으니 역사해주겠다. 조금 있으면 너의 슬픔이 도리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오늘의 본문 시편 142편도 다윗의 그런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그런 어려움에 처할 때 ‘악-’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주먹으로 벽을 치거나 하면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혹은 술을 마시며 인생을 비관하기고 하고, 세상을 원망합니다.

혹은 자신을 이런 지경으로 만든 그 원수 같은 인간을 저주합니다. 그러나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 소리 내어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자신의 원통함을 하나님께 토해내고, 자신이 당하고 있는 우환을 고주알미주알 하나님께 진술합니다. 하나님이 내 상한 심령을 아시고, 나를 해하려고 하는 그들도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에 처한 나를 도와줄 사람도 내게는 없으니 하나님이 나를 도와달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의 부르짖음을 듣고 나를 건져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시며, 악인대신 의인이 나를 두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의 이런 기도를 들으면 마치 나의 심정을 대신하여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 다윗도 이렇게 힘들 때 이런 마음의 고통이 있었고, 이때 이렇게 기도했구나. 주여, 이 기도가 오늘날 저의 기도입니다. 그 옛날 다윗처럼 저에게도 역사해주세요.“ 하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자기의 속마음과 속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친구나 부부나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 그런 친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100%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토해내면 어떻게 될까요? “야- 너 미쳤구나. 완전 맛이 갔구나. 아- 이 새끼 완전 저질이네. 너 사이코구나. 나는 네가 무섭다.”라는 말을 듣고 그 친구를 자칫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감정과 기분을 아무리 친하더라도 그 앞에 다 토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속으로 답답합니다. 자꾸 스트레스가 쌓이고 원한이 맺힙니다. 결국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내 감정과 기분을 100% 솔직히 아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고상하지 않은 것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이코 기질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너를 택하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잘나고 의인이기 때문에 부른 것이 아니고, 내가 못나고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가식을 떨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못난 것을 일부러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원통한 감정을 숨김없이 아뢰면 됩니다.

사실 좋은 친구, 친한 친구는 서로 불편함이 없어야 합니다. ‘부랄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불알을 내놓고 지내도 전혀 부끄럽거나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냥 편안합니다. 성경은 우리와 하나님이 서로 가까운 친구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향해 서로 비밀을 털어놓는 가까운 친구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그분께 내 감정과 기분을 100% 토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내 감정과 기분을 100% 토해낼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더구나 그 친구가 항상 내 옆에 있고, 항상 내 말을 듣고 있고, 나와 기분을 100% 공감해준다면 그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리 스트레스가 되는 일이 생겨도 그 스트레스를 그때그때마다 친구에게 이야기하면서 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다윗의 이런 모습이 좋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겁니다. 누가요? 다윗이요. 그리고 오늘날 내가요. 여러분, 그 옛날 다윗의 원통함을 들으시는 하나님은 오늘날도 나의 원통함을 듣기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윗만 친한 친구가 아니라 나도 너도 하나님과 예수님과 친한 친구입니다.

그냥 친구가 아니고 ‘부랄 친구’보다 더 가까운, 나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한 둘도 없이 친한 친구입니다. 그리고 친구 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모두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의 이름으로 나의 원통함을 아뢰면 하나님이 듣고 역사해줍니다. 고로 인생 살면서 원통한 것이 있습니까? 친구 되신 하나님께 예수님께 그냥 토해내십시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고 오늘날도 역사하실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이 외국 땅에서 살다 보면 조그만 일에도 마음과 기분이 상하고 힘들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친구 되신 그 분께 자신의 사정과 형편과 원통함을 토해내십시오. 주님은 말씀합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40:27)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8-3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과 원통함을 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새로운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 그 원통함을 순간순간 아뢰므로 위로와 힘을 얻고 계속 전진하시기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으샤으샤!’ 계속 전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